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설교] 한국교회 첫 목사
장소: 서대문 대흥교회
일시: 2023년 6월 25일
본문: 사도행전 9:1-9
제가 2023년 2월 12일 주일 서대문 대흥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23년 6월 25일 주일 여기 두번째로 와서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을 기리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제물로 생긴 조선 최초의 신앙의 아버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의 아버지와 선배들이 되시는 귀중하신 분들은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이셨고, 평양에서는 이인복 선생님과 명선성 선생님과 최병목 선생님이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이셨고, 대구에서는 이성봉이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이셨고, 서울에서는 김치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과 방지일 목사님들이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이셨습니다.
저는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선배님들을 아주 존경하고 흠모하는데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2003년도에 “성경에 나타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21번 설교를 했고 “교회사에 나타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이라는 주제로 11 번 설교를 했습니다.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중의 한 분이 바로 “한국교회의 신앙의 아버지가 되신 분이 길선주 목사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셨고, 가이사랴의 고넬료를 찾아오셔서 무음 문을 드드리셨고, 빌립보의 루디아를 찾아오셔서 저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밀란의 어거스틴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셨고, 평양의 길선주 도사를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성자 예수님을 영접할 때 저들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사마리아의 운명과 가이사랴의 운명과 빌립보와 마게도냐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어거스틴으로 인해서 고대 세계의 운명이 바뀌어졌고 길선주로 인해서 한국 민족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어두움에서 살던 민족이 빛과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1907년 부흥운동의 주역이셨습니다. 그는 이기풍 목사님과 함께 한국 최초의 7분 목사님들의 한 분이셨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지만 29세 때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 40여 년 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380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8백여 명을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로 세웠고, 60여 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길선주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던 길선주
첫째로, 길선주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습니다.
그는 1869년 3월 15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이기풍보다 4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안주는 저와 저의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길선주는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열한 살 때, 여섯 살 되는 신부와 결혼을 했습니다. 여동생 같은 아내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는데 부엌에 가서 누룽지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놀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밖에 나가서 연을 날리며 놀다가 거름 속에 빠졌는데 집에 와서 아내를 부르니까 아내가 어린 서방을 데리고 우물가에 가서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제 그만 씻으라고 응석 부리는 아들의 소리와 아들을 나무라는 며느리의 소리가 나자 어머니가 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변호하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서방님이 연을 날리다가 뛰는 소에 마주쳐 쇠똥에 넘어져 쇠똥이 묻어서 지금 막 몸을 씻기고 옷을 가라 입히고 있습니다.”
더러운 냄새를 맡은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길선주가 몸과 마음이 약한 마마보이는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체구와 건장한 기력을 가진 굳건한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호랑이” 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장사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소년 시절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살 때부터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창일이라는 도사를 만나서 그가 써준 “산신 차력”이란 주문을 밤낮으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대성산 절에 가서 1주일 동안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자 영이 내려 온 몸이 떨리고 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창일 도사를 만나 신차력의 묘리를 터득한 길선주는 수도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서 평양에 있는 장득한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장득한은 선도를 수련한 도사로 길선주에게 옥경의 구령 삼정 주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길선주는 21살부터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밤낮으로 옥경의 구령 삼정 주문을 외웠습니다. 때로는 21일 때로는 49일 때로는 100일씩 기도하며 주문을 외웠습니다. 결국 길선주는 선도의 영험과 신통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는 아내에게도 이 도를 가르쳐 강령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길선주는 선도에서 큰 힘을 얻어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방망이를 손으로 분질렀으며, 웬만한 개천은 단 숨에 건너 뛰었습니다. 차력에 성공하고 선도에 통달한 길선주의 이름이 널이 알려지자 평양 시내에 그가 나타나면 그를 가리켜 “길도사” 라고 부르며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계속해서 수도에 힘을 다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길선주를 성 어거스틴과 비교해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도 젊은 시절에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19세 때 호르텐시우스라는 철학 책을 읽으면서 세상이 모두 무가치하게 보였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는 세속적인 일들을 떠나 당신에게 날아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책이 그와 같은 사랑으로 나를 불붙게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다음 마니교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신풀라토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풀라토주의에서 나름대로 영원을 체험하기도 했고 나름대로의 기쁨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계속해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길선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도의 도는 터득했지만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해서 계속 수도에 힘을 다했습니다.
2. 예수님을 만난 길선주
둘째로,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890년부터 평양 시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이 파란 양귀자, 즉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서양 교를 전하는데 한번 거기에 빠지면 혼이 뽑혀서 미치고 만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는 1890년 1월 제물포를 거쳐 경성에 도착했고 그 해 8월 잠시 평양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고 경성으로 갔다가 1893년부터 평양에 와서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길선주는 평양 널다리 골에 살고 있었는데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새 교를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하여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와 담론은 나누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길선주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쏭달쏭하여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마음이 열렸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암브로스를 만나 복음을 들으므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던 것처럼, 길선주는 마펫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들으므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습니다.
길선주는 진리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 친구 두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문흥준씨와 김종섭씨 두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김종섭은 길선주에게서 선도를 배운 그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돌아온 김종섭이 길선주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서양 도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라고 보냈는데 그렇게 경솔하게 선도를 버리고 서양 교를 믿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질책을 했습니다.
그러나 길선주는 그의 배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종섭은 그 후부터 거의 날마다 길선주에게 와서 전도 책자를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길선주는 “이선생 자서전” 이란 전도 책자도 받아서 읽었고 “장원양 우상론” 이란 전도 책자도 받아서 읽었지만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로 역정”을 받아서 읽었는데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도와 서양 도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번민이 더해갔고 소화불량까지 생겼습니다. 이 사실을 안 김종섭은 길선주에게 하나님께 기도해보라고 했습니다.
길선주는 결국 마음에 번민을 가지고 깊은 밤 이른 새벽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깊은 번민에 빠졌던 것과 같았습니다. 어거스틴에게도 두 친구 네브리디우스와 알리피우스가 있었는데 알리피우스는 어거스틴의 개종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내 가슴 속을 찢어대는 고뇌에 밀려 정원까지 피해 나오고 말았습니다. 알리피우스를 떠나서 정원까지 피해 나왔습니다. 나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주먹으로 이마를 쳤습니다.”
길선주도 고민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지금 심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봉하던 선도는 정말 섬길만한 도인지 의심스럽고, 예수교에는 과연 영생의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이 마음을 가라앉아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수삼일간 계속했습니다.
밤이 깊어 새벽 한 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정말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탕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는 순간 하늘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라고 부르시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길선주를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는 너무도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을 때 그의 몸은 불덩어리가 된 듯이 뜨거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길선주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아침에 그를 찾아온 김종섭이 이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뻤습니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성경책을 끼고 널 다리 교회로 달려가서 예배에 참석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길선주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공 기도를 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 너무나 유창하고 간절하고 은혜롭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3.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된 길선주
셋째로, 길선주는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탄생의 기록을 읽을 때는 환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7년 8월 15일 길선주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상점 일을 돕고 있던 이정식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전도를 해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전도를 해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온 가족이 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게 되어서 길선주는 너무 기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가르침으로 선도에 입문했던 의제 김찬성에게도 전도하여 그로 하여금 흐느껴 울며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었고 그의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는데 두 아들 중 한 사람은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함께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함께 순교한 김화식 목사였습니다.
길선주는 1898년 30세 때 평양 널다리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널다리 교회는 그 이듬해인 1899년에 장대현으로 옮겼고 1900년에는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1901년에는 33세 때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는 조사(전도사)가 되어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설교와 기도와 성령충만한 그의 목회 사역은 장대현교회의 급속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조사가 되어 그가 받은 봉급은 매월 6원이었는데 그가 약국을 할 때 받은 봉급 80원에 비하면 너무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사가 된 후부터 그는 돈과 부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현 평생 청빈의 생활을 했습니다.
사모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탄압이 있었으나 길선주 조사는 더욱 더 기도에 파묻혔습니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는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암송했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드디어 1906년부터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이 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2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신학지남) 14권 제 2호).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설교는 흐르는 시냇물 같이 회중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회중들은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회중은 은혜의 도가니에 묻혀 교회당을 떠나지 않았다. 죄인 잡으러 왔던 순표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려 왔던 중이 개종하고, 신부가 은혜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 장로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다.”(최현, 「빛을 남긴 믿음의 위인) p. 182).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가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1백원은 수고비로 조로 인정하여 자기가 소유하였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김광수, 「한국기독교인물사」 pp. 140,141).
“상원인 모씨는 살인강도한 죄를 토설하여 투옥되었다가 선교사의 알선으로 방면된 후 좋은 신자가 되었다. 순검(경찰) 방은덕은 죄를 고백하는 남녀중 형사의 저촉되는 자를 검거할 목적으로 예배당에 들어섰다가 길선생이 네 선 땅이 어디냐? 지옥불이 타오르는 곳이다라고 외치자 방순경은 소리를 지르고 통회하며 패검을 떼어던지고 교인이 되어 고향 맹산으로 돌아가 맹산교회를 설립했다.” (「신학지남」 14권 제 2호).
“기도가 계속되자 무겁고 슬픔 마음이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였고 이어 모든 청중들이 울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며 고뇌에 찬 모습으로 마루바닥을 두 주먹으로 두들겼다. 우리 집 요리사도 죄를 고백하고는 회중 가운데 주저앉아 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말씀해 주세요. 저 같은 사람도 소망이 있나요? 저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그러고는 마루바닥에 뒹굴면서 흐느껴 울었다. 고뇌에 찬 비명이었다.
죄를 고백한 후에 이따금씩 모든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기도를 했는데 수백명의 청중이 함께 모여 드린 이 통성기도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 장로라는 분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나를 용서해 줄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수 있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시작했는데 아바지 아바지 외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교회당 지붕이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김장로 곁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면서 이 전에 걸코 한번도 기도해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도했다” (윌리엄 블레어, 「한국의 오순절」).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1908년 3월 1일에는 한국교회 역사상 목사로는 처음으로 세례식을 거행했습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님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루었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 35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다 쏟아 바치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의 철저한 헌신과 수고의 삶이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철저한 헌신과 수고의 삶으로 우리 민족은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소망과 생명의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회개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 삶인지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었고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삶인지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천국 소망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 삶인지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들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드리면 우리들의 운명이 바꾸어지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바꾸어 집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신 길선주 목사님께 깊은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리며 우리들도 그 분의 발걸음을 조금씩 따라가면서 빛을 비추며 살게 하시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다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길선주 목사님을 통해서 베푸신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부족한 우리들에게도 조금식 조금씩 조금씩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이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