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고신대 신학거장으로 개혁신학의 초석을 놓은 이근삼 박사 출생 백주년을 기념하며
고신교단의 조직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의 거장 이근삼(1923-2007)의 출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근삼의 신학을 조명하는 일은 의미있는 일이다. 이 분은 부산의 고신대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적 사상은 한국 신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분의 별세를 계기로 이근삼 전집 편찬위원회 구성되어 그분의 쓰신 원고를 정리하여 2007년12월-2008년1월 10권의 전집이 출간되어 그 분의 정통개혁신학 사상이 한국 신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올해 이근삼 출생 백주년 기념으로 이근삼 신학을 주제로 한국개혁신학회가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과 함께 공동 학술대회를 열고 초교파적으로 복음주의 학자들이 각자의 관심있는 영역과 관점에서 이근삼의 신학사상을 연구조명하고 토론하게된 것은 고신교단의 개혁신학사상의 토대를 닦은 이근삼의 정통개혁주의 신학사상을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널리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필자는 숭실대 재직시에 이근삼이 번역한 헨리 밴틸(Henry R. Van Til)의 『개혁신학의 문화관』(The Calvinistic Concept of Culture)을 통해서 이분이 문화신학에 깊은 관심과 연구를 하신 것으로 알고 필자 자신의 학문적 관심과 일치함을 알게되어 존경과 아울러 이분의 개혁신학에 큰 관심을 갖게되었으나 학계에서는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이분의 출생 백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계기로 이분의 신칼빈주의적 문화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이분의 신학사상을 조명하고자 한다.
I. 신학적 배경
이근삼은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 목사의 외조카로서 설립자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현재 동아대학교 전신인 남조선대학에 다니다가 1946년 9월 20일 개교한 고려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제1회 고려신학교 입학생이 되었다. 이근삼은 32년간 교수생활의 은퇴를 앞두고 1994년 교단 언론 「월간 고신」 편집인 서창수 목사와의 대담에서 신학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질병을 심하게 앓던 어느날 밤에 고통 중에 하나님을 부르심을 받았다고 피력하였다: “내가 처음 신학을 시작하게된 동기는 어느날 밤에 심하게 앓게 되었는데 그 고통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 후, 한상동 목산님을 찾아가서 의논하고 고려신학교 개교 때에 입학시험을 치루고 신학을 시작했습니다”제5회로 졸업한 후 미국과 화란의 유학을 거쳐 1962년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32년간 고려신학교,고려신학대학, 고신대학, 그리고 고신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장으로, 총장으로 한국교회와 신학교를 위해서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의 초석을 놓았다.
이근삼은 고신에서 2년 예과와 3년 5년동안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신학생들 중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 갔다온 신앙의 용장들도 있었고, 신사참배로 더러워진 신앙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위해 사명감에 불탄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신에서 5년 동안의 배움 가운데서 학생 이근삼에게는 박윤선, 한부선, 두 분의 외삼촌 한상동, 한명동 목사는 그의 신앙적 모범상이었다: ”박윤선 목사님이 신학의 전반적인 과목들을 가르쳤고, 한상동 목사님이 기도와 실천신학을, 한부선 선교사님이 선교적 신학교육과 살제적 생활을, 한명동 목사님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는 박윤선에게서 칼빈주의와 성격해석학을, 한부선에게서 교회사를, 한상동에게서 목회와 실천신학을 배웠다. 그는 피력한다: ”박윤선 교수님을 통해서 칼빈주의를 배우고 성경과 해석학을 배우고 조직신학도 배웠다. 한부선 선교사님을 통해서 교회사와 설교학을 배우고 한상동 목사님의 로마인서 읽기와 분해, 실천신학을 배워서 확신을 갖게 됐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교회와 성도, 목회와 설교를 배울 때마다 나에게는 항상 새롭고 감격적이고 새 생명을 주는 감동적 배움이었다.“
이근삼은 자신을 “외골수 칼빈주의자”로 자칭한다. 평생 동료 오병세도 “그는 칼빈주의를 강의할 뿐 아니라 실천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이근삼의 칼빈신학은 탁상 공론에 머물지 않고 생활에 구체화되도록 강조했으며, 칼빈주의 문화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소개하였다. 그는 1948년 학생시절 오늘날 학생신앙운동(SFC)의 모태인 학생신앙 수련회에 오병세와 홍반식과 함께 청년신앙운동(YFC)의 모태인 청소년신앙수련회에 봉사하였다. 미국에서는 미국 보스턴 고든대학(Gorden College)에서 학사를 하고, 카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M. Div.)와 신학석사(Th. M.)를 마쳤다. 미국에서 5년간 공부할 때는 후원하는 교회도 없이 학비를 직접 벌어서 공부하였다.
이근삼은 교단 월간 고신 편집인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학문세계를 소개하였다: “미국에서 5년간, 화란에서 4년간 유학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반틸(Cornelius Vantil) 교수 밑에서 1년(1957.09-1958.05)동안 대학원 과정(graduate studies) 변증학(apologectis)을 공부하였다. 존 머레이에게서도 배웠다.
미국에서 웨스트민스터에 있을 때 반틸 박사로부터 세계적 칼빈주의 학자들, 특히 화란(和蘭)계통의 학자들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화란 자유대학교의 법철학자 헤르만 도이어베르트(Herman Dooyeweerd. 1884-1977), 자유대학교의 기독교 철학자 디르크 폴렌호픈(Dirk Hendrik Theodoor Vollenhoven. 1892-1978), 남아공 포체프스트롬대학의 칼빈주의 철학자 스토꺼르(Hendrik Gerhardhus Stoker. 1899–1993)였다.
이근삼은 미국에서 5년간 석사과정을 끝내고 1958년 대서양을 건너 화란으로 유학을 떠났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4년을 공부하였다. 그는 요한 바빙크, 벨카우어 교수 밑에서 칼빈주의를 배웠다. 그는 도이어베르트의 강의 시간에 찾아가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그의 대표적 저서 ”이론 사상에 대한 선험적 비판‘(Transcendental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에서 영역의 주권사상을 배우고 개혁사상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폴렌호벤은 은퇴했기 때문에 집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고 그의 서적 “칼빈주의 철학과 철학사”를 읽으면서 칼빈주의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이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이런 일들은 이근삼으로 하여금 개혁주의 세계관을 확립시키는데 크게 시야를 넓혀 주고 도움을 주어서 더욱 확신을 얻게 해 주었다. 이들 미국 및 화란 학자들은 칼빈주의자들로서 동시대에 각각 연구하는 중에 일치된 정통개혁주의 신학사상을 얻게 된 분들이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유학 시절에서는 교의학 담당 교수 베르카우어르(G. C. Berkouwer)가 석사 지도교수였으며, 교의학자 헤르만 바빙크 박사(Johan Herman Bavinck, 1854-1921)의 조카, 개혁주의 선교학의 선구자요 조직신학자인 요한 헤르만 바빙크 박사(Johan Herman Bavinck, 1895-1964)가 박사 지도교수였다. 박사과정으로 선교학자와 조직신학인 요한 바빙크에게서 선교변증인 엘랭틱스(Elenctics)를 전공했다.
엘렝틱스(Elenctics)라는 용어는 헬라어 동사 엘렝케인(elengchein)에서 온 것이며, 이는 ‘부끄럽게 하다’라는 의미로 죄 확신과 죄의 증거를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엘렝틱스는 죄의 깨달음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이교(異敎)의 가면을 벗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화란(和蘭) 교의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조카, 개혁주의 선교신학자 요한 바빙크(Johan Herman Babinck, 1895-1964)가 성경적 선교 이론을 수립하는 학문적 공헌을 끼쳤으며, 특히 그는 이방종교를 기독교신앙으로 대결하려는 선교적 변증학인 엘렝틱스(Elenctics)라는 용어를 만들고 이 이론을 확립시켰다. 엘렝틱스는 직접적으로 설득하는 기독교 선교 방법이기보다는 교차시험(cross-examination)을 통한 기독교 명제를 변증하는 간접적 선교방법이다.
신학박사(Th. D.)논문은 ”신도 국수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결“(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이다. 이 논문은 변증학과 문화신학에 관련된 조직신학 분야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메이지 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1868-1945) 일본에서 기독교와 신도의 충돌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 A Historical and Critical Study of the Conflict of Christianity and Shinto in Japan in the Period between the Meiji Restoration and the End of World War II (1868-1945)이다. 이근삼은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 학자요, 네덜란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학위논문은 당시 자유대학교에서 유명한 두 학자 베르카우어르 교수와 묄러만(Meuleman) 교수의 극찬을 받았다. 이 논문은 1962년에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출간되었고, 1966년에는 미국에서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er에 의해 재출판 되기도 했다. 이 논문은 <이근삼 전집>의 제9권에 한글 번역본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근삼은 화란에서 공부 끝내고 돌아와 고려신학교 교수가 된 후 1975년에 남아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스톡의 자택을 찾아가서 역시 칼빈주의 기독교철학에 관하여 담화를 나누었다. 이근삼은 1983년 3월에서 1985년 1월 기간동안 Edinburgh University, Free Church College at Edinburgh, Yale University에서 연구교수로 지내면서 끊임없이 세계교회와 현대기독교 사상과의 교감을 하였다.
II. 서양 현대 신학을 전공
필자가 이근삼을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자로 특히 평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연구과정과 그의 글의 성격에 기인한다. 그는 석사학위 논문을 불트만의 비신화론적 케리그마신학, 박사학위 논문을 일본 신도주의에 대한 썼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변증학(apologetics) 내지 선교변증학(Elenchtics)으로서 문화신학적 성찰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근삼은 미국과 화란에서 조직신학과 변증학을 전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의 현대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였고,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일본의 신도주의에 대한 비판논문을 씀으로써 현대신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하였다. 그가 전공한 조직신학과 변증학, 특히 그의 석사학위 및 박사학위논문은 문화신학적 성찰을 동반한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과정은 칼빈주의를 오늘날 현대신학의 흐름 속에서 살아 있는 교회를 지키고 현실에 해답을 주는 변증신학으로 정립하고 오늘날 당면한 현실에 문화변혁적으로 적용시키는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에 많은 지식과 방법을 제공해주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