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피상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그에게 ‘다양한 의(義)’를 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직 한 가지 ‘구속의 의(義)’만을 요구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죄 삯 사망을 지불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구속(救贖)의 유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덴(Eden)의 선악과 언약’이 ‘아담의 죄’로 파기된 후 모든 율법은 죄인의 구원(생명)을 도모하는데 소용되지 못하고, 사망을 이루는데 만 기여했다. 죄인이 ‘율법의 의’를 도모하려 하면 할수록 그는 ‘죄인’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모세의 ‘시내산 율법’ 역시 ‘그것의 준수’를 통해 죄인이 ‘의(義)’를 이루지 못하고 ‘정죄(定罪)’만 당할 뿐이었다. 다음이 다 그것을 말한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5; 7:7)”.
그렇다고 ‘율법과 그것의 역할’이 전적으로 부정되거나 무시되지 않는다. 율법을 ‘몽학 선생(schoolmaster, 蒙學先生)’이라 일컬음도 ‘그것(율법)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시사점을 담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몽학선생인가?
다시 말하지만, 율법이 다만 ‘정죄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긍정적 역할’도 한다. ‘몽학선생 역할’이 그것이다. 죄인으로 하여금 ‘그것(율법)의 정죄’를 받아(롬 3:20) ‘그리스도께로 인도’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롬 3:23-25)”.
그러나 율법 자체에 그런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곧, ‘미중생자’가 율법을 듣는다고 절로 그것(율법)이 의도하는 바 ‘죄의식’과 ‘그로 인한 절망감’에 빠지게 하지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지도 않는다.
이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율법에 애착했으면서도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그들은 율법을 읽으면서도 그것(율법)이 지시하는 바 ‘정죄함을 받지도, 그리스도께로 인도받지도(요 1:45)’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그들은 그것(율법)에서 ‘자신들의 의’를 보았고, 따라서 ‘구속주 그리스도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몽학선생과 전도
이러한 사실은 자연스럽게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과 ‘전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이들은 먼저 사람들에게 ‘율법의 정죄’를 통해 심판의 두려움을 준 후, ‘구원’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죄인이니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자기가 얼마나 비참하고 두려움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전도할 때 상대방에게 ‘정죄(定罪)하는 말’을 하면 그의 마음 문을 닫게 하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혹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같은 부드러운 ‘사랑의 말’만 들려주라고 한다.
그럼 과연 ‘율법’을 말하면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려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 그의 마음을 열어 예수를 믿게 할까? ‘하나님의 사랑’ 역시 ‘율법’과 마찬가지로 ‘미중생자(未重生者)’에게 낯설긴 매한가지다.
설사 그들이 겉으론 ‘하나님 사랑’을 수납한다 하더라도, 기껏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사랑’은 ‘미중생한 자연인’이 기대하는 ‘육신의 안락, 건강, 부’ 같은 것일 뿐 죄인에게 필요한 ‘독생자를 주신 구속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 ‘구속의 사랑’의 기저엔 ‘당신은 심판받을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됐기에(요일 4:9-10), 이 역시 ‘율법과 무관한 사랑’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매 일반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 역시 ‘예수 안 믿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정죄(定罪)가 전제돼 있으니, 전적으로 ‘율법’과 무관한 ‘사랑’일 수 없다. 인간의 심리를 배려하고 안하고가 전도의 관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최소한 ‘자신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예수의 구주되심)’을 알려줄 필요는 있다.
예수님의 메시지(message)에도 어떤 때는 ‘사랑’이, 어떤 때는 ‘율법’이, 또 어떤 때는 그 둘이 함께 섞여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혹은 메시지를 받는 상대에 따라 달리 하신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3: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하나님의 은밀 의지
따라서 ‘정죄의 말씀’이든 ‘사랑의 말씀’이든 모두 다 ‘미중생한 자연인’의 생득적(生得的)인 마음엔 절로 수납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 진다. 곧 그것들 자체가 기계적으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지 못한다는 말이다. 거기엔 ‘하나님의 은밀 의지(secret will of God)의 개입’이 요청된다.
성경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23)”고 하신 말씀은 ‘복음 수납’ 전에 먼저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기능’이 구비돼야 한다는 말이다.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마 13:19)’ , ‘소귀에 경 읽기 된 자’에게 복음 전도는 무효하다.
곧 죄인이 ‘전도를 받고 안 믿고’는 ‘복음 메시지’와 더불어 그것에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은밀 의지의 개입’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불택자들에겐 ‘하나님의 유기 경륜(economy of abandonment)’이, 택자에겐 ‘그의 선택 경륜(economy of selection)’이 도모돼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를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하나님이 유기된 불택자들에겐 복음 전도가 ‘소귀에 경 읽기’가 되게 했다는 뜻이다.
반면 택자에겐 ‘하나님의 선택 경륜’과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그것이 도모된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