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성경해석에 세 가지 원리가 있다. ‘역사적·문법적·교리적 해석’이다. 세 번째 ‘교리적 해석’은 대개 ‘유추적 해석(analogical interpretation)’으로 통칭된다. ‘역사적·문법적’ 해석이 성경 해석의 근간(根幹)이지만 ‘유추적 해석’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역사적·문법적’ 해석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성경해석의 화석화(fossilization, 化石化)’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을 비롯해 개혁주의 변증학자들은 이 ‘유추적 해석’을 중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대인들이 ‘유일신 하나님(the one and only God)’을 ‘단일신 야훼(monarchianism Yahweh)로 왜곡시켜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를 ‘나사렛 이단(the sect of the Nazarenes, 행 24:5)’으로 정죄해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그들이 ‘역사적·문법적 해석’에 매몰돼, 성경해석을 화석화한(유추적 해석에 실패한)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맹점(盲點)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성전신앙(聖殿信仰)’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성전)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요 2:21)’이심을 유추해 내지 못했다.
또 매일 양(羊)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것(양)의 실체’가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이신 ‘성자 그리스도(요 1:29)’이심을 유추하지 못했고, 율법을 엄수하면서도 ‘그것(율법)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요 1:45, 눅 24:44, 행 28:23)’이심을 유추하지 못했다.
‘삼위일체 신앙’은 신구약에 계시된 ‘유일신(the one and only God, 唯一神) 하나님’을 ‘유추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만일 ‘유추적 해석’을 부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언급되기 전의 구약 성도들은 그를 말하지도 믿지도 말았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삼위일체 신앙’도 부정돼야 한다.
그러나 주지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 전 구약 시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등 수많은 구약 성도들은 이미 ‘삼위일체 그리스도’신앙을 견지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예수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6-58)”.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그(다윗)’은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0-32).”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 9:6).”
또 만일 ‘유추적 해석’을 부정한다면 성경에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비유와 상징’ 특히,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마 13:34-35)’고 했을 만큼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이 ‘비유’였는데, 그것들을 해석할 방도가 없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4-35).”
다음 두 가지 내용 역시 ‘유추적 해석’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먼저, ‘다윗 장막의 재건자 그리스도’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역사적·문법적인 해석’에만 치중시켜 그리스도를 ‘시오니즘(Zionism, 유대인의 세계정복 프로젝트)을 구현할 ‘정치적인 메시아’로 왜곡시켰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 9:11).” 그러나 이 ‘다윗 왕국의 재건’은 장차 ‘다윗으로 예표 된 그리스도’가 그의 피로 세울 ‘교회’를 예표했다.
‘주일 성수(Lord's day)’냐 ‘제 칠일 안식일 준수냐(Seventh Day Adventist)’의 논쟁 역시 같은 맥락이다. 유대교(Judaism)와 안식교가(Seventh Day Adventist) 후자(제 칠일 안식일)’를 고수하는 것은 ‘문법적·역사적’ 해석에 매몰 돼 ‘창조 안식일’에서 ‘구속의 완성일인 주일’을 유추해 내지 못한 결과이다.
오늘 ‘보수 정통’이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도 ‘성경 중심’이라는 미명 하에 전자(역사적·문법적인 해석)에만 지나치게 경도되어 후자(유추적 해석)를 백안시(白眼視)하므로 신앙의 화석화에 빠지는 일들이 많다.
그들은 중세 로마 교회의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부작용’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으로 인해 건전한 ‘유추적 해석’까지 터부시한다. 비유컨대, 그들은 ‘목욕물을 버리다 아기까지 버리는’ 우(愚)를 범한다. 실제로 그들의 설교나 기도에 나타난 하나님은 ‘삼위일체’보다 예수님 당시 만연했던 ‘단일신 야훼’처럼 느껴진다.
결론이다. 개혁신학의 성경 해석 전통은 ‘계시의존(revelation-oriented)’과 함께 ‘유추(analogy)’를 그 중요 원리로 삼아 왔고, 둘 중 어느 하나도 간과하지 않았다. 일견 ‘계시의존적’이라는 말과 ‘유추적’이라는 말이 ‘상호 대립적’으로 보이나, 사실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유추적 사고(analogical thinking)’가 자칫 경직되기 쉬운 ‘계시의존 사고(revelation-oriented thinking)’에 숨통을 열어주어 성경 해석에 열린 마음을 갖게 했다. 동시에 ‘계시의존적 사고’는 ‘유추적 사고’로 하여금 ‘무한정의 사색의 나래’를 펴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다.
곧 ‘계시의존 사고’는 ‘유추론적 사고의 무제한적 확장’에 제어 역할을, ‘유추론적 사고’는 ‘계시의존적 사고의 화석화’에 제어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개혁신학에서 ‘유추적 사고(analogical thinking)’를 ‘계시의존적 유추사고(revelation-oriented analogical thinking)’ 혹은 ‘반영적 유추사고(reflective analogy thinking)’라 명명함은 적절하다.
우리는 ‘유추’를 남용하여 ‘중세풍의 풍유적 해석’을 남발해서도 안 되겠지만, ‘풍유적 해석’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백안시해선 안 된다.
동시에 오늘날 유행하는 ‘자의적인(arbitrary, 恣意的) 묵상’에 근거한 ‘말씀 나눔(Sharing the Word)’ 같은 것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촉구한다. 자칫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계시의존(revelation-oriented)’ 없이 ‘자의적인 사색(arbitrary thinking)’ 일변도로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둘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절대적으로 요구받는 이들이 있다. 매일 대중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이다. 오늘 우리 주위엔 소위 ‘말씀 중심’운운하며 ‘역사적·문법적’ 해석에만 경도돼, ‘유추적 해석’은 백안시하는 ‘죽은 정통주의자들'과 ‘계시 의존’ 없이 ‘자의적인 내가 복음’을 남발하는 ‘날나리들(delinquents)’이 널려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감언이설에 많은 영혼들이 휘둘린다. 그 어느 때보다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신학적 각성이 촉구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