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의 연이은 자살과 학교에서의 교권 침해 사례들이 연이어 드러나면서 연일 신문이 떠들썩하다. ‘학생생활지도 고시’가 발표되면서 학생인권조례가 어떤 내용이었는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정말 아연실색할 내용들이다. ‘학생인권’이 도대체 무슨 의미였냐고 조례를 만들었던 분들을 대상으로 청문회라도 해야 할 판이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에게 물어봐도 이 내용들이 ‘학생을 위한’ 내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진료받는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가 학교에서 충격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에게 얘기한 내용에 필자도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담임선생님이 체구가 작은 남자선생님인데, 그 반의 체구가 큰 남학생이 그 선생님을 신체적인 힘으로 제압해서 거의 질질 끌고 한참을 다녔는데 그 선생님이 아무 대처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화를 내지도, 야단을 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매를 때리지도 못하고 한참을 끌려 다니다 겨우 놓여 났다는데, 어떻게 이런 장면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그 장면을 본 아이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또 근래 진료를 시작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은 학교가 너무 싫고 학교에 있을 때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3-4명의 아이들이 수업하는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생님을 조롱하고 웃고 떠드는데, 거의 모든 아이들이 웃으면서 이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너무 싫어요.” 무표정으로 이 말을 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그 아이가 교실에서 느낄 혐오감과 좌절감이 전달됐다. 또한 이런 분위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명확한 ‘기준’도, 예절이 실종된 분위기를 바로잡을 방법에 대한 생각도 희망도 없는 그 아이의 얼굴은 너무나 힘이 없어 보였다.
새로 발표된 ‘학생지도 고시’ 4가지만 보자. 교육부는 고시대로 생활지도를 하면 교사는 아동학대로 처벌받지 않는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간은 교사가 생활지도 중에 아동학대로 처벌받았었나 보다.
고시 한 가지, 학생이 수업 중에 휴대전화 사용으로 교육을 저해하면 주의를 주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검사와 압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즉 그간에는 수업 중에 학생이 휴대전화를 사용해도 주의를 주고 압수할 권한이 없었다는 뜻이다. 학생인권조례의 ‘사생활의 자유’ 조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자유’가 이런 것이었던가? 학교에서 선생님이 수업하는 중에 학생은 휴대전화를 마음껏 사용하면서 제지를 받지 않는 것이 학생의 자유인가? 이런 것을 ‘방종’이라고 부르는 것을, 학생인권조례 하의 학교에서는 금지했나 보다.
고시 또 하나, 교사의 수업권과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방해하는 경우 학생의 휴식권을 제한할 수 있다. 즉 그간 학생인권조례의 ‘휴식권’으로 인해 교사가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을 깨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생이 “선생님이 내 휴식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마음껏 잘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학생의 ‘인권 보장’인가. 수업시간에는 잠을 참으며 수업을 들으려고 노력하게끔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 아니던가. 그것이 자기통제력의 훈련 아니던가.
고시 또 하나, 교사나 다른 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는 학생은 물리적 제지도 가능해졌다고 한다. 물리적 제지를 하면 교장에게 보고해야 하고, 교장은 보호자에게 알려야 한다. 즉 그간 학생인권조례 하에서 교사나 다른 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는 학생을 물리적 제지를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초등학교 4학년이 담임교사를 힘으로 제압해서 교실 안을 끌고 다니는 상황이,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수업하는 선생님을 조롱하고 웃고 떠드는 교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교사와 다른 학생에게 위해를 가해도 물리적 제지가 금지되었었다니, 이것이 ‘인권’일까? 참 말로 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상식에서 멀다. 새로 발표된 고시에도 물리적 제지를 하면 교장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니 일선의 교사들이 과연 물리적 제지를 실제로 할 수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고시 마지막 예, 교사가 교육적 목적으로 공개적으로 학생을 칭찬, 보상할 수 있다. 즉 학생인권조례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 조항으로 인해 그간 교실에서는 학생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보상을 줄 수가 없었다는 의미다. 교실에서 학생을 칭찬하는 것이 학생인권조례에서는 ‘차별’인가 보다. 오늘 칭찬을 못 받은 학생이 ‘나도 노력해서 저 아이처럼 칭찬 받겠다’, 또는 ‘내일 나도 칭찬받을 것이니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나는 차별받았다’고 생각하도록, ‘나는 손해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도록 교육한 것이 아닌가? 아이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차별’이라는 학생인권조례를 손에 받은 이 교사들은, 그간 교실의 모든 학생들을 골고루 칭찬하도록 교육대학 시절부터 끊임없이 훈련받은 분들이 아닌가.
심란하다. ‘학생인권’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정말 궁금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석했다고, 뭐라고 그 분들이 설명을 한들, 그들의 말이 솔직한 말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교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 상식에서 벗어난 조항들이 설명해 주는 것들을 믿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은 그들의 말이 아닌,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박희정 원장(연세해피마인드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