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행’은 율법주의자의 전유물인가?
자기 행위가 구원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legalistits)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부르짖는 ‘이신칭의론자(以信稱義論者)’에 비해 자신들이 하나님께 더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신칭의론자의 수고와 헌신이 그들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능가한다.
교회사학자들은 ‘많은 순교자들이 이신칭의론자들 중에서 나왔다’고 했다.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듯, 이신칭의론자는 행위가 없는 사변론자(思辨論者)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신칭의론자가 ‘믿음’만을 의지한다고, 그들에게서 ‘행위’가 부정되지 않는다. 이는 ‘오직 믿음(sola fide)’ 안에 있는 ‘은혜의 역사(a work of grace)가 그리스도를 향한 무한한 충성과 헌신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빌 3:9)의 사도’인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라. 자신의 수고와 헌신이 율법주의자들의 수고를 능가한다고 선언한다. 물론 그것은 자기 자랑이 아닌 자신에 대한 그들(율법주의자들)의 모함에 대한 자신의 변호이다. 이는 마치 ‘복음의 유익’을 위해 부득불 자신을 자랑했던(고후 12:1-56, 빌 3:4-9) 장면과 유사하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 27)”.
여기서 그가 말한 ‘저희’는 고린도 교회에 잠입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말하며, 그 내용은 이단적인 율법주의(legalism)를 고린도 교회에 퍼뜨리고,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자기의 헌신을 내세우며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한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항변이었다.
다음 구절 역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사도들’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생명을 드린 바울의 복음에의 충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율법주의자의 의행과 그리스도인의 의행
율법주의자와 이신칭의론자의 의행(義行)의 뿌리가 다르다. 전자의 뿌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라고 했던 부자 관원처럼 ‘자기의 구원도모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구원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6:12)”라고 했던 다윗처럼 ‘은혜의 감읍(感泣)함’이다.
전자의 속성이 율법에 근거한 ‘노예적 수고(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했던)’라면, 후자는 자신을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읍함’에서 나온 ‘사랑의 수고(살전 1:3)’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둘의 원동력(原動力) 역시 다르다. 전자(율법주의자)의 의행(義行)이 ‘자연인(the natural)에게서 나오는 육신적인 힘’이라면, 후자(이신칭의론자)의 의행(義行)은 ‘중생인(the borned again)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능력’이다.
혹자는 ‘육신적인 힘과 성령의 힘을 두부 자르듯 그렇게 나눌 수 있는가?’라고 할지 모르나,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전자를 ‘율법주의자의 봉사’로, 후자를 ‘그리스도인의 봉사’로 규정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참 그리스도인)이라(빌 3:3).” 이를 환언하면,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는 자가 율법주의자들이고 그들에겐 ‘자력 봉사(service by oneself)’만 있을 뿐, ‘성령으로의 봉사(service by Holy Spirit)’는 없다는 뜻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을 ‘같은 성령으로 행하는(act in the same spirit, 고후 12:8) 자’ 혹은 ‘성령과 함께 행하는 자’로 정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성령)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행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섬김의 질(質)’은 당연히 ‘육체로 말미암은 그것(섬김의 질)’을 능가한다. 전자가 ‘초자연적인 하늘의 것’이라면 후자는 ‘자연적인 땅의 것’이다. 이는 마치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만든 이적의 포도주가 자연산 포도주보다 더 맛있었던 것(요 2:9-10)에 비견된다.
‘믿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산(a products of the holy Spirit)’이 있고, 보편적인 인간의 종교성에서 나온 ‘자연산(a natural product)’이 있다. 사도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후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고 한 것은 앉은뱅이의 신앙이 ‘그리스도께 뿌리박은 성령산’임을 말한 것이다.
둘을 이렇게 구태여 구분 짓는 것은 하나님은 ‘성령산’만 받으시고, ‘자연산’은 안 받으시기 때문이다. ‘자연산 신앙’은 말로는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기독교신앙이 아닌 보편적인 종교 신앙(종교다원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둘의 극명한 예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드린 아벨(Abel)의 제물’과 ‘보편적인 종교심으로 드린 가인(Cain)의 제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령산’인 ‘아벨의 믿음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연산’인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했다(창 4:3-4).
‘아벨의 제물’은 ‘삼위일체(trinity) 하나님 신앙’에서 나왔다면, ‘가인의 제물’은 ‘단일신(henotheism) 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인을 ‘성령이 없는 자(유 1:11, 19)’로 규정한 것도 ‘그의 신앙과 제물’이 ‘자연산’이었음을 반증한다.
‘신앙과 제사’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소유하실 때도 ‘성령으로 중생한 자’만 자신의 것으로 취하시고,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은 거부한다. 이는 그가 부정한 죄인은 당신의 소유로 삼으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게 ‘개와 돼지와 같은 부정한 자들(마 7:6)’로 간주된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고, ‘중생의 씻음(the washing of regeneration, 딛 3:5, 요 3:5)’을 받은 거룩한 자만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할렐루야!
※‘이신칭의론자와 그리스도인’, ‘봉사와 섬김’은 동일한 의미이며 문맥에 따라 둘을 서로 혼용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