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칼럼] 한국 근현대사, 대한민국, 그리고 기독교 (6·끝)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님이 지난 1월 16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부당한 폄훼 및 그 시정방안’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소개합니다. 이 글은 지난 2022년 2월 역사연구재단에서 열린 한국근현대사 세미나에서 발표하신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편집자 주
박정희 시대 기독교의 기여
1. 부흥운동으로 희망과 용기
2. 안보 위한 이념적 무장
3. 흔들리는 한미관계 강화
VI. 산업화와 민주화(대한민국의 발전)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통해 기초를 놓았고, 1950년 6.25 전쟁의 시련을 극복한 대한민국은 1960년대부터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게 됐다. 그것은 박정희와 1980년대의 권위주의 정부시대의 산업화이며, 다른 하나는 87년 체제를 수용하면서 발전한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이다. 1948년 건국과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구조를 만들었다면, 산업화와 민주화는 그 내용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째는 이념의 정립이며, 둘째는 국가를 지킬 수 있는 방위 능력이고, 셋째는 먹고 살 수 있는 경제 발전이며, 마지막에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 건설이다. 이 네 가지 단계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이룩한 사람이 이승만이라면, 세 번째는 박정희와 그 다음 권위주의 정부, 네 번째는 소위 양김으로 대변되는 민주주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박정희는 반공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북방 대륙문화에서 서방 근대문화로 강력하게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박정희는 우선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미국 외의 다른 서방/해양문화와 손을 잡았다.
우선 한일관계를 정상화하였고, 월남전에 참전함으로 자유 세계 일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했으며, 독일에 광부·간호사 파견과 사우디 건설공사 참여 등 바다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였다. 이는 과거 중국 만주와 연해주 소련으로 향하던 우리 민족의 발걸음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나라를 대륙 국가에서 해양 국가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국가는 반서구 정책을 사용했다. 특히 중국은 1940년대 이래 지속적인 개방 정책을 중지하고, 문화혁명을 통한 반서구주의 정책을 지속했다. 그 결과 공산권은 매우 낙후됐고, 1980년대 말에는 자체 모순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 가운데 대한민국은 서구 세계와의 연대 속에서 발전했고, 그 결과 공산권의 붕괴 이후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으로 제품을 수출할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놀랄 만큼 발전했다. 그 근본 원인은 대한민국이 서구 세계와의 연대속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국민의식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조국 근대화 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전국 모든 마을을 새롭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전 국민의 의식을 새롭게 했다. 새마을운동은 국가가 국민의 자발적 협조를 얻어 이룩한 대단한 사업이었다.
이런 국민 계몽운동과 함께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이 이루어졌다. 국가가 방향을 정하고, 민간기업에 이것을 위탁해 중공업을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에서 국가와 기업이 절묘하게 협력해 대한민국 경제를 발전시켰다.
한국 기독교는 박정희 시대에 몇 가지 점에서 큰 기여를 했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각종 부흥운동을 통해 한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고, 이것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함께 한국 사회를 새롭게 만드는 중요한 일을 감당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이 강하게 일어날 때, 한국 기독교는 가장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흥운동은 민주화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개발하지 못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둘째, 한국 기독교는 안보를 추구했다. 하지만 이런 안보는 정신무장을 필요로 한다. 한국 기독교는 전군 신자화 운동이나 교경협의회를 통해 대한민국이 이념적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안보에 있어서 기독교를 중요한 파트너로 삼았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한미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 박정희 시절 한미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초 닉슨 독트린과 미중 데탕트로 인해 한국 안보가 위협당하고 있을 때,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발표해 여기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와 엑스플로(Explo) 74는 흔들리는 한미 관계를 민간 차원에서 다시 다졌다. 이런 노력은 카터가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할 때도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와 그 이후 권위주의 정부 내에서는 민주주의가 크게 위협을 당했다. 소위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삼권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가 무시됐다. 국제사회와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는 여기에 대해 매우 염려했다. 하지만 이것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종지부를 찍었고,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의 대통령 단임제와 노태우의 1987년 직접선거 실시는 대한민국이 민주화로 나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1948년 대한민국 건국정신인 자유민주주의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이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일부 급진 운동권 내에서는 이런 민주화 운동을 자유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북한 체제를 추종하는 종북 반민주 세력으로 전락하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세력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추구해 왔던 자유민주주의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소위 ‘87체제’는 공산권 붕괴와 함께 진행됐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노태우 정부 시절 88올림픽과 그 이후 북방 외교가 한국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88올림픽은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회가 되었다. 상당한 공산권 국가들도 88올림픽에 참가했고, 자신들의 눈으로 자유민주 세계의 성장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런 한국의 위상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북방 외교를 통하여 동구권은 물론, 소련·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과거 대륙 세력에 등장하게 되었다.
과거 우리 종주국이었던 중국과 노동자의 조국이었던 소련에 우리는 새로운 선진문화와 기술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위상은 특별히 과거 공산권이었던 국가들로부터 새롭게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 산업화는 각종 사회문제를 가져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한국 진보 교회가 기여한 점이 크다. 특히 유신 독재에 반대했다. 이런 민주화운동은 한국이 독재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민주화 운동의 일부는 반미, 종북운동으로 변질됐는데, 이는 결국 남한의 독재는 비판하면서 북한의 독재는 묵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일·러 주변 3국 지배 위협 벗고
미국 군사질서 속 근대 민주국가로
이승만 중심 기독교 세력 큰 공헌
중국 위협 직면, 한미동맹 강화를
나오는 말: 한국 근현대사와 대한민국 형성, 그리고 기독교
한국 근현대사는 새로운 국제질서 가운데 시작했다. 과거 조선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국이었고, 부차적인 것은 일본이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1860년 제 2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러시아가 새로운 세력으로 한반도 주변에 등장했다.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는 중국과 대등하거나 더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세 나라는 한반도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었다.
여기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한 것이 서구 유럽과 미국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 사정 때문에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으나, 미국은 태평양 국가를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한반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80년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는 한반도가 주변 3국(중국, 일본, 러시아)의 전쟁터이며, 여기에 미국은 보호자로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슈펠트의 생각을 고종은 받아들였고, 조미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을 중요한 변수로 생각했다.
한국 근현대사는 한반도 주변 3국의 침략 혹은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나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해 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오랫동안 자신의 영향 아래 있던 한반도를 잃지 않으려 했고, 일본은 한반도를 기반 삼아 대륙으로 나가려 했다. 러시아(소련)은 한반도를 통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이념 혹은 문화로 한반도를 지배하려 했다. 중국은 중화 질서, 일본은 식민지 질서, 러시아는 공산주의 질서로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려 했다.
한반도가 이런 주변 3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근대 민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우선 미국은 한반도를 주변 3국과 달리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욕망을 갖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며, 원래 주변국가들과 공동 관리하려 했다.
하지만 냉전이 시작되자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 됐고,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공동 관리보다 자유세계의 최전선으로 생각해 결국 한미방위조약으로 미국의 군사질서에 속하게 했다. 6.25 이후 한반도는 분명한 서구 민주질서에 속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건국된 것이다.
미국은 서구 기독교 문명의 총화로서 현재 세계 최대 강국이자 문명국이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개항 이후 오랫동안 기독교 선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렇게 한반도에는 미국 선교사를 통해 서구 문화 핵심인 종교의 자유, 개인의 가치, 자유민주주의, 인간의 평등, 노동의 중요성, 자국어의 중요성과 같은 것들이 들어왔고, 이런 요소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기독교는 가장 강력한 종교로 등장했다.
오늘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이런 국제질서를 받아들여 한반도에 자유민주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강력한 집단이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었다.
기독교인들은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중국의 유교 질서도, 일본의 식민지 질서도, 소련의 공산주의 질서도 아닌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라 생각했고, 해방 후 혼란한 상황과 6.25라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 자유민주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미친 기독교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동북아에서 정치적·종교적으로 미국적 질서와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일인 독재를 꿈꾸며, 일본은 천황제를 갖고 있다. 한국은 동북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종교적으로 한국은 동북아에서 가장 기독교가 왕성한 나라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발전해 왔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이런 미국적 가치를 가장 잘 공유할 수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한국과 미국은 ‘민주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가지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
현재 한반도 주변에 다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부상이다. 현재 한반도는 문명사적으로 다시금 중화질서로 동북아 질서를 회귀시키려는 중국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약 100년 전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려 했던 것과 같다.
한국은 당시 미국과 연대해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가 됐다. 현재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동북아를 중화질서로 회귀시키려는 세력과 맞서, ‘자유민주 세계와 연대해 한반도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라는 중대한 질문 앞에 놓여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미동맹을 강화해서 중화질서로의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박명수 박사
서울신대 명예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