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다가도 ‘아니다’ 하면 서로 갈라선다. 심지어 양부모가 입양한 양자(養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파양을 하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자기의 친자식임에도, ‘내가 저런 놈을 내 자식이라고 낳았나?’라며 그 자식을 호적에서 파는 경우까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엔 이런 인간의 후회 같은 것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못박았다. 하나님이 일단 은사(恩賜)로 누구를 택하시고, 구원에로 부르신 이상 그가 잘못한다고 그것을 무르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이를 확증해 보이셨다. 하나님은 ‘그가 나기 전 곧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할 줄 알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을 구원택정 하셨다(롬 9:11).
야곱이 ‘선이나 악을 행할 줄 알기 전 선택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선택의 기준에 선·악(善惡)을 넣지 않았다는 말이다(이는 야곱뿐 아니라 모든 택자에게 공히 적용된다). 하나님은 ‘야곱의 죄성’과, 그의 죄성이 하나님을 모독할 것을 아셨음에도 그것을 고려 대상으로 삼질 않으셨다.
실제로 그는 ‘야곱’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창 27:36) 아버지와 형(창 27:19-24)과 외삼촌을 속이는(창 30:31-40) 거짓과 탐욕의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도 그를 내치지도 않으셨다. 그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롬 9:13)’자신의 ‘선택의 일관성’을 끝까지 유지하셨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모두 타락했으며, 인류 안에 흐르는 이 ‘아담의 원죄’가 ‘모든 인류의 죄의 질적 차이를 없이 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야곱의 탐욕’이 유별났음에도 그것이 그의 죄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으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데 걸림돌이 되게 하지 않았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자신을 배반하고 달아난 제자들을(막 14:50-52)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0)”.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한 후, ‘후회한다’고 표현한 내용들이 있다. 이를 읽는 사람들 중 ‘하나님도 실수할 수 있구나’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 ”,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 15:35)”.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후회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인화(characterization, 擬人化) 하여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을 드러낸 것이다.
◈영원한 지혜에 근거한 선택
‘하나님의 선택(predestination to salvation)’에 후회가 없음은 그것이 ‘그의 영원한 지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넓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택자의 전 생애를 통관(洞貫)하며, ‘세심함’으로는 ‘그들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마 10:30).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위태한 길로 나아갈 때는 그의 지혜가 그들의 의지와 행동을 통제하며, 그의 뜻대로 그들을 이끄신다. 이때 사용하는 방법이 징계(히 12:5-11)와 연단(롬 5:3-4)이다. 따라서 그들은 근본 ‘구원의 여정(the itinerary of salvation)’에서 이탈할 수 없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역시 후회가 있을 수 없다.
더 근원적으로 추적한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디엔에이(DNA)’, ‘성향(disposition, 性向)’, ‘기질(temperament, 氣質)’ 등을 다 결정하여 그들을 세상에 내셨기에 그들에겐 그를 놀래킬 ‘뜻밖의 돌발 변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인간은 누구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가 쉽게 그 선택을 후회하고 서로 결별을 선언한다. 이는 누가 자기에게 맞는지 모른 채 서로를 선택했을 뿐더러, 둘 사이 간격이 생겼을 때 그것을 좁힐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에 근거한 선택
하나님이 택자를 선택하는 동기는 ‘사랑’이다. 성경은 이 ‘사랑’을 ‘미리 아심(foreknowledge)’이라 표현했고(성경에서 ‘안다(יָדַע, 야다)’는 ‘사랑 한다’는 뜻이다), 그 ‘미리 아심’(foreknowledge)에 의거해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 예정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predestined, 8:29)’”.
따라서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말은 ‘미리 사랑하시고 예정하셨다’는 뜻이다.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가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전 13:5)”고 했듯,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유익’이 아닌 ‘우리의 유익’을 지향한다.
곧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자기에게 돌아올 어떤 유익이 있기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합리주의나 효율성’에 기반 하지 않는 ‘자기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시쳇말로 ‘말도 안 되는(?) 사랑’이다.
이러한 ‘택자의 유익을 추구하는 그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희생’으로 나타났고, 어떤 경우에도 변개치 아니하시는 불변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 ‘불변의 하나님 사랑’은 설사 그들에게서 실망할 일이 생겨나도 그것 때문에 그들을 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그 선택을 철회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의 택자 선택의 기반’이 ‘자신의 유익’이었다면, 하나님이 패역한 그들을 끝까지 구원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창녀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끝없는 사랑’은 ‘패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호 11:1-9)’을 예표한다.
고멜의 불륜행각이 그녀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을 거둬들일 수 없게 했듯, 하나님은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2, 6, 7)”.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