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인들’은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재확인’으로 불리는 ‘도르트 신조(Synod of Dort)’를 후대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교리에 대한 위대한 신앙고백’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그것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주권적 은혜의 구원’을 믿는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이나 실수’로 인해 ‘그가 받은 구원’이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교회사적으로 반대자들로부터 늘상 ‘죄의 남용을 부추기는 자’라는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그들의 신앙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은혜로 얻는 구원’이 ‘죄의 남용’을 부추긴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의 구원’이라 할 수 없다. ‘은혜’란 그렇게 ‘무능(無能)’하거나 ‘무규범적(無規範的)’이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Grace)’의 품사(品詞)는 부드러운 ‘여성형’이지만 그 내면의 속성은 ‘강한 남성형’이다. 이는 성경이 ‘은혜’를 ‘강함의 원천’으로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딤후 2:1)”.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친히 완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며 튼튼하게 세워 주실 것입니다(벧전 5:10)”.
사도 바울은 ‘은혜의 구원’을 폄훼하는 이들의 비난에 대해 ‘은혜는 성도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죄 가운데 살도록 방치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그들이 ‘은혜 구원의 교리’가 ‘죄의 남용을 부추길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피구원자(被救援者)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강한 ‘은혜의 남성성(masculinity)’에 대한 고려는 배제한 채, 유약한 ‘은혜의 여성성(femininity)’과 ‘자아중심적인 인간 본성’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결과이다.
◈죄가 갖다 주는 파괴적인 결과
‘은혜로 얻는 구원 교리가 죄의 남용을 낳을 것’이라는 이런 ‘왜곡된 추정’의 기저엔 ‘은혜가 피구원자를 덮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가 없을뿐더러, 그가 ‘죄의 남용’으로 인해 입히게 될 ‘하나님의 영광의 손상’과 ‘자신이 입을 영적 해악’에 대해선 무관심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사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를 지배하는 은혜’가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는다’는 ‘얄팍한 육신적 이기심’보다, 그것으로 인해 야기될 ‘하나님 영광의 손상’과 ‘자신이 입을 죄의 해악성에 대한 자각’에 의해 더 고무받는다.
이는 그가 자신의 죄가 자기의 구원을 상실하게는 못하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파괴적인 결과, 곧 ‘하나님 영광의 침탈’과 ‘자·타(自他)가 입을 영적인 해악’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사람마다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전도자 솔로몬은 일찍이 “악하게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어리석음은 곧 미친 것임을 깨달았다(전 7:25, 공동번역)”고 한 것은 죄가 야기하는 ‘하나님 영광의 침탈’과 ‘어리석은 자해(self-injury, 自害)’를 두고 한 말이다.
욥 역시 ‘죄의 두 가지 속성’, 곧 ‘혀 밑에 감추어 놓을 만큼 그것의 달콤함(sweetness)’과 ‘후에 그것이 야기(惹起)할 씀(bitterness)’을 진술하며, 전자의 ‘달콤함’에 빠져 후자의 ‘씀’을 망각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찌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찌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욥 20:12-15).”
이 외에 성경은 곳곳에서 죄가 야기하는 ‘영적 흑암과 고통’을 경고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당신의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약속도 빠트리지 않으신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시 107:10-14).”
◈죄는 사랑의 훼손
대개 ‘죄’ 하면 ‘율법’만을 떠올리며 단순히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한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다만 여기서 그친다면 이는 율법이 최고의 지위를 점한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의 죄관’이다.
‘율법의 완성’을 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개념’은 그 의미를 상회(上廻)한다. 그들에게 ‘죄’는 ‘율법의 저촉(抵觸)’ 그 이상의 ‘사랑을 거스림’이다. 그들로 하여금 ‘죄를 피하도록 고무하는 것’도 단지 ‘율법의 명령’때문만이 아닌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다.
곧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게 하고, ‘자·타(自他)에 대한 사랑’을 훼손하기에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사랑’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며 ‘죄의 회피’를 비롯해 ‘모든 행위의 동기’를 ‘율법’이 아닌, ‘사랑’에 둔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계명 준수’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발분(發奮)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간혹 어떤 성경 구절들은 ‘사랑’을 ‘율법의 카테고리’ 안에 넣어 ‘사랑의 지위와 의미’를 ‘약화, 퇴색’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그러나 이 말씀들은 ‘사랑은 결코 반(反) 율법이 아니다’ 혹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 ‘사랑을 율법 아래 둔다’는 뜻이 아니다. 이의 적나라한 예가 ‘그리스도의 구속에 나타난 율법과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그의 ‘사랑(요일 4:9-10)’이다. 동시에 그의 죽음을 통해 성취한 그 ‘사랑’은 우리 대신 ‘죄삯 사망의 지불(롬 6:23)’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 것’이다.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율법을 성취했고, 율법의 성취로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완성됐다’는 뜻이다. 흔히 십자가를 ‘사랑’과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도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