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형제와 화해 후 예배” 말씀 읽고 변화돼
제암리에 기독교인 1명뿐이란 사실에 깊은 죄책
반대하던 유족들도 제암리교회 재건 후 감사 표해
16일 별세한 오야마 레이지 목사는 ‘일본해외선교회’를 만들어 오랫동안 한일 간 화해를 비롯, 아시아 각지에서 일본의 과오에 대한 사죄·화해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는 특히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해,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교회 재건에 앞장서기도 했다.
1956년 초 여름의 어느 아침, 오야마 목사는 묵상 중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다가 형제로부터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도록 하라”(마 5:23~24)는 말씀을 읽고 변화됐다. 그는 생전에 한국교회를 방문해 “일본의 악행에 대해 나 자신부터라도 사죄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겨,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해외선교회를 결성하고 사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오야마 목사는,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아 비자 취득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63년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 이태영 학장의 초청으로 그 해 12월 한국인에게 사죄하는 것을 목적으로 입국했다.
오야마 목사는 먼저 제암리교회를 여러 차례 찾아가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허물어질 듯 초라한 교회에서 눈물의 기도를 드리며 ‘일본인의 손으로 재건하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 사건 이후 마을에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에게 깊은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제암리교회 재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야마 목사는 유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교회당과 기념관 건축이 완성되고 오야마 목사가 유족들을 다시 만나자, 그들도 기뻐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처음 제암리에 방문했을 때 고래고래 욕하며 소리를 질렀던 유족 할머니는 일본어로 ‘목사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제 손을 붙잡았다”고 당시의 감격스웠던 순간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는 성경구절을 읽으며, “당시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 일을 반대했던 유족들의 마음은 영원히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하는 유족들을 설득해가는 과정을 통해 유족들의 마음을 열었을 뿐 아니라, 사죄하고자 하는 마음도 진정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오야마 목사는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막는 여러 가지 사건들(독도 분쟁, 교과서 편향, 위안부, 역사 왜곡 등)이 있는데, 유감스러운 것은 일본 크리스천 중에도 한국에 대한 사죄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한국에 사죄를 하는 것은 자학사관”이라며 “그런 생각이야말로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잊어버리거나 자기변명을 하려 하지만, 피해자는 아픔을 언제까지나 기억한다”며 “가해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의 사죄와 보상인데, 우리 일본인은 피해자의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위해 한국에 요시다 고조 선교사와 히라시마 노조미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덧붙였다. “피해자 중에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함”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오야마 목사는 “하나가 되기 위해선 화해해야 하고, 화해를 위해서는 사죄가 필요한데, 화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며 “아시아, 특별히 일본과 한국 사람들의 화해를 위해 작지만 그 일을 계속해 나가려고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