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칼럼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성혁명에 대해 우리 크리스천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응하여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이미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께서 이에 대해 발언하시고 계시므로, 필자는 의사로서 몇 마디 보태고자 한다.
의과학자들이 볼 때, 섹스에 관련된 모든 의학적 팩트들은, 소수 엘리트 성혁명가들이 정치사회적 논의를 통해 합의(consensus)하고 이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바와 확연히 다르다. 즉 의학적 올바름(medical correctness)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 같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을 그리워한다. “어머니 없는 아이”는 불쌍하다. 그 이유는 부모의 결혼을 통해 내가 태어나고 그 사랑으로 자라 현재에 이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탄생과 성장의 생물의학적 메카니즘은 실로 경이롭고 신비하다. 이를 연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엿보는 것이기 때문에, 의과학자들의 특권이 된다. 그러나 성혁명가들은 이런 과학을 부정하고 취소하려 한다.
그들은 왜 성혁명을 하려 하는가? 필자는 정신과의사로서 성혁명가들이 성혁명을 주장하는데 왜 그렇게도 열정적인가 하는데 관심이 있다. 본 칼럼에서 반복적으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오래 전부터 프리섹스를 추구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구 기독교 시대에는 그 죄성이 이단과 이교의 형태로 나타났고, 중세에는 인본주의로, 근대에는 계몽사상과 방탕주의(libertinism), 또는 문학과 예술의 형태로, 그리고 20세기에 성혁명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기회만 있으면 억압되어 온 본능적 욕망이 통제를 뚫고 나오려 한다. 그것은 인간의 원래 죄된 본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환영하는 세속적인 정신분석마저도 도덕(초자아)은 죄의식의 억제와 이상(ideal)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를 죄된 인간의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의 한 표현이라 본다. 성혁명가들은 양심상 죄의식이 불편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거부하는 반복강박적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것 아닌가 한다. 그래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도서 1장 9-10절)라고 하신 것 같다(이 성혁명 이데올로기가 지금 유구한 역사와 전통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공격하고 있다).
성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에 따라 현실을 재창조”하려 한다. 성혁명가들은 혁명으로 인류를 섹스의 파라다이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파라다이스는, 의학적 증거에 따르면 불임의 파라다이스(sterile paradise)일 것이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이미 다양성, 선과 악의 상대성, 포용 등등으로 분별력을 잃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가상현실의 주인공과 결혼하는 사람이 등장했다고 한다. 대중들은 잘 모른채 그 성혁명에 무력하게 순응하고 조종되고 있다. 점점 전체주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신앙을 잃으면 도덕이 무너진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진리와 사실에 상관하지 않는다. 도덕을 올바르게 재건하고 인류를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은 진실한 크리스천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할 일이 많다.
미국의 경우, 60년대 성혁명은 기독교 우파에 의한 강력한 반동을 불러왔다. 크리스천들은 새로운 사회적 기구들을 창설하고, 정치적 대변자를 뽑고, 법을 제정하고, 진보적 성적 프로그램에 대한 재정적 후원을 못하게 막고 있다. “문화전쟁”(the culture wars)이다. 최근 외신을 보면 미국의 상당 주들이 LGBT를 학교에서 못 가르치게 법제화하고 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혼자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경 말씀과 설교로부터 받는 명령, 즉 기도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무엇을 회개하는가?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볼 때, 르네상스 때, 성문란으로 성병이 기승을 부릴 때, 그리고 성혁명의 선구자 사드후작이 방탕주의를 설파할 때, 교회는 각성했어야 했다.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은 결국 프랑스혁명을 일으켰고, 하나님 대신 “계몽”과 “이성”을 신봉하고 자기 결정권을 스스로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한 “진단”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혁명의 결과로 인류의 건강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천 의과학자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교회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을 이 사명으로 부르고,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이 부름에 응해야 한다.
교회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 생각에 그 대안은 성혁명과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옛 교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이미 자명한 교훈이 주어져 있다. 즉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여,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부부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다. 이처럼 성-사랑-가정이 축이 되는 성윤리는 생명윤리이고 의학윤리이자 기독교 윤리이다. 인간의 해방은 정치적 해방이나 성 해방에 있지 않다. 진정한 해방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에 있다. 이러한 자유는 진정한 성적 기쁨을 누리게 해준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본받아 여성과 모든 소수자의 인격을 존중한다. 그러나 LGBTQ 행동이나 급진 페미니즘의 행동은 중단하기를 요청한다. 두 가지 모두 궁극적으로 생명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LGBTQ를 중단하도록 돕는 것이 그들을 위한 진정한 인권존중이라고 본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케어하고,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고, 원하면 전문적 치유과정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대해서는 법적 강제가 아니라, 교양과 공감을 통해 해결을 도모한다.
다음은 교육이다. 이는 문학, 예술, 방송, 연예, SNS 등 모든 가능한 경로를 사용하여 의과학적 사실(팩트)를 알리는 것이다. 교회는 미래 교회와 사회를 짊어질 소아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교회에서 성경적 성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선교의 새로운 경지이다. 한국교회는 국내 차세대를 위한 선교에 투자해야 한다.
교회 부설 상담소는 전문적 성상담을 할 수 있는 실제적 역량을 제공해 줄 것이다. 신학교 커리큘럼에 생명과학 내지 인간 성학(human sexology) 그리고 성상담 과목개설과 기독교계 상담대학원에 성상담 전공 과정을 개설이 꼭 필요하다.
끝으로 필자는 크리스천들이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연계 활동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전략을 연구하기 위해 본부(headquarter), 즉 연구소를 설립하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연구, 지도자 양성, 도서관, 출판, 학술행사, 대중교육, 치유사역, 시민단체 연계 등이 서로 연결되고 통합된다. 기대하기로는 여기서 “기독교와 성윤리 문화” 같은 과목으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해도 좋을 것이다.
결론으로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의학적 증거들은 성혁명은 인간을 궁극적으로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제 본 칼럼의 연재를 끝맺고자 한다. 그동안 많은 공부를 해야 했었고, 그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부족하지만 이를 나눌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