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종파에 따라 ‘죽음’에 대해 각기 다른 이해를 가진 듯하다. 혹자는 ‘죽음(physical death)’을 ‘소멸(extinction, 消滅)’로 보고 ‘영혼 불멸(immortality, 靈魂不滅)’과 ‘내세(來世)’를 부정해 버린다. 혹자는 ‘멸망(destruction, 滅亡)’을 ‘소멸(extinction, 消滅)’로 이해함으로 ‘지옥(hell, 地獄)’을 부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죽음(physical death)’이 ‘소멸‧멸망’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먼저 그것은 ‘인간 존재(the existence of man)’를 ‘무(nothing, 無)’로 돌리는 ‘소멸(extinction)’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성경이 인간의 생명을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시 144:4)”에 빗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다만 ‘그의 죽음으로 더 이상 그를 대면할 수 없다’는 뜻이지 ‘존재의 소멸(the extinction of existence)’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전 3:21)’이다. 죽음으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창 3:19), ‘영혼’은 ‘낙원(paradise, 樂園)’으로 이동돼 거기서 거하다가(눅 23:43, 고후 12:4, 계 2:7) 그리스도 재림 때 그와 함께 강림하여 부활한 ‘무덤에 있던 육체’와 랑데부(rendezvous) 한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4-17).”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s),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 등에선 ‘멸망’을 ‘소멸’과 동일시한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참혹한 ‘지옥 멸망(地獄滅亡)’에 던져 넣으실 리 없다는 것이다. 곧 ‘구원받은 자의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고 ‘불신자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소멸돼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이기에 죽음으로 허무하게 소멸되지 않고 일부는 ‘영생(eternal life)’으로 일부는 ‘영벌(eternal punishment)’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마 25:46). ‘영생’도 그렇지만 ‘영벌’역시 인간의 존귀함에 걸 맞는 곧, 그에게 부여된 ‘책임의 소산’이다.
또 ‘죽음(physical death)’은 ‘멸망’과도 다르다. ‘멸망’이 ‘최종적인 심판의 결과(the result of the Last Judgment)라면 ‘죽음’은 단순히 ‘죄의 결과(the result of sin)’이며, ‘영생과 멸망’을 가르는 분기점일 뿐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여기서 ‘한번 죽는 것’은 ‘죄의 결과’로서의 ‘육체의 죽음’을, ‘그 후의 심판’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이뤄지는 ‘최후의 심판(멸망)’이다.
요약하면 ‘죽음’을 ‘소멸’로 규정하면 그것은 ‘허무주의(고전 15:32)’로 귀결되고, ‘멸망’으로 규정하면 그것은 가공(可恐)할 공포의 대상(히 2:15)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종노릇’하게 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이와 달리 ‘성경적인 죽음’개념엔 ‘소멸’과 ‘멸망’의 개념이 갖다 주는 ‘허무’와 ‘공포’가 함의돼 있지 않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오직 천국(來世)으로 넘어가는 ‘문지방(threshold, 門地枋)’ 혹은 ‘통과의례(passage rites, 通過儀禮)’쯤으로 수납된다.
이러한 ‘긍정적인 죽음관’은 ‘죽음’을 칭송하기까지 한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순교의 담력을 발생시킨다.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히 11:35)”.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29-31)”.
끝으로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으로서의 ‘멸망(destruction, 滅亡)’에 대해 부연하고자 한다. 먼저 그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흑암의 고통’이다. 성경은 이것을 ‘주의 얼굴과 그의 영광을 떠남’ 혹은 ‘캄캄한 어두움’으로 표현했다.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벧후 2:17)”.
다음으로 그것은 ‘영혼의 고통’과 함께 가공(可恐)할 ‘육체의 고통’을 수반한다. 일견 “‘육체’는 죽어 땅에 매장되고 ‘영혼’은 음부(torments, 陰府)에서 고통을 당하는데 어찌 ‘육체의 고통’운운하는가?” 라며 의구심을 표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죽어 ‘음부’에 들어가 겪는 ‘부자의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알려준다. 그의 몸은 죽어 이미 매장되고 영혼만이 그곳에 있는데도 마치 살아있듯 ‘불꽃 가운데서 생생한 육체의 고통’을 느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감각기관은 다 소멸됐고 신체는 이미 다 썩어 문드러졌음에도 그는 마치 살아있듯 ‘뜨거운 불의 고통’ 과 ‘목마름’을 느낀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까? 다만 ‘금생에서 우리의 제한된 경험’을 통해 유추할 뿐이다. 비유컨대, 사고나 질병으로 팔을 절단한 사람이 마치 과거 팔이 있었던 것처럼 때때로 팔의 가려움과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다.
육체 없이 ‘불구덩이 음부’에 들어간 ‘영혼’이 마치 ‘눈’과 ‘육체’가 있는 것처럼 ‘캄캄한 흑암’을 느끼며 ‘뜨거운 지옥불의 고통’을 영원히 겪는다는 말이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막 9:48-49)”.
그러나 택자의 하나님은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사 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사 그들을 이 ‘영원한 지옥불’에서 건져내셨다. 나아가 그들을 ‘당신의 아들’로 삼고 ‘영생과 천국’까지 그들에게 유업으로 주셨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