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7회 학술발표회 개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7회 학술발표회가 지난 7일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손승호 교수(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집이사, 명지대 객원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발표회에서는 전인수 교수(강서대학교 교회사)가 ‘「성서조선」의 검열 연구’과 양홍석 목사(다릿목교회 담임, 감신대 박사)가 ‘개교회사 집필과 활용방안에 대한 연구’를 주제발표했다. 각 발표에 대한 논찬은 홍이표 교수(야마나시에이와대학)와 김일환 박사(서울장신대 미래목회연구소 연구원)가 맡았다.
성서조선, 복음 전파 사명 갖고 검열 감수
네트워크·통신망·신앙상담소 역할 감당
먼저 전인수 교수는 “성서조선은 다른 언론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검열을 감수해야 했다”며 “잡지 발행을 위해 김교신은 일제의 검열 시스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성서조선은 여러 번 검열 삭제되거나 불허가 처분되거나 때로는 잡지 발간이 정지되기도 했다”고 했다.
전 교수는 “그가 발행한 성서조선은 다른 잡지보다 당시의 검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며 “성서조선에 따르면, 검열은 빠르면 2일에서 늦게는 2주 정도가 걸렸다. 검열은 소위 사상 통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잡지의 발행 시간을 지연시키고 일정을 조절해야 하는 등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고, 때로 발행인에게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주는 것은 물론 심리와 신변까지 강력하게 타격했다. 잡지가 이미 출판된 경우에도 검열 허가된 부분과 내용이 약간만 달라도 시정 조치를 당했다. ‘산상수훈 연구’의 경우, 이전에 없던 서문이 붙고 성서 본문을 김교신이 개인역으로 대체했다는 이유로 문제를 삼았다”고 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검열의 큰 범주는 독립을 선전하거나 민족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것, 배일(排日)의식을 선동하는 ‘치안방해’와 풍속이나 도덕적 규율을 무너뜨리거나 어지럽게 하는 행위인 ‘풍기괴란’이었다”며 “조선 식민지 검열의 특징 중 하나는 치안방해 행정처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성서조선에서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에 대해서는 “과거를 통해 조선의 현재를 이야기해 주었고, 미래를 설계할 눈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독자들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함석헌은 조선사를 ‘고난의 역사’로 파악했는데, ‘조선역사’는 몇 번 크게 삭제를 당하고 불허가 처분을 당했다”며 “삭제된 내용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점은 일제의 제국주의적 본성은 감추고,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를 꺾으려 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또 전 교수는 “일제는 언론 검열을 통해 비판적인 보도를 막고 선전의 도구로 언론을 이용함으로써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언론 매체들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전쟁 협력을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는데, 「성서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며 “더 엄격해진 검열과 총독부 경무국의 계속되는 요구로 김교신은 잡지의 휴간이나 폐간을 깊이 고민하였으나, 성서조선에 대한 애착과 복음 전도에 대한 강한 사명감 때문에 속간을 결심했다”고 했다.
이어 “그럼에도 나름의 원칙을 갖고 있었고, 이런 원칙 고수는 결국 1942년 잡지의 폐간으로 이어졌다. 폐간되더라도 크게 염려하지 않은 이유는 성서가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여기에서 ‘성서조선’의 우선 순위가 복음 전도임을 읽을 수 있다”며 “성서조선 폐간 후 김교신과 구독자는 사상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그중 13인이 1년 혹은 1년 가까이 수감됐다. 이런 점에서 성서조선 발행 과정에 김교신이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일은 없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김교신만큼 잡지 발행 때문에 고통당한 인물도 성서조선만큼 검열 삭제당한 잡지도 드물었다. 폐간의 빌미가 된 ‘조와’라는 글은 살벌한 식민통치 기간에도 김교신의 의기가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교신에게 복음 전도는 개인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서를 통해 조선인의 인격적 변화를 추구하였고, 이런 변화된 조선인이 조선을 갱신할 수 있으며, 도덕적인 백성이 결국 조선의 광복도 앞당길 것이라는 소망을 품었고, 이런 측면에서 성서조선을 포기하기 어려웠다”며 “성서조선은 하나의 네트워크이자 공동체, 교회와 같은 것이었다. 성서조선은 지우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신망이자 신앙 상담소였다. 이 잡지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소식을 듣고 무교회 정신을 함양하고, 정체성을 가다듬었다”고 했다.
교회사적 가치 충분함에도 보존·관리 미흡
세대와 소속 넘어 역사 잇는 라키비움 제안
양홍석 목사는 “한국 감리교회는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지역 내 역사적·문화적·사회적 사료로 사용되지 못했다. 또 각종 기록물들이 기록물의 의미와 상관없이 활용되고, 무엇보다 역사 자료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리·보존하지 못했다”고 했다.
양 목사는 “이제부터라도 교회 내 기록물과 교회 외 기록물중 교계 관련 기록물, 그리고 사회 일반의 기록물로 분류하여 기록물을 지속적으로 수집·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관련기관들과 협의하며 적극적으로 인력과 재정을 보강해야 한다”며 기준에 부합한 교회의 기록물 정리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첫째 교회라는 신앙적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는 문서여야 한다. 둘째, 교회와 관련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와 수집방식이 필요하다. 셋째, 역사와 연결된 사회 일반에 관한 자료를 함께 수집해야 한다. 넷째, 아카이브를 준비 중이라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일반적인 교회 아카이브들이 개체교회마다 각기 고유의 관리 방식 및 수집 범주를 지녀왔다는 점, 각 아카이브들의 상호 간 교류나 협력은 부재했다는 점, 매우 분산적으로 통일된 표준 없이 수집, 보존, 관리 되어왔다는 점 등을 문제점으로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기록들은 분산된 개별 단체에 귀속되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민간기록물로서 개교회 기록 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록물에 대한 관심과 인적, 재정적 지원이 중요하다. 그리고 개(個)교회와 사회 일반적 이슈와 연계성과 관련성을 중심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교회 기록물 및 개교회사 집필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노력을 살핀 양 목사는 “이들의 연구 작업을 통해 기록물 관리 이전에 기록물 자체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과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 및 지속적인 관심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민간기록물로서 준비 과정이 미흡하다는 사실을 점검해 보게 했고, 기록물로서 준비 과정과 개교회사 수집 및 보존 과정에 대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다시금 던질 수 있었으며, 기본적인 문제를 다시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또 감리교단 내 교회사 역사 서술에 대해 김진형, 성백걸, 송길섭, 윤춘병, 이덕주, 전성성, 조이제 등의 책을 통해 살핀 양 목사는 “이들의 기록을 통해 자료 수집의 주관적 방식, 분열과 분쟁시기에 대한 난해한 해석, 지역사 관련 글에 대한 부재, 이라는 문제적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며 “실제적인 기록물로서 상품화 현상을 버리고 기록물의 가치를 만들어 가야 한다. 한번의 기념품이 아닌 지속 가능한 기록물의 연장선을 위함이다. 이를 위해 개교회 공간에 라키비움(larchiveum)의 설립을 제안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교회사로서 민간 기록물의 시작을 위해 각 개교회들의 라키비움 시작은 다음과 같은 노력을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며 다음의 열 가지를 제시했다. ①수집부터 편집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교회 라키비움의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②둘째, ‘지역 내 신앙중심의 실록사’ 여야 한다. 개교회사는 신앙의 기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③셋째, 신앙 고백적 언어로서 사용되어지는 추상적인 언어는 배제되어야 한다. ④지역과 연관된 지역사와 지역 선교 역사를 연결하는 초기 도입부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⑤초기 자료 수집 장소 마련과 객관적 자료 수집이 필요하다. ⑥개교회사 집필은 집필 이후 수집과 보존을 위한 기초 작업이어야 한다. ⑦교회 기록물의 객관적인 분류법이 있어야 한다. ⑧개교회사 집필은 담임자 혹은 교회 유력인사 한 사람의 자서전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⑨기증자와 원본 소장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기증자와 기증물에 대한 예우와 기준이 세워져야 한다. ⑩대상을 분명히 하여 기록, 보존되어야 하며 대상이 소화할 내용을 담도록 한다.
그는 “지역교회사라 기록하고 일반적으로 개교회사라 명명되는 교회역사 집필과정은 몇 가지의 두드러진 큰 문제를 안고 있다. 그 하나는 교회라는 프레임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목회자의 욕망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개교회사 집필 과정 속에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가 집필 당시 담임을 하고 있는 목회자 혹은 교회의 부흥의 키워드가 되었던 목회자에 대한 열전이나 혹은 영웅 설화라는 한계를 경험하게 한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역사는 묻히고 두드러진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서술이 드러난다”고 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지역교회사로 읽히는 지역 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역사에 대한 부재가 현저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지역을 품고 100여 년을 살아온 교회의 경험들을 읽어가는 데 지역성과 지역 색이 드러나지 않는 섬과 같은 신앙 공동체가 대부분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지역이 부재한 지역교회 역사 기록은 어찌 보면 역사 기록의 모순이라고 할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래세대 와 지역주민들과 교우들의 소통 공간으로서 라키비움 건립은 이후 세대와 소속을 넘어 역사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며 “복합문화공간의 콘텐츠를 더욱 연구 개발한다면 도서관과 기록관과 박물관을 넘어 카페로, 영상관으로, 공연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