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선교칼럼] 선교사의 특권
얼마 전, 모스크바에서 5시 방향에 위치한 랴잔을 방문했다. 250km 정도 되는 길이다. 하얀 옷을 입은 듯 길게 늘어진 자작나무 숲이 도로 양편으로 줄을 서서 박수를 치며 필자의 길을 환영하는 것 같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복음 들고 달리는 길, 이 기쁨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현장에 도착하니 반가움으로 우리를 환영한다. 멀리 이바노보 도시에서 모스크바까지 350km를 달려온 제자 목사 두 명과 함께 갔다. 10여 명의 교회 리더들이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가볍게 삶의 이야기와 교회 생활을 나누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갔기에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하여 현지 목사 숙소로 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왠지 서늘함이 느껴진다. 알고 보니 집안에 스팀이 들어오지 않는다. 가스 연결이 아직 안된, 조금 외딴 마을이기 때문이다.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영하의 기온에 냉방에서 자야 한다는 부담감이 확 들어온다.
파괴된 이웃, 우크라이나를 생각한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지역에 난방이 안 되고 물도 없이 고통당하는 것을 생각한다. 얼마나 추운 겨울을 보냈을까?
필자도 도시 외곽에 거주할 때, 겨울이 끝날 무렵 땅속에 묻힌 수도관이 어는 바람에 40일간 물없이 견딘 기억이 새로웠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모두가 누리는 것은 아니기에, 언제든 이러한 상황은 벌어지기 마련이다.
다음 날 주일 예배는 11시에 시작됐다. 찬양으로 드려지는 고백이 참으로 은혜스러웠다. 러시아 찬양을 잘 들어보면 가사가 얼마나 실제적이고 은혜스러운지 모른다.
제자 목사와 돌아가면서 설교하니, 2시간이 넘어간다. 예배를 멈추고 간단하게 식사를 한 뒤 계속 예배가 진행된다. 말씀을 나누고, 전체를 대상으로 대화 상담을 한다. 30여 명이서 자신들이 궁금한 내용을 질문한다.
대부분은 교회 내 갈등 문제는 주도권과 자기 주장과 연관된 것이고, 개인 삶의 영역에서 자녀와 남편으로 인하여 생겨난 문제들이다. 아쉬웠던 것은 교회를 넘어 어떻게 신앙인으로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세상을 향한 사명에 대한 질문이 없어 아쉬웠다고 제자가 말한다.
예배를 모두 마치니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그만 하자고 했으나, ‘한 가지만 더’ 하면서 시간이 많이 지나간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 하고 마무리하면서, 다음 기회를 잡아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모두들 두 손을 꼭 붙잡고 진심으로 감사한다. 마음이 매우 기쁘고 즐겁다. 잘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면서, 참으로 행복함을 느낀다. 선교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선교사의 특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겨울은 오후 4시가 되면 어두워진다. 속히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출발한다. 이미 어두워진 도로를 달린다. 외곽 지역이라서 간간히 가로등이 보일 뿐, 미끄러운 눈길에 어둠을 뚫고 가는 길이 조금은 위험해 보인다. 안전하게 천천히 운전을 해서, 밤늦게 집에 도착한다. 왕복 500km로 멀지는 않았지만, 몇 시간 눈보라를 뚫고 운전하니 피곤하기도 하다.
늦은 밤 필자는 집에 도착했고, 제자들은 다시 기차역으로 향한다. 기차를 타고 350km를 또 가야 한다. 한밤을 새면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러나 복음 들고 수고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오가는 길에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제자들의 사역을 축복하고, 설교할 때는 핵심을 분명하게 직설적으로 하는 것이 대중을 상대로 효과적이고, 아는 것이 많은 제자에게는 말을 아끼고 줄이는 것이 유익하다고 조언한다.
피곤함에도 다음 날 여기저기 열심히 뛰다 보니 결국 입술이 터졌다. 쉬는 틈 없이 뛰었던 것이 무리였나 보다. 그럼에도 말씀을 들고 현장에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인가? 성도들의 눈이 열리고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이 피곤함을 씻어준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 위로의 말씀이 들려온다. 감사하고 행복한다. 나는 행복한 선교사이다.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