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 외교 (7)
후쿠시마 오염수 이슈 종적 감춰
반미·반일 활용 선동, 효력 멈춰
진보, 최소한 사실성·진정성 외면
전문가 집단 견해 일방적 무시해
젊은이들은 혐한·혐일 감정 없어
허황된 의견 펼치는 저의 의심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슈가 한창이던 지난 6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 여행객 수는 총 54만 명으로, 한국이 국가별 일본 방문객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이 추세는 한동안 꺾이지 않고 이어질 전망이다.
정치권·언론계·미디어 전반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슈는 거의 종적을 감춘 상황이다. 불과 2-3주 만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했다. 오염수 방류 이슈가 꽤 오래 지속되니 대중이 피로감을 느낀 데다, 해당 이슈를 뒤덮을 만한 새로운 이슈들이 여럿 이어진 까닭이다.
홍수로 인한 사고와 인명피해, 붕괴된 공교육 실태, 무차별 칼부림 사건 등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오염수 방류 이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거의 사그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반미·반일 감정을 활용한 진보진영 측 대중선동 전략이 우리 사회에서 이전만큼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과거 광우병 선동이나 한일 무역분쟁 선동은 지금보다 훨씬 강한 파급력을 갖고 장기간 여론의 향방을 지배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관련된 논란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민주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도 상승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해당 이슈를 최대한 물고 늘어지려던 민주당과 진보 진영 측 계산이 별반 먹혀들지 않은 셈이다.
반미·반일 감정을 활용한 선동과 프로파간다는 더 이상 대중문화계에서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최근 한국 극장 상영 영화의 극단적 흥행 성적 부진은 진보이념 전파에 몰두하느라 참신한 각본과 연출에 힘을 쏟지 못한 한국 영화계의 정체된 현실을 반영한다.
이처럼 최근 한국의 대중이 민주당과 진보 진영 측 대중선동 노력에 큰 호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민주당 측이 선동의 필수요소 가운데 하나인 최소한의 사실성과 진정성마저 외면했기 때문이다.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이 말은 나치 선동선전을 이끌었던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대변하는 격언이다.
하지만 최근 민주당의 선전선동 내용 대부분은 1%의 진실조차 담아내지 못하고 있으며, 이 사실이 세간에 보다 자세하게 알려지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여론을 이끄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 광우병 논란, 한일 무역분쟁, 그리고 이번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에서 민주당과 진보진영 측은 사실에 바탕을 둔 증거는 제시하지 못한 채 순전히 자의적인 주장과 의견만을 내세웠다.
통상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맞아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배워 왔다.
하지만 이런 최근의 인식과 달리 ‘의견’(opinion)이라는 말은 학문의 역사에서 꽤 오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플라톤의 진리에 대한 견해에서 의견이란 이 세상의 잡다한 현상들에 바탕을 둔 주관적 견해로서, 영원불변의 보편적 진리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한 허망한 주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의견에 대한 플라톤의 이 부정적 평가는 현상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지적 풍토에서는 더 이상 널리 수긍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지식의 타당성에 대해 반성하고 고찰하는 연구자들 입장에서 ‘의견’ 개념에 대한 플라톤의 부정적 평가는 귀 기울여 들을만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플라톤이 경고하고자 했던 바는 하나의 주장이라는 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말의 향연으로 치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실적 근거를 바탕에 두지 않으면 무가치하다는 점이다.
공허한 의견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다양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통상 민족주의와 대중심리를 악용하는 선동선전 전략이 주된 경로로 채택된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서는 그동안 이 전략을 알차게 활용해 왔지만, 최근에는 그 효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진보 진영 인사들의 형편없는 민낯을 반복적으로 목격했고, 그들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1997년 대선 이래 민주당도 세 번이나 정권을 잡았고, 국민들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진보 진영의 집권 행태를 목격할 수 있었다. 서민과 약자를 보호한다면서도, 기득권을 누리려는 행태는 기존 수구보수 세력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국정운영 경험 부재로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복지 및 재정정책을 남발하며 국가의 성장동력을 이리저리 낭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국정 운영에서 실책이 드러나면 변명과 말바꾸기, 남탓에만 주력하곤 했다.
정치 프로파간다도 약간의 진정성이 있어야 효력을 발휘하는데, 워낙 진정성 없는 모습이 거듭되니 국민들 또한 민주당과 진보 진영 측 정치 행태에 기대감을 접은 상태라 볼 수 있다.
현재 진보 진영 지지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민주당의 정책이나 주장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거나 지역색이 맞기 때문이지, 민주당 인사들로부터 어떤 도덕적 기대감이나 사회정의에 대한 기대감을 갖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보수 진영 지지자들도 보수 측 정치인들에게 특별히 도덕적 기대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실망할 대로 실망한 처지이지만, 적어도 민주당의 허황한 ‘의견들’보다는 현실적인 국정 운영 전망을 내놓기 때문에 차악(次惡)을 선택한다는 입장에서 소극적 지지 의사를 표할 뿐이다. 하지만 민주당 측 선동선전 전략은 대개 명확하고 객관적인 근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건에서 진보 진영 측은 IAEA와 국내 원자력 공학 전문가 집단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채,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에 호소하는 반지성적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중국, 북한, 러시아에서 한반도 근처에 버리거나 방류한 방사능 오염물질과 오염수에 대해서는 언급을 기피, 전체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외면하는 비합리적 태도를 견지했다.
진보 진영 측 견해를 지지한답시고 나선 서균렬 교수 같은 인물은 본인의 학문적 양심을 거스르면서까지 민주당의 선동적 의견을 지지하다 자가당착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과거 자신이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한국에 미칠 환경 영향이 미미할 것이라 밝힌 입장을 불과 몇 년만에 전면 번복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자질과 연구 경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우를 범했다.
시대가 변했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일까. 현재는 더 이상 반일의 기치를 들고서는 과거와 같은 선전선동 효과를 누리기 어려울 것이 자명한 상황이다.
한일 양국 젊은이들 사이의 혐한·혐일 감정은 과거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줄어들고 있고, 월별로 50만 명 넘는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있다. 막연히 서로를 절대악처럼 여기던 허상들은 민간의 직접 교류가 급증하면서 크게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일본이 군국주의를 지향하고 조선 식민지인들을 2등국민 취급하며 차별하고 착취했던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한국인뿐 아니라 일반 자국민들도 일개 병사처럼 전쟁과 부역에 활용했다. 오로지 일본 정재계와 군부 기득권층만 제국주의 열강이 누릴 수 있었던 과실을 독점했다.
한국의 비극적 식민지 역사는 이처럼 미시적인 구체성을 가지고 이해해야지, 일본인 전체를 악의 화신처럼 여기는 단편적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결국 구태적이고 부정확한 역사 인식에 갇히게 될 뿐이다.
민주당 측이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 단편적이고 반지성적인 역사 인식은 점차 공존과 협력을 향해 나아가는 한일 양국의 현실적 상황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현 여당은 적어도 이런 비현실적 역사 인식에 갇혀있지 않고, 현재의 정치외교 정황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대응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일단 생태적으로 우리 한국에 분명한 위해를 미치지 않는다는 학문적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외교안보적 이익까지 염두에 두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학문적 근거와 외교적 이익을 모두 따지는 이런 접근법을 굳이 허황된 의견들을 가지고 애써 부정하고 폄하하는 민주당 인사들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