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 구원(救援), 영생(永生), 양자(養子) 됨, 하나님 나라’는 오직 은혜로 받게 하셨다. 다음이 그 근거 구절들이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딛 3:7)”.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적은 무리(양떼)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경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는가?’ 또 ‘그것은 왜 모든 사람이 아닌 일부 인들에게만 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의 은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업(inheritance, 遺業) 개념’을 장착(裝着)해야 한다. 곧 죄인이 그것들을 ‘은혜’로 수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 ‘유업’으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천국’을 예표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성경은 ‘유업’이라고 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inheritance)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레 20:24)”.
‘천국 입성’이 ‘인간이 쟁취물’이 아닌 ‘유업’임을 말한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아브라함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유’는 그것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유업’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유업(의롭다 하심을 받음)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
이렇게 ‘은혜(恩惠)’와 ‘유업(遺業)’은 서로를 지지(支持)해 주기에 둘은 자리바꿈을 해도 무방하다. 예컨대 ‘은혜로 받는 것이기에 유업이다’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기에 은혜이다’로 바꾸어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또 그것들이 ‘일부인(一部人)’에게만 주어지는 이유 역시 그것이 ‘후사(heirs, 상속자)’에게만 주어지는 ‘유업’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역시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주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받은 ‘의(義)의 유업’과 ‘은혜(약속)’와 ‘후사’를 서로 연결 지었다. 그가 ‘후사’였기에 ‘의(義)의 유업’을 ‘은혜’로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후사(後嗣)’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디도서 3장 7절 역시 ‘의의 유업’과 ‘은혜’와 ‘후사’에 대한 관계설정을 공고히 했다. 곧 ‘의의 유업’이 ‘후사’에게 ‘은혜’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heirs, 유업을 이을 자,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믿음으로 수납하는 ‘유업’
하나님은 앞서 열거한 ‘의(義), 구원(救援), 영생(永生), 양자(養子) 됨, 하나님 나라’같은 ‘유업들’을 ‘믿음’으로 취하게 하셨다. 이는 근본 그 유업들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만 수납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그것들을 ‘믿음’이 아닌 ‘율법의 행위’로 취하게 하셨다면 그것들은 ‘은혜’일 수도, ‘유업’일 수도 없다.
‘그것들’이 ‘믿음’으로 수납돼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전자(前者)가 ‘초월적인 것들’이기에, 그것들을 취하는 수단인 후자(後者) 역시 ‘초월적인 것(믿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을 ‘초월적인 것’으로 규정함은 ‘그것의 발원지’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들은 믿음의 원천을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께 둔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초월적인 유업’을 ‘인간의 율법적 행위’나 ‘생득적인 믿음(natural faith)’으로 수납하려는 것은 ‘무한의 하늘’을 ‘땅의 유한한 그릇’에 담으려는 것과 같다.
아래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의, 구원, 양자 됨, 하나님 나라’가 오직 ‘초월적인 믿음(supernatural faith)’으로 수납됨을 하게 하셨음을 공고히 해 주는 구절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 2:5)”.
◈은혜의 궁극 경륜 ‘예정’
‘은혜’를 ‘유업’으로 받게 했다는 말은 환언하면, ‘그것(은혜)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후사’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이미 앞서 언급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러면 ‘은혜의 유업’을 받을 ‘후사(heirs, 상속자)’는 누구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 예정(predestination, 豫定)을 입은 자’이다. ‘은혜의 유업’을 받을 ‘후사’는 이미 ‘구원 예정’에서 결정됐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로 예정하신 후사’에게 유업으로 주신다’고 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은혜의 유업’을 받을 ‘후사’가 되려면 먼저 그가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는 개혁신학(改革神學)에서 ‘예정(predestination, 豫定)’이 그 ‘궁극의 지위’를 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론적으로 모두(冒頭)에 던진, ‘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고, 또 ‘그것은 왜 모든 사람이 아닌 일부 인들에게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후사에게 주신 유업이고, 그 후사는 하나님의 구원 예정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궁극의 경륜인 ‘예정’을 인정할 때까진 이 ‘하나님의 은혜 경륜’은 오리무중으로 남을 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