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선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가장 중시하며, 그것을 그의 모든 행위의 동기로 삼으셨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만물의 창조도 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 하셨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7)”,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신 것’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다. 곧, 그들로 하여금 구원자 하나님께 ‘영원한 채무자(債務者)’로 만들어 그에게 ‘영원히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러나 이와 달리 또 다른 곳에선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여 그를 구원했다’고도 말씀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이 구절들에선 ‘하나님의 구원 동기’에 온통 ‘그의 사랑’만 언급됐다. 일견 앞의 ‘하나님 영광’을 부정하는 듯하나 그렇지 않다. 이는 ‘그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죄인에 대한 그의 사랑의 발로’일뿐더러 ‘그의 영광의 발로’이기도 한 때문이다.
근본 이타적이신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구원)’하는 자체로 영광을 취하신다. 상대로부터 반대급부(反對給付)가 있던 없던 상관이 없다. 설사 배은망덕한 자라도 그는 그에게 사랑을 베푼 자체로 영광을 취하신다. 다음 말씀들은 그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유추케 한다.
“허물을 용서(사랑)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사랑)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사랑하심)이니라(마 5:4)”.
◈왜 ‘의인’이 아닌 ‘죄인’을 구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면 그의 영광이 더욱 도드라질 것 같지만 사실은 ‘죄인을 구원’하실 때 더욱 영광을 받으신다. 물론 율법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한다. 하나님이 의(義)가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의(義)가 없는, ‘경건치 않은 자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했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는 ‘의(義)’가 없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의 자비를 의지할 때(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들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취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은 ‘자기를 신뢰하는 자’에게서 영광을 취하시는 그의 ‘하나님 됨의 속성(the attitute of being God)’과 맞닿아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자신은 피조물’이고,‘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원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그의 신뢰는 ‘율법의 의를 도모하는 자’ 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예수님이 ‘의인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마 9:13)’은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긍훌(그리스도) 만을 의지해 구원받으므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고 하신 것 역시 흠결(欠缺)투성이인 ‘세리와 창기들’은 의(義)가 없어 ‘하나님의 의(義)’인 그리스도(고전 1:30)만을 전적으로 의지해 구원을 받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항상 모범적으로 살아와 ‘자의(自義)’로 충만하며, 언제나 율법에서 자기 의(義)를 찾아내어 그것으로 자기의 구원을 도모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선 하나님이 취하실 영광이란 없다. 그들의 지상목표는 ‘하나님 신뢰’가 아닌, ‘자신들의 율법적 의’이고, 그들의 면류관은 ‘자기 의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덴에서 뱀이 하와로 하여금 자신(하와)을 ‘하나님’과 ‘모든 것의 공급원’으로 삼도록 미혹했던(창 3:5) 바로 그 속성이다. 이렇게 그들이 ‘자기 의의 완성’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기 영광’을 도모하고 ‘하나님의 자비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니 그들이 정죄를 받을 것은 당연하다(막 16:16).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의지’하면 그가 영락없이 그 의지하는 것들을 제해 버리시는 것도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기대’가 ‘그들이 그를 신뢰해 주길 바라는 것’이며, 그러한 그들의 신뢰에서 그가 영광을 취하신다는 것을 시사한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 하실 것이며(사 3:1-3)”.
이 말씀에서 새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율법의 완전한 준수(완전한 인간)’가 아님을 확인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율법 앞에 절망하여(롬 3:20)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길 원하신다(갈 3:24).
여기서 우리는 구약 성경이 왜 그토록 죄인들에게 ‘하나님 신뢰’를 강조하셨가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선 ‘피조물의 참된 모습’일뿐더러 신약의 ‘그리스도 신앙’에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학습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 신앙’을 통해 그들에게서 ‘율법의 의’가 세워지도록 하셨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나아가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2)”고 한 말씀의 성취를 보게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