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삯이 사망(死亡)’이고, ‘의(義)의 삯은 영생(永生)’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배후엔 그들이 ‘영생’을 ‘인간 의(義)의 대가’로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그래서 그들은 태초의 무죄했던 아담이 ‘선악과 언약(창 2:17)’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영생을 취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생’은 ‘인간의 율법적 의(義)’로 획득할 수 없다. 아담이 천년만년(千年萬年) 선악과 언약을 지켰더라도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생득적(生得的)으로 향유해 왔던 ‘죽지 않음’을 유지(維持)하는 것일 뿐 그것으로 ‘영생’을 획득할 수는 없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이라고 못박았다. ‘사망’은 ‘죄의 대가’로, ‘영생’은 ‘은사’로만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영생’이 아담의 ‘선악과 언약 준수’로 획득되게 했다면, 그가 그것을 준수하는 동안 이미 ‘영생’을 확보했을 것이며, 그것은 ‘은사로 얻는 영생’이 아니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율법적 의’로 획득된 ‘영생’은 언젠가 율법을 범할 때 ‘의’과 함께 ‘영생’도 상실된다. 이렇게 불확실하고, 가변적으로 경륜(economy, 經綸)되는 ‘영생’은 이미 ‘영생’이 아니다.
‘영생’은 어휘 자체가 지닌 의미 그대로, 어떤 경우에도 잃어질 수 없어야 ‘영생’이다. 그것은 ‘죽지 않음’을 겨우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영속적(永續的)이며 확정적(確定的)으로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이렇게 ‘영생’이 영속적이고 확정적이 되려면, 가변(可變)하는 생득적(生得的)인 ‘인간의 의(義)’와 무관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조건이나 외부적인 요인’, 심지어 ‘그의 죄’에 의해서까지도 영향을 받지 않는, 무조건적이고 값없이 주어지는 ‘은사’여야 한다.
◈죄의 결과는 ‘영생의 상실’이 아닌 ‘죽지 않음의 종식’
태초에 지음을 받은 ‘무죄한 아담’의 상태는 ‘죽지 않음(no death)’의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선악과 언약’을 어김으로 그에게 온 ‘죽음’은 ‘죽지 않음의 종식(the end of no death)’이었다. ‘그의 죄’가 파괴한 것은 ‘죽지 않음’이었다.
곧 그의 ‘무죄함’이 그로 하여금 ‘죽음 없음’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다가, 그의 ‘범죄’가 ‘죽음 없음’을 파괴하고 ‘죽음’을 유입시켰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죄’가 ‘영생’을 파괴했다고 생각한다. 아담이 무죄한 ‘영생의 상태’에 있다가 죄로 ‘영생’을 잃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요 5:24)’는 것을 ‘그를 믿음으로 잃은 영생을 다시 회복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죄’는 ‘죽지 않음’만 파괴하지 ‘영생’은 파괴할 수 없다. ‘영생’은 그 어휘만큼 무거워,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성경도 ‘죄가 사망을 가져왔다’고 했지 ‘영생을 잃게 했다’고 하진 않았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순서적으로, ‘죽음’은 ‘영생’다음이 아닌 ‘죽지 않음’다음에 존치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신 것은 ‘영생의 상실’이 아닌 ‘죽지 않음의 종식’을 의미했다.
아담이 ‘선악과 언약’을 준수하는 동안 ‘(영생이 아닌)죽지 않음’이 유지되다가, 그가 그 언약을 파기하는 순간 그에게 ‘(영생의 종식이 아닌)죽지 않음의 종식’ 곧 ‘죽음’이 왔다.
◈‘선악과 언약의 준수’로 얻지 못하는 ‘영생’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그에게 ‘영생’을 위한 어떤 조건도 내 걸지 않으셨다. 다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만 했다. 여기서 ‘정녕 죽으리라’는 ‘죽지 않음의 종식’을 의미한다.
‘아담이 타락한 후’역시 성경 어디에도 ‘그의 죄로 영생을 상실했다’는 구절은 없고, ‘죄로 인해 죽음이 유입됐다’고만 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영생’은 ‘영원한 때 전부터 이미 약속된 것(딛 1:2)’이지만, 그것은 ‘무죄한 의인’을 위해서가 아닌 ‘범죄한 죄인’을 위함이었다. 실제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의인으로 있었을 때 영생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백년 혹은 천년?) ‘선악과 언약’을 준수하다가 그것을 범했는진 모르나, 그것을 수천만년(數千萬年) 준수했어도 그것으로 ‘영생’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것의 준수 대가’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죽지 않음(죽음 없음)’의 향유(享有)였다.
물론 그의 범죄 후에도 ‘영생’은 그에게 차단됐다. 이는 아담이 범죄 후 생명과실을 따먹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그의 접근을 차단한데서 나타난다. 성경은 그 이유를 ‘타락한 상태로 영생할까’ 해서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영생)’을 ‘은사’로 취할 수 있을 때까지 죄인에게 그것이 유보됐음을 암시한다. ‘인간에게 영생이 오기까지의 과정’을 도식화 하면, ‘범죄 전(前)의 죽지 않음→ 범죄 후(後)의 죽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사로서의 영생’이다.
‘범죄로 인한 죽음’ 이후에 비로소 ‘영생’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환원하면, ‘죽음’이 없었다면 ‘영생’도 없었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영생’을 ‘죽음에서의 옮김’이라고 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영생)’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사도 바울 역시 ‘영생’이 ‘죄 안에서 사망이 왕노릇 하는 자’에게 임한다고 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
역설(paradox)이다. ‘무죄한 인간’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이 겨우 ‘죽지 않음’이었는데, ‘범죄한 인간’이 ‘영생’을 가지게 됐다니!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자’안에서만 경험되는 초월적인 경륜(economy, 經綸)이다.
동시에 그것은 ‘자기 의(義)’를 신뢰하며 그것으로 ‘영생’을 구매하려는 이들에겐 감춰진 비밀이다. 이는 그들의 얼굴을 덮은 ‘율법의 수건(고후 3:14-15)’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4-15)”.
유대인들 역시 영생을 그렇게 갈구하여 성경을 상고했으면서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들을 덮은 율법의 수건 때문이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