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이사장, 北에 옥수수 지원 위해 모금
국제옥수수재단(이사장 김순권 한동대 석좌교수)이 북한에 옥수수를 보내기 위한 모금을 진행 중이다. 이 재단은 세계적 육종학자인 김순권 이사장이 개발한 초당꿀옥수수를 북한 어린이에게 지원할 예정이다.
김 이사장은 10년이 넘는 연구 끝에 최근 북한에서 쉽게 키울 수 있는 당도 15% 꿀초당옥수수 육종에 성공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뉴욕 콜롬비아대학교에서 ‘글로벌 식량 문제와 슈퍼 옥수수’를 주제로 강의하기도 했다.
1998년 1월 처음 북한에 방문했던 그는 현재까지 59차례 북한을 방문, 북한의 주된 식량인 옥수수 개발에 힘썼다. 첫 방문 후 국제옥수수재단을 설립하고 북한을 비롯해 식량난에 시달리는 국가에 옥수수를 보내고 있다. 그는 총 370여일 동안 북한에 있을 때 북한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김 이사장은 “2차, 3차, 10차 방문에서 총 3번,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생생한 기적을 체험했는데, 정보기관의 요청으로 솔직히 북한 방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고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경험한 기적들에 대해 나눴다.
첫 번째 기적은 1998년 4월 2차 방북 당시에 일어났다. 김 이사장은 “북한의 농업과학원에서 경북대학교 농장에서 교배 육종된 시험용 옥수수 종자 3,000종을 분류하던 중 갑작스럽게 비와 바람이 몰아쳤고, 이 비바람으로 인해 종자 봉투들이 뒤섞이고 흩날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 나와 동행한 이들은 당장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동무들 강냉이 순권 것이니 모두들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선포하고 ‘하나님, 아프리카에 있던 저를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이곳 평양에 오게 하셔놓고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오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를 당장 이곳에서 죽이시던가 아니면 바람과 비를 멈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했다.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멈추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북한 관리들은 큰 일이 벌어졌다고 소리쳤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이처럼 생생한 하나님의 기적을 본 북한 관리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고. 그는 “기적이 일어난 후 농업과학원 리광수 부원장이 나를 데리고 견물 옆쪽으로 가서 ‘교회의 장로이신 아버지가 어린 시절 이야기하셨던 하나님의 기적이 바로 여기서 일어났다. 너무너무 신기하고 큰일이 날 위대한 사건’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북한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러한 북한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기적이 자주 일어나면 반드시 통일이 가까이 올 수 있다. 76년 간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아직 분단만 계속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애타는 심경”이라고 했다.
수원19호는 87개 협동농장에 심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북한 제1품종 화성1호보다 평균 23% 증산했고, 다음해 대대적으로 강냉이 19호로 심었다. 김 이사장은 “강냉이 19호가 적어도 수백만의 북한 동포를 구출했다고 확신한다. 남한의 강원도에 적응하도록 육종된 수원 19호는 평창, 영월보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고, 경사지가 많은 북한에서 더 잘 자라주었다. 남한 동포들이 북한 동포들을 사랑해서 보내준 큰 선물이라고 전국적으로 ‘강19호’ 보러가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두 번째 기적은 1998년 7월 3차 방북 당시에 발생했다. 김 이사장은 “원화리 협동농장이 있는 순환공항에 내리면 오른쪽으로 협동농장이 보였다. 북한 행정조직은 면 단위가 없고 군-협동농장-리 조직이다. 수원19호 (북한이름 강냉이 19호)를 많이 심어 놓은 원화리 협동농장을 방문하여 작황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많이 내려 협동농장에 방문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머세이드 벤쳐 두 대로 방문을 하려다 한 대만 가려고 했는데 소낙비가 너무 많이 내려 고려호텔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이어 “나는 ‘이번 3번째 방문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며 화를 내고 차 오른쪽 창문을 발로 찼다. 그러자 ‘박사 선생이 화가 났다’며 고려호텔에 비상이 걸렸다. 한 시간 후 안내원들이 ‘만약 안전상의 문제로 사고가 나더라도 안내원들과 북한 당국에 책임 추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다. 난 ‘교통사고가 나도 절대 당신들과 북한 당국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농장으로 떠났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차 한 대로 농장을 방문하려 가는데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와이퍼를 최대로 돌려도 별 소용이 없었다. 도중에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권민 참사는 ‘운전수 동무, 이 마을은 절대 박사님 보여 줘선 안 될 마을인데 방문을 한다’고 야단을 쳤다. 난 신기하다는 듯 ‘안 보여 주어야 할 마을은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말하며 창을 닦고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별 것 아닌데요. 왜 비밀이 그처럼 많소 동무들. 내가 남측 간첩입니까?’ 해서 웃고 넘겼다”고 했다.
그는 “내 방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부에서 허가난 길로만 다녀야 했다. 너무 놀랍게도 협동농장에 입구에 도착했을 때 장대 같이 오던 비가 갑자기 멈추었다. 나도 너무 놀랐다. 이 농장은 처음 방문때 농장 회원 1번 김일성, 2번 김정일, 3번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내 이름을 회원으로 적어 넣으라고 했다. 그래서 통일된 후에 가입하겠다고 했다. 이 농장은 같은 한 씨였던 한경화 농장관리의원장이 날 보고 ‘형부’라고 하면서 남포에 가서 비료를 10톤 더 받아왔다고 한 농장”이라고 했다.
그는 “불편함 하나 없는 상황 속에 1시간 동안 작황을 살펴보고 협동 농장을 떠나자 또 다시 장대 같은 비가 내렸다. 권민 참사는 ‘하나님께서 박사 선생 우리들 강냉이를 살펴보라고 비를 멈추었다’고 말했다. 권민 참사는 ‘박사 선생 믿는 하나님이 아프리카에 안 계시고 북조선에까지 와서 장난을 치셨다’라고 했다. 내가 ‘장난이라고요? 하나님께 약올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를 해야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권 참사는 ‘북에서 장난은 큰 사건이 벌어졌다는 뜻’이라고 말해주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는데 고은 시인과 유홍준 영남대 교수님을 만났다. 오후에는 평양에는 2시간 떨어진 은산 강냉이 연구소를 방문했는데 연구소에 도착하니 비가 멈추었으나 오전 같이 극적인 멈춤은 아니었다. 안내원들이 ‘큰 물이 안 나게 박사 선생을 북에 붙들어 놓는 것도 고려해야 된다. 비가 너무 와서 홍수가 나면 박사 선생 책임져야 한다’는 농담까지 했다”고 전했다.
세 번째 기적은 옥수수 수확기 조사를 위한 1999년 9월 10차 방북했을 당시에 일어났다. 김 이사장은 “평양 칠골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박춘근 목사님이 나에게 교회 옆 땅에 심어 놓은 남새 (배추와 무) 밭을 보여 주면서 ‘어린 남새 모종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박사 선생이 기도해서 비오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종 박 목사님이 잘 통하지 집사(당시)인 제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이번에는 목사님 장로님들이 많이 동행했으니 부탁해 보시라’고 했다. 그래도 박 목사님은 ‘순권 박사 선생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북한에는 남새를 겨울 양식이라고 하는데 한 가정에 배추 100포기, 무 100개로 소금만 쳐 김치를 담가 겨울 내내 식사를 한다. 남새에는 비가 필요해서 목사님과 장로들 몇 분이 일부러 동행했는데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야단이었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다른 동행자들은 평양에 있고 나만 평양에서 2시간 떨어진 남옥 시험장으로 옥수수 가을 작황 조사를 하려 갔다. 강냉이연구소 땅에도 강냉이가 발아되지 않은 곳은 빈틈없이 남새를 심어 놓았다. 안내원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비를 안 주시는가?’라고 불평을 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은 내가 고려호텔에서 식사 기도할 때마다 ‘아멘’ 소리도 안 했는데 당신들이 하나님 같으면 비를 주시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들은 속으로 ‘아멘’ 한다고 했다. 옥수수 작황을 조사를 한 뒤, 땀이 너무 많이 났는지 함께 간 남자 3명이 바로 옆에 있는 대동강 최북단 상류강에 들어가 발가벗고 수영을 했는데 물이 맑아 땅 바닥까지 보였다. 밖으로 나와 속옷으로 몸을 닦고 고려호텔에서 사온 점심을 펼쳐놓았다”고 했다.
그는 “그리고 나는 ‘비오도록 기도하면 반드시 ‘아멘’ 소리를 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하나님, 하늘에서 타들어가는 남새가 안 보이시는지요? 비를 주셔서 북한 동포들의 겨울 양식 남새가 살아나게 해주세요. 방구만 치지 말고 비를 좀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 강냉이 연구는 제가 하지만 비가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비를 주시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생사를 걸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운전수 동무가 너무 크게 ‘아멘, 아멘’을 여러 번 해서 옆에 있던 두 연구원들 아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내가 ‘왜 아멘한다고 약속해 놓고 안 했는지’ 따져 물었더니 자기들은 했는데 운전수 동무가 너무 크게 해서 박사 선생이 못 들었다고 했다”고 했다.
이어 “그날 저녁 평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자기들이 아멘까지 했는데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길래 ‘목사님과 장로님들까지 동행해서 평양에서 비를 위해 기도하는데 비가 안 오니 이제 마지막 수단으로 정확하게 얼마나 필요한 지 하나님께 보고해 보자’고 했다. 내가 ‘미국에서 박사까지 된 사람이 적당히 하나님께 보고하면 안 된다’면서 여러 번 정확히 필요한 비의 양을 말해 달라고 졸라대니 한 강냉이 연구 담당관이 ‘지금은 20mm의 비만 내려주면 남새가 살아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동일하게 네 명이 남옥 시험장으로 갔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가을 옥수수 품종 선발 점수를 주고난 후 전날처럼 땀을 식히기 위해 대동강 상류에서 남자 3명이 수영을 했다. 우리는 고려호텔에서 준비한 점심을 펼쳐 놓고 ‘아멘’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운전수 동무에게 ‘절대로 너무 크게 하지 말고 내가 옆에서 들어서 하나님께 보고 할 수 있도록 좀 낮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다른 두 명에게도 여러 번 아멘 연습을 시켰다. 나는 비 20mm를 하늘로부터 받기 위해서 필사적인 기도를 했다. ‘하나님, 오늘은 제발 천둥 방구만 치지지 말고 동무들이 요구한 비 20mm를 꼭 주셔야 합니다’. 나의 기도에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비 주실 줄 우리 모두 굳게 믿는다’ 기도하고 ‘아멘 아멘’ 했다. 다른 세 명도 아멘 소리를 적당하게 아주 잘 했다. 그런데 평양에 가까이 올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자기들 아멘 때문에 비가 내린다고 무척 좋아했다. 다음날 주일 아침 봉수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는 도중 강냉이 담당관 선생에게 ‘어제 밤 비가 얼마 내렸어요?’ 라고 물으니 ‘20mm 밖에 안 내렸어요’라고 답했다. 내가 ‘동무가 요청한 대로 정확하게 비가 내렸으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일이지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약 올리지 말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봉수교회에 도착하니 이 목사님께서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 목사님은 교회 옆에 남새가 살아가는 것은 보여주면서 너무나 좋아하셨다. 설교 도중에 ‘순권 박사 선생과 북한 동무들 세 명이 어제 남옥 강냉이 연구소에서 기도하고 아멘을 잘 해서 요청한 비가 정확히 20mm 내려 겨울 양식 남새가 살아났다’고 말씀하시며 ‘위대하신 하나님을 잘 믿으면 67일간 가뭄 속에서도 비가 내리고 큰 홍수도 안날 수 있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는 “오후에 원산으로 갔는데 ‘태풍이 오고 장마가 들어 비가 200mm 정도 와서 벼가 다 쓰러졌다’며 차를 길가에 세우고 ‘박사 선생, 논에 들어가서 배를 일으켜 세우시라우. 박사 선생이 하나님께 실수로 0자를 하나 더 붙여서 비 달라고 해서 200mm 비가 왔다. 박사 선생도 실수할 때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동무들, 우리 어제 기도할 때 평양 부근에 남새밭 위에 20mm 비 달라고 했지 멀리 떨어진 (250 km) 원산은 포함 안 했다’고 말했다. 한 안내원은 ‘하나님, 정말로 무서운 분이다. 어떻게 평양에서만 요청한 만큼 비를 주시고, 원산에는 이렇게 비를 많이 주시나’라고 했다. 난 ‘당신은 은혜스러워서 통일되면 남한에 가서 목사님 되어도 될 것 같다’고 칭찬해 주었더니 ‘목사님 월급은 얼마 주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북한을 사랑하고 보살피시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리고, 이 같은 기적이 북한 땅에 여러 번 계속될 때 대홍수와 천재 지변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이후 북에서는 김 이사장을 ‘칠골교회 명예 장로 김순권 선생’이라고 불렀다. 칠골교회는 김일성 주석 어머니 강반석 집사가 김일성 5살 때 데리고 새벽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진 교회다.
북한 북청에서 태어난 김 이사장의 부인 한은실 여사는 1살이었던 1.4 후퇴 당시 엄마 등에 업혀 국제시장 마지막 배를 타고 남하했고 바로 위 언니 한혜실, 오빠 한시영과 헤어졌다. 남한 총각 김순권과 북한 태생 한은실은 미국 하와이 호홀루루 동서문화센터 장학생으로 하와이대학교에서 옥수수 공부를 하던 중 만나 결혼을 하여 통일 가족을 이뤘다.
북한 당국은 주 식량 강냉이 증산을 위해 김 이사장을 두 번이나 납치해 북으로 데리고 가려다 실패했다고. 첫 번째 납치 시도는 1998년 3월 나이지리아 UN 국제열대농업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of Tropical Agriculture: IITA)에서 2명의 흑인들이 이바단 북한 아지트로 납치한 뒤 평양으로 데려가려다 실패한 것이다.
두 번째, 김 이사장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후 북한 동포들이 강냉이 식량 없어서 굶어 죽어간다는 CNN 뉴스를 듣고 아프리카의 ‘왕 슈퍼 1호’ (나이지리아 동전에 새겨진 옥수수) 개발로 나이지리아 중심이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 무조건 동포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귀국을 결심했다. 북한은 북한에 살고 있는 한은실 여사의 오빠와 언니로부터 친서를 받아 UN 근무를 하는 김 이사장을 초대했고, 김 이사장은 평양 청년 축전 참석차 두 차례 초대를 받고 정부에 보고 한 적이 있었다. 그는 1995년에 대구 소재 경북대학교 우수교수로 귀국해서 북한 적응 슈퍼 옥수수 연구를 계속 했다.
미국 CNN이 평양에 들어가면서 김 이사장의 자서전 “검은 대륙의 옥수수 추장” 2권을 갖고 갔다. 한 권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읽어 보고 ‘만약 김순권이 자진해서 평양에 안오면 납치라도 하라’고 했다고. 김 이사장은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감리교 서부연회 주선으로 LA에서 온 물리학 박 박사를 만나 북경까지만 가서 북한 동포를 살리기 위한 슈퍼 옥수수 개발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겁이 나서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미 18년 전 나이지리아 UN 연구소에서 납치를 모면힌 것을 생각하며 “UN을 통해 요청하고 남한 정부의 승인이 나면 북에 가서 강냉이 연구를 도와주고 싶다”고 답했다.
그의 북경까지 방문이 거절된 후, 북한은 부부 간첩을 파송했는데 부부가 울산의 한 다방에서 정보 당국에 검거 되어 부인은 독 캡슐을 먹고 현장에서 즉사하고 남편은 독 캡슐을 넘기지 않아 살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정원장은 국민담화에서 그가 “다음 주 대구에 가서 김순권 옥수수 박사를 만나 슈퍼 옥수수 종자를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말했다고 밝혔다. 이후 대구 경북대학교 옥수수 연구 농장 온실에 심겨진 옥수수 도난 사고가 일어났는데 이는 북한에 보낼 옥수수였다고. 이 때 정부와 언론은 북의 소행으로 보았으나 경북대 인근 신암동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다가 경북대 농장 온실에 가서 북한에 갈 옥수수 먼저 맛본다고 따먹어 보고 비둘기에게 모이로 준 것이 잠복한 경찰들에 의해 밝혀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김 이사장의 1차 평양 방문 후, 1998년 3월 2일 100개의 NGO들과 협력해 국제옥수수재단이 설립됐다. 시작 당시에는 연 20억 원의 국민모금으로 북한에 비료와 수원19호 (강냉이19호) 종자를 보냈는데, 국민모금이 줄어들어 연 2억 원 미만으로 모금이 되고 있다. 1998년 4월 10일 민족화해협력위원회 김창수 정책실장이 여수에서 바로 1000톤을 싣고 남포로 가서 북한 민화협·농업과학원에 직접 전달했으나 남측이 비룟값 2억 600만원을 갚지 않은 ‘민화협 비룟값 사건’이 발생해 재단 발전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고. 김 이사장은 “민화협 비료 사건만 없었으면 아마도 김정일이 김순권에게 약속한 통일도 되고, 그리고 핵도 초기에 포기 했을 수 있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남북 역사의 한 사건”이라고 했다. 재단은 국민모금으로 남측 민화협의 비룟값을 대납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현재 코로나로 재단에 운영 상의 어려움이 지속되어 2021년 1월 11일 포항의 통일옥수수센터로 본부를 완전 이전하고, 그 곳에서 우크라아나를 포함한 세계 23개 나라의 슈퍼옥수수 개발을 돕고 있다.
지난 2월 22일에는 뉴욕 콜롬비아대학교, Lerner Arledge Auditorium(강당)에서 한국 학생회 초청으로 ‘지구촌 식량 위기 속의 슈퍼 옥수수(Super Corn in the Era of Global Food Shortage)’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 강연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 명예총장 박찬모 박사(전 포항공대 총장)와 코넬대학교 에드 마바야 교수(Dr. ED Mabaya),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마틴 프레진 국장(Dr. Martin Fregene)을 비롯해 학생과 교수진 약 90여 명이 자리했다.
그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이후 옥수수를 북한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한 끼만 금식하면 그 돈으로 북한 어린이 10명을 살릴 수 있다”며 모금 동참을 요청했다.
우리나라는 연 1,000만 톤의 옥수수 알곡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으며, 수입 물량 75%가 가축 사료이다. 미국이 전 세계 옥수수 알곡의 반정도를 하는데 전체 생산량의 40%로 온난화 차단을 위한 바이오에탄올(E80)을 생산해 휘발류 차에 혼합하면 80% 이산화탄소(Co2)가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최근 수입 옥수수 값이 계속 올라 축산 농민들이 생을 포기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축산 사료 옥수수의 자급률 0.7%는 희토류보다 더 위험한 경제적 요소인데, 잎이 7개 더 달리는 거대 옥수수 유전자 잎, 줄기와 부산물을 소가 먹었을 때 소화률이 20% 더 잘 되는 bm3 유전자 (GMO 가 아님)로 같은 포기 옥수수 육종 사일리지를 만들 때 현재의 축산 사료값이 놀란 만큼 줄어들 것이다. 옥수수+콩 사일리지 만들면 영양가가 배가될 수있고 옥수수 2년, 콩 1년 농사로 콩 농사의 안전성이 높아지고 옥수수의 안전한 다수확 생산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굳게 닫힌 북한 문이 열려서 당도 15%의 영양식 꿀초당옥수수가 5월 전에 북에 심겨져서 100만 어린이들이 즐겨 먹고 내년부터는 북한 전 국민들이 먹을 수 있는 종자 생산이 이뤄지길 희망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국적으로 꿀초당옥수수가 심기고 생산돼 자체 소비하고 국경을 넘어 중국에 시판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북한의 문이 열려 평양에서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북한을 크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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