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학교폭력은 즐거운 추억이 아니다
최근 넷플릭스(Netflix) 시리즈 ‘더 글로리(The glory)’ 등과 같은 학교폭력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학교폭력은 SNS 폭력, 언어폭력, 집단 따돌림 등 다양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폭력은 어떤 이유로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간혹 유튜브나 SNS에 보면 끔직한 동영상들이 떠 있다. 10대로 보이는 앳된 학생이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는 영상이다. 가해자들 역시 10대로 보였는데, 이들의 폭행 수위는 참혹했다. 번갈아 가며 피해자를 때렸고, 불붙은 담배를 피해자에게 가져다 지져 대기도 했다. 그건 고문이다.
차마 눈뜨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인간이 하는 짓이라고 하기엔 너무 끔찍했다. 부끄러움과 잘못을 모르고 자랑하듯 하는 행동에, 부모들도 저런 모습을 알고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학교나 군, 직장 등 어디든 폭력으로 얼룩진 시절은 결코 아름답거나 즐거운 추억이 아니다. 결코 한때의 낭만이 될 수 없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인간의 내성에 잠재한 광기는 이런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본래 공격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는 숙명으로도 보이는 폭력성을 억제하는 법을 윤리나 종교를 통해 제시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진 악의 요소를 최소화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윤리와 종교, 문화의 영역이다. 이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때 사회는 참으로 인간다움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탈선한 종교가 가진 광기도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나는 신이다>라는 넷플릭스가 공개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 이단, 사이비, 돌팔이들의 행태는 종교이기를 포기한 악마성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학교 폭력 써클이나 단체, 집단과 다중의 위력으로 개인을 상대로 하는 폭력은 분명 범죄행위다.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으로 하는 폭력도 있지만,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거나 욕설, 협박을 통해 말로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것도 폭력이다.
일종의 권력자들에게서 일어나는 현상도 그렇다. 자기 편이 많다고, 조그만 힘을 좀 가졌다고 상대방을 개(?)무시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 성향이다. 끊이지 않는 학교폭력, 절차 따지며 시간 끈 ‘학폭 소송’, 정모(某)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건에서 피해자를 지킬 ‘절차’는 사실 없었다.
학교폭력 처분을 ‘배려와 융합,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성숙함’의 계기로 삼은 이들은 얼마나 될까. 특히 집행정지는 주로 학급 교체, 강제 전학, 퇴학 등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가 요구되는 처분에서 많이 이뤄지지만, 집행정지가 인용되면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하는 피해 학생의 고통이 더 커진다.
절차적 하자를 주장하거나 집행정지를 신청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가해 학생의 법적 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에게도 교육을 받을 권리, 부당한 이유로 전학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니 이를 박탈하려면 적법한 절차를 거치는 게 필수적이지만, 피해 학생은 또 다른 가해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가해 학생과 분리하거나 피해 학생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창구가 늘어야 한다. 학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학교 부적응자들의 하소연쯤으로 들릴 수 있다. 가해자 부모 입장에서 피해자를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당사자가 되어 원인도 모른 채 폭력을 당하고, 집단적 따돌림을 당하면서 혼자라고 느껴질 때의 참담함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선 안 된다. 그런 자신이 싫어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학교를 등진 청소년들이 겪는 일들이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진정 인간은 폭력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일까. 아무도 마음의 문을 잠그지 않고, 밤이건 낮이건 범죄나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혼자서도 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며, 사람과 사람이 친구로서 함께하는 더 이상 폭력이 난무하지 않는 그러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학폭 피해자들의 다양한 사례를 듣다 보면, 뜨거운 사막을 혼자 걷게 하는 것과 같다. 학교폭력으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은 평생 치유되기 힘들 만큼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
어느 신문에서 보니, 따돌림을 피하고자 학교를 그만 둔 A양(18)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쫓겨난 문제아로 낙인찍혀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학교폭력이나 왕따에 의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적응자’로 취급당하며 학업을 중단하는 경기도 내 청소년 수가 매년 1만여 명에 달한다. 전국적으로 얼마나 될까. 이들은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청소년의 마땅한 권리인 교육적 지원과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말이 있다.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누구나 행복해 하는 학교, 아이들이 만족해할 수 있는 학교, 개성 있고 다양한 교육을 꽃 피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학교는 따뜻한 품성을 배우는 인성교육 현장, 즐겁게 배우고 느끼는 감성 충만한 교육현장, 꿈과 끼를 향해 달려가는 재능 신장의 시간, 변화하는 사회환경에 적응하는 글로벌 사회성 향상의 장, 학생들의 미래를 열어가는 준비과정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정성을 다해 돕고 다니고 싶은 학교였으면 한다.
교육청과 학부모,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동반자로 참여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끌어안는 소통과 배려,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학교로 만들어가야 한다.
정작 주변이나 당사자가 문제가 생길 때 학폭 피해자라고 바로 신고하는 일이 얼마나 될까. 학교폭력을 아이들끼리의 문제라고 쉬쉬하며 덮으려 하기보단 바로 신고하는 행위가 올바르고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인식 조성이 필요하다.
올바른 교육환경을 위해 선제적으로 감지하고 예방하는 시스템, 지역마다 학교폭력 예방기구나 캠페인이 필수적이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으로 최소한의 피해라도 막아야 한다.
오늘도 폭력의 사각지대에서 고난 당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케어 시스템(Care System) 구축을 통해 안전한 미래를 열 수 있다. 아울러 학교폭력에 대한 집단상담과 특강, 캠페인 활동 및 유해업소 단속 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학교폭력 예방과 청소년 보호에 앞장서야 한다.
어른들도 ‘강건너 불구경’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학교폭력 없는 지역을 만들기 위해 청소년 권리증진 및 보호 활동 강화 등 청소년 중심의 안전한 문화조성에 앞장서야겠다.
이효상 원장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작가, 시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