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과 진실
흔히 사람들은 누구에 대해 ‘그가 진실(truth, 眞實)하다’ 혹은 ‘진실하지 못하다’는 평가들을 쉽게 잘 한다. 그 기준들을 보면 대개 ‘누가 진심(faithfulness, 眞心)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것’이다. 대상을 불문하고 ‘진심’을 다하면 그를 ‘진실한 사람’이라고 한다. ‘진심’과 ‘진실’을 동일시한 결과이다.
사람들이 이단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보이는 것도 ‘진리(眞理)’ 여부는 배제된 채, 그들 신앙의 ‘진심(faithfulness)’에만 매료된 때문이다. 그들 신앙이 핵심에서 비켜났는데도 진심이 깃들었으니 ‘하나님도 가상(嘉尙)히 여길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선 누가 어떤 것에 ‘진심’을 보여도, 그 대상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도 그것을 인정치 아니하신다. ‘그의 진심’이 ‘거짓된 대상’을 ‘진리’로, 그의 ‘진심(眞心)’을 ‘진실(眞實)’로 만들지도 못한다.
웃사가 날뛰는 소(牛) 위에서 떨어지는 법궤를 잡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심’에서 나왔지만, ‘진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 자리서 즉사했다(삼하 6:6-7). ‘신앙적 진심’도 ‘진리’에 기반 하지 않으면 ‘악’일 수 있음을 가르쳐 준 좋은 예다.
그리고 이는 이단자(異端者)들이 그들의 신앙 대상에 아무리 ‘진심’을 기울여도 그것은 ‘진실한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하나님께 가납(嘉納)될 수 없음을 확증시켜 준다. 진심(faithfulness, 眞心)’은 어디까지나 ‘진리(truth)’를 근간으로 해야 한다.
유대인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진심(열심)’을 나타냈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었기에 그 ‘진심’은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 ‘진심’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했고,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됐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진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예수님은 그 자신이 ‘진리(요 14:6)’이시면서도, 그 ‘진리’에 ‘진심(충성)’이셨다. 따라서 ‘그의 진심(충성)’은 ‘진실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이 ‘진리’, ‘진실’, ‘충신(진심)’이심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Faithful, 진심)’과 ‘진실(True)’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이러한 ‘예수님의 진리에 대한 진심(충성)’은 우리의 ‘진실의 표상’이다. 사도 바울의 ‘진리’에 기반한 그의 ‘진심(충성)에서 ‘예수님의 진실하심’을 본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후 13:8).”
‘진리’에 기반 하지 않은 ‘진심(충성)’은 ‘두목에 대한 조폭들의 충성’, ‘잡신에게 바치는 무당의 치성(致誠)’과 다를 바 없다. 바알 제사장들이 제물을 쌓아놓고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뛰놀며, 심지어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까지 하면서 드린 치성도(왕상 18:26-28) 그런 류이다.
이스라엘이 갖다 바친 ‘수많은 제물들’에 대해 하나님이 욕지기를 느끼며, 그것들은 헛되고 가증한 것이니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라고 호통 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제사엔 ‘진리’도 없었을 뿐더러 ‘진심’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진실’도 없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사 1:11-13).”
◈유·무위(有無位)의 진리
앞서 누누이 말했듯 ‘진심(faithfulness, 眞心)도 ‘진리’에 기반해야 한다. ‘신앙’은 더욱 두말할 것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위엔 여전히 ‘진리’보다 ‘진심’을 더 숭상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는 경구를 들먹이며, 무턱대고 ‘진심’을 좇으며 그것을 ‘진실’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진리)가 말하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는 칼빈(John Calvin)의 말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은 무턱대고 ‘진심’과 ‘열심’만을 좇지 않는다. ‘진리 안’에서 ‘해야 할 것(有爲, 유위)’와 ‘안 해야 할 것(無爲, 무위)’을 구분한다.
‘자기 구원’을 위해선 ‘일(works)'이 아닌 ‘믿음(faifh)를 붙든다. 이는 공격자들의 말처럼 그저 먹으려는, 소위 ‘값싼 은혜의 발로’에서도 아닌,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행 16:31)’는 ‘진리를 따름’이다.
성경은 ‘구원을 쟁취하려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수고’도, ‘심판을 피하러 음부의 고행’도 도모하지 말라(롬 10:6-7)’고 했다. ‘구원의 말씀이 네 입과 네 마음에 있으니(롬 10:8)…,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며…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8-10)’고 가르친다.
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선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죽도록 충성(계 2:10)’하려 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하는 것(출 20:7)’은 ‘일하길 싫어하는 게으름의 발로’에서가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진리’에 기반 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만나 규례(출 16:22-23)’에서 나타났듯, 안식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진리’를 신뢰한 결과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구원에 대해 하나님과 거래가 끝났기에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선 더 이상 내게 할 일이 남아있지 않다. 내게 남은 책무가 있다면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맥주를 마시고 밤에 편히 잠자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 곧 그를 신뢰하는 나의 믿음을 증거한다’고 했다.
진리에 기반한 신앙은 ‘열심과 진심’만을 능사로 여기지 않는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선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안하는 무위(無爲, no working)’를, ‘주의 복음을 위해’선 생명을 바치는 ‘진심어린 유위(有位, working)’를 따른다. 그의 ‘유위’도 ‘무위’도 다 ‘진리’를 좇음에서 나온다.
‘진리에 진심’인 것이 ‘진실’이다. ‘진리에 근거한 진심어린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다. 아무리 ‘진심이 담긴 사랑’이라도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이 점에서 ‘진실한 사랑’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뿐이다. 이는 그것을 통해 ‘진리’와 ‘진심’이 성취됐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성령의 사랑(롬 15:30)’은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 자에게서 나온 사랑이었다. 곧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짐에서 나온 ‘진실한 사랑’이었다.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