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과 병자의 친구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고 하신 것은 그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이’라는 뜻이다. ‘의인(義人)인 그’가 ‘죄인(罪人)의 친구’가 되어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줌’으로서 이다.
이는 ‘진정한 친구’란 낮은 지위의 친구를 그대로 둔 채, 그의 친구 노릇 하는 것으로 만족치 못하고 그를 자기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주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가 ‘다윗(David)’의 친구 ‘요나단(Jonathan)’이다. 왕자 요나단(사울왕의 아들)이 평민 친구 다윗을 사랑하여 그에게 자기가 입었던 ‘왕자의 옷’을 입혀준 것은 다윗을 자신과 동급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던 ‘우정의 발로’에서였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 18:3-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요 15:13)”고 하신 예수님 말씀 역시 ‘죄인 친구 우리’를 자신과 같은 ‘의인’으로 만드시려고 자기 목숨을 희생시켰다는 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듯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을 입으신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은 그가 단지 ‘죄인(罪人) 우리’의 ‘공감 친구(an empathic friend)’가 돼 주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그의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자칭 의인(a self-proclaimed righteous man)’에겐 자기와 격(格)이 맞는 ‘바리새인 같은 의인 친구’만 필요로 하고, ‘죄인의 친구 그리스도’ 같은 이는 불필요하다. 그 결과 그는 ‘짝퉁 의인(a false righteous man)’인 채로 남고, ‘진짜 의인(a true righteous man)’이 될 기회를 영구히 얻지 못한다.
예수님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고 하신 것 역시 ‘자기를 병자(죄인)으로 인정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의사가 되어 그를 건강하게(의인으로) 만들어 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자칭 건강하다(의롭다)고 하는 자에겐 의사인 그리스도가 불필요하니, 그는 계속 ‘병자(죄인)’으로 남는다.
성전에서 스스로를 죄인이라며 고개를 떨 군 채로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던 세리(the tax collector)를 ‘죄인의 친구’ 예수님이 의롭다고 해 주셨다. 그러나 그 세리 곁에서 그(세리)를 죄인이라 정죄했던 ‘자칭 의인’바리새인은 그를 의롭게 만들어 줄 ‘죄인의 친구’가 없어 죄인인 채로 남았다(눅 18:10-14).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믿음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로운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그런 왜곡된 기준을 철폐하고 새로운 기준, 곧 ‘믿음’을 제시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9-11)”.
이 모두를 종합하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결정되며, 여기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율법을 아는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람에게 이 ‘믿음의 기준’이 충족될 때, 심지어 ‘들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마 3:9). 그는 자신을 영접한 ‘길가에 구르는 돌(石) 같은 세리’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이라고 선언해 주셨다.
이러한 ‘믿음의 기준’은 ‘죄인’들에겐 그야말로 ‘복음’이었으며, 죄의식으로 주눅들어 있던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반면에 ‘자칭 의인들’에겐 분노를 유발시켰다. 이는 그들이 소중하게 쌓아 온 ‘율법의 공덕(the works of the law)’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자기들이 공들여 온 ‘율법의 공덕’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바리새인들은 후에 기독교인이 된 뒤에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어 ‘믿기만 해선 안 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2)”. ‘자기 의(義)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 교회 안에 ‘율법 애착자들(law lovers)’이 많은 것은 이런 인간 경향성의 발로이다.
◈회색지대는 없다
사람에겐 그가 ‘은혜 아래’ 있든지 ‘율법 아래’ 있든지, 두 종류의 선택지 밖에 없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가 ‘율법’ 아래 있으면서 동시에 ‘은혜’ 아래 있든지, 혹은 ‘은혜’ 아래 있으면서 ‘율법’ 아래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구약 성경에선 이를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레 19:19)”는 말씀 등으로 일찍이 경고했다.
예수님 역시 여러 비유들로 그것을 경계시켰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막 2:21)”,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이 모든 가르침과 비유들은 ‘율법’과 ‘은혜’를 섞지 말라는 뜻이다. 누가 스스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면서 은혜를 구한다면(혹은 은혜 아래 있고자 하면서 율법의 의를 구한다면), 이는 ‘수레의 끌채는 남쪽으로 향하면서 바퀴자국은 북쪽을 향하다’는 ‘남원북철(南轅北轍)’이고, ‘나무에서 고기를 구한다’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한 마디로 ‘은혜와 율법’은 공존할 수 없으며, 둘의 공존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 있어왔다. 앞서 말한 초대교회의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최소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해야 한다(행 21:25)”고 주장했다.
또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선한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는 ‘신율주의자들(neonomianism)’이 그들이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율법적 의(義)가 구원 얻는데 단 일부라도 기여한다면(그것이 ‘원인적인 것’이든 ‘결과적인 것’이든지 불문하고), 그의 구원은 망쳐진다. 이는 그의 어떤 의(義)도 ‘율법의 가장 작은 요구’에 완전하게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도 야고보와 바울의 말도 그것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3-4)”.
그러나 무엇보다 구원에 ‘인간의 의(義)’가 가미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기에 용납될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