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계신 자(I AM THAT I AM, 출 3:14)”이다. 이 이름엔 ‘그의 정체성(Identity, 正體性)’과 더불어 ‘만물의 존재 근원’까지 함의돼 있다. 곧 그는 ‘누구에 의해 존재’케 된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라는 뜻이며, 그 외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 피조물이고, ‘인간과 만물의 존속(存續)’이 그에게 의존됐다는 말이다.
‘인간의 존속’뿐 아니라 범죄 후 ‘그의 구원’ 역시 하나님께 의존됐다. 창조주가 자기 형상대로 지은 인간이 죄로 파멸에 빠졌다면 그를 구원하는 것이 창조주의 몫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창조주’ 역할 외에 ‘구원자’ 역할을 하나 더 떠안은 것이라기 보단 ‘창조주’ 역할의 연장선상에서 된 것이다. 곧 그들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다 하다 보니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을 ‘창조주’인 동시에 ‘구속주’로 지칭한 것(사 43:1) 역시 하나님이 따로 두 가지 직임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구속주’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가 ‘창조주’가 아니었다면, ‘구속자’일 수 도 없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개혁신학’이 ‘창조’를 ‘신학의 전제(the presuppositions of theology)로 삼은 것은 타당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주·구속주’되심은 자연스럽게 ‘삼위일체’와 연계(連繫)된다. ‘한 분 하나님의 두 위(성부와 성자)’께서 ‘창조와 구속’을 서로 분담, 공조하셨다.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는 단지 ‘한 분 하나님의 삼위(三位)가 일체로 존재 한다’는 ‘하나님의 정체성(Identity)’의 표현만이 아닌, ‘우리의 구원자 됨’을 가르친다.
곧 ‘하나님이 사람 되신 삼위일체’가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발로’라는 말이다. ‘택자 구원’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사람 되신 ‘삼위일체’의 구현도 없었을 것이다. ‘성자’가 ‘창세(영원) 전부터 어린양(그리스도)’이셨음도 그 반영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29-30).”
◈삼위일체 계시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성경에는 ‘계시(Apokalupsis, Revelations)’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마 11:27, 롬 10:26, 고전 14:26, 고후 12:1;7 갈 1:12;3:23, 엡 1:17;3:3 벧전 1:12 계 1:1).
‘계시’란 ‘감추인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통해 감추어진 ‘영적 진리’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거기엔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 ‘창조와 타락’, ‘죽음과 부활’, ‘영혼의 불멸’,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등이다. 하나님이 계시로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열어 보여주시려’고 했던 가장 핵심적인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 되신 삼위일체’이다.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인간의 마음으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타 다른 계시도 인간 지성으론 파악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삼위일체’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三位)가 일체’하시며 그 중 ‘제 2위(성자)께서 사람 되어 택자의 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인간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탄복했던 것도 바로 이 ‘삼위일체’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8-10)”.
기독교에서 ‘영혼 불멸(immortality, 靈魂不滅)’ 교리와 함께 인간의 철학적, 논리적인 접근을 불허한 것이 이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 교리이다. 이는 그것이 오직 ‘성령의 계시’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이제껏 ‘삼위일체교리’가 그 순수성을 훼손당하지 않고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 계시’가 ‘하나님 사랑의 계시’임도 말하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 사랑’이 ‘삼위일체’와 연동(interlock, 連動)돼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삼위일체’가 죄인을 구속하는 ‘하나님 사랑’을 계시했다.
‘삼위일체 계시’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알려질 수 없었다. 따라서 ‘삼위일체 계시’는 ‘하나님 사랑의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
앞서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연동돼 있다고 했는데, 둘의 관계의 긴밀성은 ‘하나님 사랑’을 ‘삼위일체 사랑’으로 등식화(等式化) 할 수 있을 만큼 촘촘하다.
기독교의 요절(要節)이라 할 수 있는 다음의 말씀들은 하나님(성부)이 자신(성자)을 내어주신 ‘삼위일체 사랑’을 진술하는데, ‘삼위일체’자체가 ‘하나님 사랑’임을 진술한다.
“하나님(성부)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성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성부)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성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오직 하나님(성부)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성자)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역시 ‘삼위일체적’이다. “하나님(성부)이 자기(성자)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위 구절들은 ‘하나님의 정체성(Identity, 正體性)으로서의 삼위일체’만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주신 하나님 사랑으로서의 삼위일체’를 말씀한 것이다. 대개 ‘삼위일체적인 구원’이라고 하면, ‘택자 구원’에 있어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분담, 예컨대 ‘성부의 구원 예정, 성자의 구속, 성령의 적용’같은 것을 떠올리는데 여기서의 진술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삼위일체’ 자체가 ‘구원’이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 요일 4:16)”는 말씀은 ‘그가 행위로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 이전에 ‘삼위일체 존재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