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웨인 그루뎀의 <성경과 정치>를 중심으로 (3)
개인 구원, 정부 아닌 하나님의 일
사회 변화, 법·제도보다 사람 중요
얼마나 동의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성경이 확실히 동의하는지 상고를
IV. 정치참여의 한계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그리고 교회의 정치참여에 제한을 가하는 복음전도 우선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논의했다. 이번에는 정치참여의 한계점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
그루뎀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였다.
첫째, 개인의 구원은 정부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아무리 좋은 정부라도 사람들을 죄에서 건지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 인간의 영혼이 참된 길을 찾고,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누리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가능한 것이다(요 14:6). 복음전도는 유일한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이다. 이 복음은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눅 2:10). 인간이 아무리 좋은 정부를 세울지라도 영원한 소망과 안정을 줄 수 없다.
둘째, 사회 변화는 법과 제도만으로 되지 않고 변화된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법과 제도 개혁만으로 사회가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이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내면적 변화 없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강력한 전체주의 통제사회 밖에 없다. 그런 사회가 결코 좋은 사회일 리 없다.
선거에 원하는 정치인이 당선되었거나, 악법을 막고 좋은 법을 지켜내면 모든 사회 문제가 사라지는가? 더 중요한 것은 숭고한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야 그 사회는 변화가 되는 것이다.
20대 초반 한성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을 믿게 된 이승만은 교회가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는데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백성을 새 사람이 되도록 감화시켜야 그 정부가 깨끗하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제도는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그 좋은 제도를 운영할 좋은 사람들이 없으면 제도는 결코 작동되지 않는다.
셋째,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교회는 정부 권력을 통해 국가 교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분리되어야 한다(마 22:21). 교회가 시민정부를 통제하는 중세 가톨릭 시대는 종교적 암흑시대였다. 반대로 정부도 종교를 통제하거나 특정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정치 권력과 주권을 장악하여 기독교화 하겠다는 시도도 잘못된 것이다.
황재범은 로이드 존스를 인용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이론이 인간이 정치권력을 취득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국가를 기독교화(Christianizing) 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적 이단사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언제나 필요한 일이지만, 그 한계도 분명 하다. 정부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중심에 둔 예배와 교육, 그리고 구제와 봉사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며 거듭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V.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정치참여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하면 교회는 정치참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교회는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정부에 미칠 수 있을까? 그루뎀은 교회의 정치참여의 실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치적 이슈는 절대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각 정치적 진영의 관점을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지 말아야 한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과 같이 복음주의자들 모두 동의하는 이슈도 있고, 어떤 주제들(전쟁, 사형제도, 경제, 복지, 결혼)에 관해서는 보다 의견이 복잡하게 나뉘어질 수도 있다.
성경을 근거로 얼마든지 논의한다면, 결국 설득력 있는 견해가 다수에 의해 수용될 것이다. 진실로 성경을 통해 각 세상의 문제들에 관해 살피는 노력 없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정치참여에 제한이 있을 것이다.
둘째, 목사는 법과 정부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에 대해 성경적 관점으로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논쟁거리라 해서 성경적 관점을 가르치는 것을 거부해선 안 된다. 사도바울 역시 쉬운 주제만 다루어 논쟁적 이슈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6-27)”.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않아 그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했다. 성경이 특정 정치적 문제에 정확히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당신은 성경의 원칙대로 자녀교육을 할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자녀교육에 대한 성경의 원칙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며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이 삶의 다양한 특정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는, 지혜로운 성경적 가르침을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목사는 정치 이슈에 관한 가르침에 따른 ‘분열’에 대해 큰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이는 사실상 동성결혼법으로 성경이 지지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반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자.
그런데 한 성도가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고 목사가 교회에서 말씀이 아닌 정치적 이슈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비난한다면, 목사는 오히려 설교를 잘못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성도는 명백히 성경이 말하는 결혼제도에 관해 동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지를 고민하지 말고, 성경이 확실히 동의하는지를 상고해야 한다. 이는 어려운 과정이지만, 목사는 하나님과 성경에 신실하기로 결정하며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너무 지나치게 정치적 이슈만 설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균형있게 가르쳐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바르게 투표하고, 각 분야에서 탁월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바르게 투표하려면 바른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거짓과 선동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정보를 판단할 수 있는 분석력을 길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꾸준히 교회 안에서 성경을 배우고 함께 소그룹에서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 각 성도가 속한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탁월한 시민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는 로이드 존스가 표현한 대로 ‘최상의 시민들’이 돼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분야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정치참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선범 목사
포항 기쁨의교회 부목사
유튜브 ‘프리칭지저스’ 운영자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 M.Div.
한동대 경영학·국제지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