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율법적 행위’
‘율법의 의(義)’와 ‘믿음의 의(義)’는 근본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둘의 도달점은 같다. ‘율법의 의’를 통해 ‘율법의 완성’에 도달하고, ‘믿음의 의’ 역시 그것을 통해 ‘율법의 완성’에 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믿음의 의)’가 나타났다(롬 3:21)”는 말씀 같은 것을 접할 때, 둘을 대치 개념으로 수납해선 안 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그것은 “‘율법’과 ‘그것의 정반대로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 아니다. 둘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義)’를 지향한다. 전자는 ‘행위적 의(무죄한 아담에게 해당)’를 통해, 후자는 ‘믿음의 의(범죄한 죄인에게 해당)’을 통해서이다.
‘믿음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았다(롬 3:21)’는 말씀 역시 둘(‘믿음의 의’와 ‘율법’)의 일치를 말한 것이다. 또 성경이 ‘믿음의 의’를 강조하는 것 역시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닌,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어떤 사람들이 ‘율법’과 ‘믿음의 의’를 서로 상치(相馳)시켜 ‘믿음의 강조’를 ‘율법의 폐지’와 동일시하는 것은 ‘율법(the law)’과 ‘율법적 행위(the deeds of the law)’를 혼용한 결과이다. 성경은 ‘율법’과 ‘율법적 행위’를 분명히 구분짓는다.
사람에게 정죄를 갖다주는 것은 그의 ‘율법적 행위(the deeds of the law)’이지 ‘율법’ 자체가 아니다.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다(롬 7:12)’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롬 7:12-13)”.
이런 이유로 우리는 ‘율법과 믿음은 배치되지 않는다’하고, ‘율법적 행위(the deeds of the law)는 거부하지만 율법 자체를 거부하진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행의(行義)’는 부정하지만, ‘이신칭의 받은 자’의 ‘의행(義行)’은 장려한다. 전자(행위)는 심판을 불러오고 후자(의행)은 상급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 와 ‘은혜 아래’ 있는 자
‘율법 아래(under the law) 있는 자’란 ‘율법적 행위(의행, 義行)’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자’를 말한다. 여기엔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극단적인 율법주의자(hyper- legalist)’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면서 단서를 붙이는 ‘온건한 율법주의자(mild- legalist, ‘구원의 열매’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신율주의(neonomianism))’까질 다 아우른다.
이렇게 ‘율법적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의(義)’에 도달하지 못해 정죄를 불러올뿐더러,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을 모독’하는 극악한 범죄자가[죄인이] 되어 저주에 떨어진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 10:29)”.
반대로 ‘은혜 아래(under the grace)있는 자’이다. 이들은 사도 바울처럼 ‘율법주의의 해악’을 알고 그것을 피해(빌 3:6-7) ‘은혜 아래로 들어가는 자’를 비롯해, ‘율법’도 모르고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마음’도 없이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복음을 믿는 이방인까질 다 포괄한다.
성경은 특별히 ‘이방인의 은혜의 탁월성’을 끄집어내 ‘율법을 좇으면서도 의에 이르지 못한 유대인’들의 불행과 비교하며, 그들의 복됨을 칭송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2)”.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한 마디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의의 법(율법)을 좇았던 유대인’은 정죄를, ‘의의 법을 좇지 않고 믿음을 좇은 이방인들’은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죄인이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 있을 수 있는가? 앞서도 잠간 말했듯, ‘믿음’을 붙듦으로서 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믿음의 경륜’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 이처럼 죄인은 ‘믿음’을 붙듦으로 ‘은혜’ 아래 들어간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롬 5:2, 현대인의 번역)”. ‘믿음’과 ‘은혜’를 인과(因果) 관계로 놓았다.
성경은 심지어 둘을 ‘동의어’로 놓기까지 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렇게 ‘은혜’를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존시킨 것은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율법의 행위’로는 ‘은혜’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택자에게 ‘하나님의 후사(heirs of God)가 되는 약속’을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존시킨 이유 역시 ‘죄인의 가변적인 율법의 행위’로선 그것의 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heirs of God)’가 된 것도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불가변적(不可變的)인 은혜의 경륜’ 안에서 됐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