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설교]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
장소: 여주 소망 교도소
일시: 2023년 4월 6일 오후 2시 20분
본문: 마 9:12,13, 요1:14, 롬 8:3, 막10:45, 빌 2:6-8
성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이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란 제목의 말씀을 간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1.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첫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서” 세상으로 “찾아오신” 그래서 참으로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을 사시다가 죽으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 2:6-8).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서” 세상을 “찾아오시되”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말과 소가 사는 “구유”에 태어나셨다고 했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6,7).
그리고 태어나시자마자 헤롯 왕의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피난 생활”까지 하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2. 죄인들처럼
둘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서” 세상에 “찾아오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찾아 오신 곳의 사람들처럼 즉 죄인들처럼 “되시는” 삶을 사시고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삶을 사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를 지닌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같이 “되셨고”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셨다” 라고 성경은 지적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병자들과 죄인들을 주로 찾아 다니시면서 저들을 도우시면서 저들과 “함께 사셨는데” 그 이야기가 마 8장과 9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마 8:1-3).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5-36).
죄인들과 같이 “되시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삶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3. 죄인들과 함께
셋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찾아오셔서” 죄인들처럼 “되시는”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는데 여러 종류의 못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여러 종류의 못된 죄인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따뜻한 손길을 펴시면서 사시는 정말로 이상하시고 정말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서 “사랑과 섬김”의 귀중함을 강조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들보다는 병든 자들에게,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평안한 사람들보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그래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저들을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면서 병을 고쳐 주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보다는 건강한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죄인들보다는 의인들을 더 좋아하고 마음이 상한 자들보다는 마음이 평안한 자들을 더 좋아하는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정 반대로 건강한 사람들보다는 병든 사람들에게 쓸데 있는 분으로,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그리고 마음이 평안한 사람들보다는 마음이 상한 자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죄인들에게 펴신 손길
그러면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도저히 펴실 수 없는 버림받아 마땅한 극심한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실 다섯 가지를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문둥병자
성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첫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그 당시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멸시하던 문둥병자였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2,3).
2) 이방인 백부장
성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두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이방인 백부장이었습니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5-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3) 간음한 여인
성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창녀였습니다.
분노와 증오에 찬 군중들에게 둘려 쌓여 돌에 맞아 죽게 된, 두려움에 쌓여 벌벌 떨고 있던 창녀를 향해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4) 막달라 마리아
성자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일곱 귀신 들렸던 인간 쓰레기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축복의 손길을 펴셨습니다(눅 8:2). 그와 같은 행동은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판단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지나친 이상하고 놀라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안락사시켜야 마땅한 인간 폐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귀신의 쇠사슬에서 건져 내셨고, 윤락의 늪에서 건져 내셨고, 죄악의 덫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5) 로마 군인들과 강도
성자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들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던 로마 군인들과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행악자 강도였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중의 최고의 죄인들인 로마 군인들과 강도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죄의 기도를 드리셨고 다음과 같은 천국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저주받아 마땅한 극심한 죄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축복의 모습은 상식을 벗어난 너무너무 모순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4. 부활과 승천
넷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다음 이틀 동안 무덤에 파묻혀 계시다가 이틀 후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시고 부활 하신지 40일 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고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죽음을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실 필요도 없으셨고, 죽으신 다음 이틀 동안 무덤에 파묻혀 있으실 필요도 없으셨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실 필요도 없으셨고, 하늘로 다시 승천하실 필요도 없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일부러 취하신 일들이었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취하신 일들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과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무덤과 지옥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고귀하신 사랑의 뜻과 성자 예수님의 희생적인 구원의 뜻과 성령 하나님의 간절하신 도우심의 뜻에서 비롯하신 너무너무 귀중하시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일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의 무덤에서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들은 죽은 다음에 영원토록 무덤에 파묻혀서 썩어지고 말게 되는 영원한 불행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무덤에서의 부활 때문에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영혼들은 성자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무덤에 파묻혀있던 시체들과 함께 살아나서 영혼들과 육체들이 함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는 하늘의 영광과 축복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축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귀중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
사도 바울도 부활의 축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귀중하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24).
5. 재림
다섯째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로 세상에 “초림”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 우리 죄인들을 영원한 하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다시 세상에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 죄인들은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놀라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흐리면서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시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제자인 사도 요한은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께서 이루실 영원하신 구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동에 사로잡히고 또 사로잡히곤 했는데,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 “내가 보니” “내가 보니” “내가 보니” 라는 고백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 4: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계 5: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계 6: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계 7:9-12).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계 8:1,2).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계 9: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계 10:1).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계 11:15-17).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계 14: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계 15: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계 16: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계 18:1,2).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계 19: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결국 사도 요한의 마지막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고,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마지막 답변과 기도는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마지막 답변과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종말”의 관점에서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들은 방심하게 되고 자만하게 되고 무책임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의 성자 예수님 앞에서 종말의 관점에서 우리들 자신을 바라볼 때 부족한 우리들은 정신을 차리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책임감 있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소망의 극치이고 우리들의 영광의 극치입니다.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겸손의 비결이고 우리들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서머나의 폴리캅 감독도, 길선주 목사님도, 최권능 목사님도, 이성봉 목사님도,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이기며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죽도록 충성을 다하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오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첫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귀중하신 뜻을 따라서 하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으로 “찾아오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을 사시기를 시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찾아오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찾아 오신 곳의 사람들처럼 즉 죄인들처럼 “되시는” 삶을 사시고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찾아오셔서” 죄인들처럼 “되시는”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는데 여러 종류의 못된 죄인들에게 분노와 심판의 손길을 펴시는 대신 “사랑과 섬김”의 따뜻한 손길을 펴시면서 사시는 정말로 이상하시고 정말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다음 이틀 동안 무덤에 묻혀 계시다가 이틀 후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시고 부활하신지 40일 후에 하늘로 승천하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주의 죽음을 당하는 일과 무덤에 묻히는 일과 무덤에서 살아나는 일과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삶과는 너무너무 거리가 먼 정말 이상하시고 정말 놀라우신 일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로 세상에 “초림”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 우리 죄인들을 영원한 하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다시 세상에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 죄인들은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흐리면서 쓸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 대한 말씀을 들으신 분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가득히 베풀어 주셔서 우리들이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고 다시 오실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에 감동을 받고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재림” 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해서 영원한 하늘 집으로 올라가시는 축복을 받으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