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모든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union, 聯合)’을 지향한다. 다음이 그 대표적인 말씀들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엡 2:5).” 해석하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시켜 살리셨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54).”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 한다’는 뜻이다.
◈‘세례와 성찬’,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union, 聯合)’을 상징하는 ‘세례(baptism, 洗禮)와 성찬(Sacrament, 聖餐)’은 기독교의 상징과도 같으며, ‘죄인이 구원받는 원리’을 잘 설명해 준다. 이 ‘두 성례’ 안에 ‘구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담겨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두 성례’를 중시하는 것도 단지 그것의 ‘예전적(禮典的)인 중요성’ 때문이 아닌, 그것이 ‘구원의 핵심적인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례의 참여’를 통해 ‘구원의 도리’를 확실히 깨닫고 그것의 은혜에 참여한다.
‘세례(baptism, 洗禮)’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 로마서 6장 3-8절이다. 이 본문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는 원리’를 ‘세례’을 빌어 잘 설명했다. 곧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참여케 됨’을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5).”
목회자가 성도에게 세례를 줄 때 ‘그의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은 ‘그의 머리로부터 몸 전체가 물 속에 수장(水葬)됨을 상징한다. 그리고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며, ‘세례로 물에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을 수장시키는 것’이다.
사도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세례’로 표현한 것은 죄인이 세례를 받을 때 그가 잠겨지는 물이 ‘예수님의 죽음’임을 시사한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물’이 없었다면 ‘죄인이 물에 수장(水葬)되는 세례’도 없다.
그리고 세례로 ‘죄인이 물에 수장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한 율법의 요구에 따라 ‘죄 삯 사망’을 치루는 일종의 ‘사형 집행’이다.
둘째, 죄인이 ‘물’이 상징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수장(水葬)되는 것이고, 이는 ‘그의 죽음과의 연합’을 뜻한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죄삯 사망’을 지불한 것이 되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다.
요약하면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물’이라는 ‘예수의 죽음’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죄삯 사망’을 지불함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찬(Sacrament, 聖餐)’ 역시 ‘세례’와 동일한 ‘연합’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성찬식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상징하는 바 그의 죽음에 자신을 연합시킨다’ 뜻이다.
‘성찬’의 대표적인 구절인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는 말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 한다’는 말은 ‘우리가 그의 죽음과 연합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54)”고 하신 말씀 역시 ‘성찬’을 시사하신 말이다. ‘나의 죽음을 너의 죽음으로 취하는 자(나의 죽음과 연합하는 자)’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 죄삯 사망을 지불했기에(율법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과’도 연합함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은 그 자체가 궁극의 목적이 아닌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까지가 그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부활이 따랐듯 ‘그의 죽음과 연합한 택자의 죽음’에도 부활이 따른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5)”는 말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된 우리는 그의 부활과도 연합돼 그가 살아날 때 우리도 함께 살림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 ‘죽음에서 살아남’은 그리스도 재림 때 일어날 ‘육체의 부활’이 아닌, ‘죄로 하나님에 대해 죽었던 영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향해 살게 됨’을 뜻한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삶’을 ‘육체적인 것’과만 연결 짓기를 좋아하나, 그리스도인에겐 ‘영혼이 사는 것이 참 삶’이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살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니다.
지금 ‘낙원(Paradise, 樂園)에 있는 이들’의 육체는 비록 무덤에서 잠자고 있으나,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고(계 19:4-5), 섬기고 있으니(계 7:15) 실상은 죽은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삶’을 진정한 삶으로 정의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분리된 삶’을 죽은 것으로 말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요 15:6)”.
예수님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6)”고 하신 것은 단지 영생교도(永生敎徒)들의 주장처럼 ‘믿는 자는 그의 육체의 생명이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뜻이 아니다. “죄의 죽음에서 살아나 ‘하나님을 향해 사는 중생(重生)의 생명’이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만이 아닌,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사시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한 자는 이후, ‘그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주도하신다는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인의 삶이 실패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삶’은 완벽할 수 없다 해도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사시는 것’은 완벽하시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