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설교]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장소: 김천 상남교회
일시: 2023. 6. 11
본문: 행 2:42-47, 13:1-3, 빌 1:1-11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들 중 교회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복되고 더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예수님의 몸과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귀가 항상 향하고 게시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복되고 더 아름다운 존재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저는 1살 때부터 9살때까지는 북한의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 하셨는데 일본 통치 때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가는 감옥생활을 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감옥 담장에 가까이 가서 노래를 부르면서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 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라는 노래였습니다.
제가 10살 11살 때에는 북한의 평양에서 살았는데 해방 후에는 아버지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가서 목회를 하셨는데 공산당 정부와 협력하지 않는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자주 감옥에 잡혀가는 가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기 위해서는 감옥에도 잡혀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주일에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10살 11살 때에는 평양에 있는 제 오 인민학교에 다녔는데 2년 동안 주일 날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평양 서문밖교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2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당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정성껏 예배 드리기 위해서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아버지를 찾아가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저를 한참 보라보시다가 “그러면 가” 라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저 없이는 못산다고 말씀하신던 어머니에게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어머니는 울면서 “그러면 가” 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저는 11살 때인 1948년 8월 고향과 부모를 떠나 캄캄한 밤에 38선을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 5,6명은 38선을 넘다가 모두 인민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손 들고 서지 않으면 모두 총을 쏘아 죽이겠다고 명령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만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40여분 동안 달렸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강은 건너서 서 월남을 했습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이모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너무너무 좋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2년 동안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결국 저는 남한에 와서 고향과 부모를 떠난 고아와 나그네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외롭게 한 평생을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을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서울중학교, 사울고등학교 서울 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음껏 하게 하셨고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2년 동안 동부 중부 서부의 좋은 신학교들에서 신학 공부를 마음껏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미국으로 갈 때 비행기 탈 돈이 없어서 미국 군함을 타고 2주 반 동안 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머니에는 단돈 100불을 가지고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조금도 없는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귀국 후에는 후암교회에서 교육 목사로 5년 동안, 영안교회에서 8개월 동안 담임 목사로 그리고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28년동안 부족함이 조금도 없는 넉넉헌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총신과 아신과 합신에서 교수 사역을 아주 넉넉하게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제가 귀국 후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과 선교 사역을 마음껏 하게 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저는 제가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하던 강변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저는 강변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기를 소원하면서 사랑했습니다.
부족한 제가 교회를 순수하게 사랑하니까 강변교회의 성도들도 교회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원과 같은 교회들도 있고 회사와 같은 교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순수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기도”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기도” 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 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마 21:13).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부탁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 일백 이십 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서 열흘 동안 전력을 다해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고 기록했습니다(행 1:13-15).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로 시작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기도”에 전력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행 4:24,29).
교회가 성장한 후에도 사도들이 새로운 행사나 멋진 프로그램에 치중하지 않고 무식할 정도로 기도에 전무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얼마나 소박하고 무식하고 순진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도 “기도”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성장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고 “기도”가 부족한 신자는 참된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로 시작했고 “새벽기도”로 성장해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특히 “새벽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새벽기도” 보다는 행사와 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님이 교회가 무슨 학원처럼 프로그램에 치중하느냐고 책망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등한시하는 교회는 교회의 기본을 상실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기도”를 힘쓰는 교회이고 특히 “새벽기도”를 힘쓰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회개”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리”(마 4:17). 성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에 부탁하신 메시지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다섯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라는 말씀을 다섯 번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그러므로 회개하라”(계 2:16).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계 2:22). “그러므로 회개하라”(계 3:3).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20).
예루살렘 교회는 “회개” 하므로 시작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회개하라" 라고 외쳤을 때 3천 여명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41).
베드로는 계속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2,19). 예루살렘교회는 이렇게 “회개”로 시작해서 “회개”로 이어갔습니다.
“회개”가 부족한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고 “회개”가 부족한 신자는 참된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회개”로 시작했고 “회개”로 성장해 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은 모두 “회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회개” 보다는 행사와 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무릎 꿇고 울면서 기도했는데 지금은 각종 음악과 프로그램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들어요.”
셋째로,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막 1:1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말씀” 전파로 시작해서 사도들의 “말씀” 가르침으로 발전한 “말씀”이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14,36).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 선포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말씀”이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도 빌립보 교회도 “말씀” 전파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들이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말씀”을 듣고 “말씀”을 순종하고 “말씀”을 전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인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독을 했고 요한계시록을 모두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에만 전력했습니다. 세상 유행에는 좀 무식한 목회자요 무식한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유명한 사람들의 유창한 말이 너무 많이 들리고 인기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멋진 프로그램과 행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고 사회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다운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데 전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넷째로,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 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도덕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셔서 친밀하게 교제하셨고, 세리장 삭개오를 찾아가셔서 친밀하게 교제하셨고,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 다음 친밀하게 교제하셨고, 저주 받아 마땅한 핍박자요 포행자요 살인자인 사울을 부드럽게 부르신 다음 친밀하게 교제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저희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인들은 물론 메소보다미아 가바도기아 애굽 구레네 로마 아라비아 등 십 사오 개 지역에서 온 다 문화 다 인종들 수 천 명이 함께 모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1,42).
안디옥 교회의 특징도 여러 종류의 다 문화 다 인종이 함께 모여 “교제”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행 13:1,2). 빌립보 교회야말로 사랑의 “교제”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강변에서 루디아를 만나 친밀한 “교제”를 나눈 데서 시작했습니다.
루디아는 마음을 열어 사도 바울의 말에 청종했고 지갑과 물질과 집과 시간을 열어서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참예” 했습니다(행 16:15).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루디아의 본을 따라서 모두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 교회 신자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도 바울의 목회 사역과 선교 사역에 “참예”한 친밀한 “교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4). 빌립보서에 “교제” 라는 말과 “참예” 라는 말이 여러 번 17번이나 나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과 은혜 안에서 서로 “교제” 했고 바울의 고난과 선교 사역에 “참예” 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1980년 4월 6일 청담동에 교회를 개척해서 세우면서 교회 이름을 강변교회라고 지은 이유는 강변에 세워졌던 빌립보 교회를 닮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고 강변교회 표어의 첫 부분을 “서로 돌아보고” 라고 한 것은 빌립보교회처럼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성도들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회사이고 학원이고 공연장입니다. 교회는 설교 위주도 아니고 강의 위주도 아니고 행사 위주도 아닙니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 하고 성도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교제”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친밀하게 “교제” 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이 친밀하게 “교제” 하고, 한국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이 친밀하게 “교제”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보시고 너무너무 기뻐하실 것이고, 사회와 백성들도 감동을 받으며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로, “봉사”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과 “봉사”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했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병자들을 친히 “섬기고” “봉사” 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예루살렘 교회는 “섬김”과 “봉사”가 충만한 귀중한 교회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예루살렘 교회는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섬김”과 “봉사”에 제일 힘을 많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구제”와 “섬김”과 “봉사”를 전적으로 하게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전도 프로그램이나 전도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면서 “섬김”과 “봉사”에 전력을 다했더니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전도도 바나바의 “착함”의 행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4). 빌립보 교회야말로 “착함”과 “섬김”과 “봉사”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루디아의 “착함”과 “섬김”과 “봉사”로 시작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고난에 “참예” 하고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참예”한 것을 가리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섬김”과 “봉사”의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교제”와 “참예”가 실제적이 될 때 “섬김”과 “봉사”로 나타납니다. “참예”는 곧 “섬김”과 “봉사”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착함”과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가 충만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착함”과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가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아름다운 교회도 아니고 행복한 교회도 아닙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세우면서 표어를 정했는데 둘째 부분이 “기쁨으로 섬기면서” 였습니다. “섬김”과 “봉사”를 강조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힘있게 이루어졌습니다. 제주도 복음화의 주역이었던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기도”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에 최선을 다하므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중요한 비결도 “기도”와 함께 나환자들과 원수들에게 쏟은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의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은 것도 한경직 목사님께서 설교와 전도와 함께 무엇보다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다운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펴는데 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일도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고 불쌍한 연변 조선족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도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여섯째로,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기뻐하셨고 그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눅 10:2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41).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는 돌로 침을 받아 순교의 죽음을 죽으면서도 원망 불평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뒤를 이어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도 불에 타서 순교하면서도 기뻐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영국 웨일스의 토마스 선교사도 한국의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순교의 죽음을 당하면서도 두려움이나 원망이나 불평은 조금도 지니지 않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야말로 “교제”와 “봉사”가 충만했고 그 결과 “기쁨"이 충만했다고 생각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봉사”가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의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 이라는 말이 17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 1:3-5).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빌 4:10). 빌립보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쁨”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참 근원을 찾아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했고 성도들과의 사랑의 교제 안에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쁨”은 사도 바울의 가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가슴 가슴에도 전염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하며 찬송을 불렀는데 그때 그 기쁨은 간수에게 전염되었고 루디아에게 전염되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전염되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기쁨”과 섬김의 "기쁨"이 충만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고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기쁨”이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도 아니고 행복한 교회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사실 “기쁨”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쁨”을 지니지 못한 교회는 불행한 교회입니다. 회사와 같은 교회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을 지니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과 후원과 격려의 손길로 한 평생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염려 두려움을 지니는 대신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을 몸에 지니고 “행복하게”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균형 잡힌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첫째로, “기도”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한 균형 잡힌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회개”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한 균형 잡힌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건강한 균형 잡힌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한 균형 잡힌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봉사”가 충만한 교회가 건강한 균형 잡힌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건강한 균형 잡힌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여섯 가지를 줄여서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말합니다 김천 상남 교회가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