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미션이 6일 헤이리 이랜드 갤러리B관(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55-61)에서 창립 25주년 기념전 <지구 뜰 정원사의 은총일기>를 시작한 가운데, 서성록 안동대 명예교수가 ‘벌어진 심연과 부드러운 마음-아트미션 창립 25주년을 맞아’를 제목으로 전시 서문을 공개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벌어진 심연과 부드러운 마음 - 아트미션 창립 25주년을 맞아 -
생명과 진리의 문화를 확산시키자는 취지로 출발한 크리스천 작가들의 모임 ‘아트미션’이 창립 25주년을 맞았다. 아트미션은 매해 정기전과 특별전을 개최해왔고 정기적으로 크리스천 아트포럼도 개최해왔다. 게다가 매달 예배와 세미나 등 정기모임을 통해 회원들의 정체성을 다지고 비전을 구체화하였다.
오랜 시간 모임과 행사를 해오면서 펼친 프로그램도 유의미하지만 회원들이 함께 한 시간도 중요하다. 정기모임이 끝난 뒤에도 카페로 자리를 이동하여 교제를 나누었고, 회원의 전시가 있을 때마다 축하와 격려로 서로 이끌어주었다. 이렇게 다져진 세월이 이십 년이 넘었다. 출신 학교도, 세대도, 장르도, 작품경향도, 살아온 배경도, 활동 지역도 다른 작가들이 모여 오랜 기간을 만남을 이어온 것은 흔치 않은 예이다. 소속 작가들은 동료 이상의, 그야말로 미션을 나누는 공동체와 같은 끈끈한 그 무엇이 있었고 이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심장을 뛰게 한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간의 주요 전시를 돌아보면, 주요 정기전으로는 ‘원더플 데이’(2005), ‘거룩한 상상’(2007), ‘Foot Print’(2008), ‘영혼의 정원’(2008), ‘조이플’(2010), ‘뉴 호라이즌’(2011), ‘측은지예 - 심’(2014), ‘함께 하는 마음’(2017), ‘보듬어주는 시선’(2019), ‘기억하는 사람들’(2020), ‘다정한 이웃’(2022), ‘긍휼’(2023) 등이 있었다. 개최장소로는 화랑이 주 무대가 되었지만 이외에도 병원, 교도소, 카페, 교회 시설, 지하철 등 실로 다양한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박수근 오마주전’이 강원도 양구에서 개최되었을 때는 회원과 참여자들이 버스 5대에 나누어 박수근 미술관을 다녀오기도 했다.
오늘날 작가들은 변함없이 스튜디오를 오가며 창작생활을 이어가지만 사실 그들은 여러 가치와 진실이 경합하는 문화적 투쟁의 복판에 서 있다. 인공지능, 뉴 미디어, 페미니즘, 로우브라우(Lowblow),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포스트 휴먼, 퀴어 아트, 민족주의, 형식주의 등등. 이름만 들으면 상당히 다채로운 것같지만 그 속을 파고 들어가면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막시즘적인 것이든 그 원천은 ‘세속주의’라는 물줄기에서 파생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아트미션 작가들은 과연 크리스천으로 어떤 목적과 비전으로 작품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 고민하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계는 무너졌고 원래 계획했던 창조질서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이 회복되도록 하셨다. 인간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세상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에 책임을 느끼고 문화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회복과 묶여있으므로 마지막 날까지 세상과 함께 하는 파트너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의 예술에 대한 인식은 여기에 기반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술가들은 세상에서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지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로버트 웨버(Robert E. Weber)는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크게 ‘동일’, ‘분리’, ‘변혁’ 등 세 모델로 설명한다.
첫째 ‘동일모델’(Identificational model)은 다른 말로 ‘적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문화에 동화되어가는 것이다. 기독교문화가 점점 세상문화에 영향을 받고 익숙해지면서 세속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응’이라는 전략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우리의 문화개념 틀에 맞게 해석하고 우리의 사고를 사회적 관습에 따라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스스로 세상에서 살고 그 문화에 노출되다보니 자신의 신분이 누구인지 망각해버리기 쉽다. 이는 자기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는 모델이다.
둘째 ‘분리’(Separational model)는 세상문화에 참여하기보다는 고립되거나 괴리된 상태를 고수하는 모델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거부하고 세상과 등을 지는 모습을 보인다.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분리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경우 크리스천은 특정한 문화 속에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철저하게 그 문화의 외부적 존재로 남게 된다. 기독교 공동체 바깥 세상에 하나님의 임재가 부재하다고 보는 시각은 기독교의 중요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선 기독교문화가 세상에 영향을 전혀 주지 못하고 세상과 무관한 존재로 남게 된다.
셋째 ‘변혁’(Transformational model)은 삶의 구조들은 현재의 복음의 적용을 통해 또는 미래에 궁극적인 역사의 목표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본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델을 말한다. H. 로크마커는 예술의 부패가 심해진 것은 크리스천이 문화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수고를 하지 않을 때 현실의 문화가 오히려 크리스천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축구경기처럼 한쪽이 공격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공격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트미션이 지지하는 모델은 이중에서 세 번째 모델이다. ‘변혁’ 모델은 기존의 미술계를 전복시키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됨과 선함을 가지고 창조성을 회복하는 것, 곧 신실한 신앙을 갖고 세상을 섬기되 기독교세계관 가운데서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것을 일컫는다.
기독교 공동체는 본향의 문화를 버리고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거나 외딴 섬에 살고자 해선 안 되며 대신 세상 가운데 남아서 변화를 이끌어낸다. 외부세계의 완강함을 하나님과 그 분의 뜻에 일치되게끔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와 현실이 부딪히고 긴장을 초래하는 것은 종종 크리스천의 우월감에서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칼뱅은 말한다. “그가(바울) 피조물들이 탄식한다고 했을 때 그는 거기서 피조물들이 우리를 동반자로 붙든다는 점을 시사한다. 만일 피조물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탄식속에 있었다면 금방 끝이 닥쳐올 생애라고 해서 그냥 맥없이 스쳐지나 가려는 우리의 태만과 소극적인 태도가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일인가?” (로마서 주석 8:22)
그동안 아트미션은 성경적 가치관에 맞게 예술을 일치시키는 데에, 그리고 문화영역에서 예술가들의 책임과 소명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일을 실천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런 목표는 너무 막연해서 구호나 관념으로 끝나기 쉽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최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대미문의 감염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는데 아트미션 작가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어떻게 이웃을 섬길 수 있을까 숙고하였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우리가 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일련의 전시도 이런 점을 고려하여 기획되었는데 ‘Art Compassion’(2021), ‘다정한 이웃’(2022), ‘긍휼’(2023) 등의 전시가 그러하다. 큰 규모이든 작은 규모이든 작품을 통해 생명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환대의 공간을 마련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로 기억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화가 마리사 보이텐코(Marissa Voytenko)가 말했듯이 “삶이 견디기에 너무 무겁고 상황이 암담하여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아름다움은 두려움을 완화시키며 희망을 제시한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사실 예술가들이 인류의 재앙에 기여하는 길은 봉사나 기부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것은 친밀감을 주는 작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다독여주고 그들의 슬픔을 헤아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데에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겪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슈퍼마켓이나 꽃집에서 꾸준히 꽃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고통에 빠지거나 슬픔에 젖은 사람들을 위해 꽃을 준비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힘든 시기에도 아름다움이 지속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유대인 학자 아도르노(Theodore Adorno)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Cultural Criticism and Society", 1949)고 말한 취지에 공감할 수 있지만 그의 말대로 비극 앞에 손을 놓고 있었다면 세상의 아픔은 결코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문화는 냉소주의와 허무주의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희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사고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퍼져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쪼그라들게 만든다. 문제는 이것으로 공동체에 따듯한 양식을 제공하거나 애통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의 힘은 눈에 띄지 않게 작동하기 때문에 그간의 노력이 얼마나 실효를 거두었는지 그것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이에 앞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예술이란 동료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을 향한 섬김과 돌봄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흐릿했던 이 정신이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해지고 명료해지고 있다는 판단이며, 이는 아트미션의 참여 작가 대부분이 동감하는 의견이기도 하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여도 선한 것을 추구하고 찾아내고 보존하며 강화하는 일을 통해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성록 안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