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사전적 의미는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이를 매우 넓게 적용하면 교회 내에서 다양한 형태로 섬기는 사역자들도 일견 그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 밖의 기관 혹은 사람들이 사역자들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규정해 여타 근로자들과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거나, 혹은 사역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상적 의미의 근로자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고 또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회 법정, 그리고 정부 기관이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판결이나 결정들이 보편적인 선례로 고착화될 경우,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이 무너지고 종교 자유가 침해당할 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의 인사권과 치리권이 무너져 분란과 갈등이 초래될 것으로 심각히 우려된다.
얼마 전 열린 한국교회법학회(대표회장 이정익 목사) 세미나에서도 이로 인해 ‘부교역자의 지위와 역할’을 심층 논의했다. 이 세미나에서 거론된 사건의 경우 법원이 한 교회 담임목사에게 “전도사에게 근로기준법에 따른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전도사가 업무 내용에 예배, 심방 등 종교활동이 포함돼 있더라도 오로지 본인의 신앙에 따라 자율적으로 영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교회가 그에게 매월 고정적 사례금을 지급하고 근로소득세 원천징수를 한 점 등을 들어, 그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된다고 봤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 고용노동부의 소속 기관인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는 최근 한 교회의 부당정직, 부당감봉 및 부당퇴거통보 구제 재심신청 사건에서, 해당 피징계 목사·전도사들을 ‘근로자’로 판단해, 일부 징계처분 등이 부당징계에 해당된다며 이를 취소하고 해당 기간에 정상적으로 근로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 상당액을 지급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최근 당회장 선출에 여러 차례 실패하는 등 내홍을 겪은 이 교회에서는, 일부 목사와 전도사들이 교회의 인사권에 반발하고, 대리회장의 선출과 권한을 불법으로 규정하며 불복했다. 또 일부 목사들은 음주 회식을, 그것도 사순절 기간 중에 하다가 교인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이 정도 사안들에 대해서도 정부 기관과 세상 법정이 개입해 교회로 하여금 치리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이는 엄청난 월권이자 직권남용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들, 특히 성직자들은 당연히 투철한 시민의식과 준법정신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각 종교에는 또한 그들만의 법과 가르침과 기준들이 있다. 국가 지도자들은 속히 이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잘못된 판결과 결정들을 바로잡길 바란다. 교회 지도자들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현명하게 예방적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이러한 세상적 인식들에 일부 사역자들이 잘못된 영향을 받는 것도 문제다. 실제 교회 내에도 일을 하는 이들이 있고 그에 대한 경제적 대가를 주고받는 이들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작은 관점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곧 교회 내에 봉사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거룩한 헌신’에 앞서 ‘임금을 받기 위한 노동’으로 여기게 되고, 담임목사나 당회를 ‘영적 지도자’보다 ‘사용자’라는 관점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노동자’가 근무 환경이 부당하다고 느낄 경우 ‘사용자’를 ‘투쟁 대상’으로 삼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거의 약 20년 전 일부 목사와 교회 직원들이 교회 내 노조를 결성해 큰 논란이 됐으나, 결국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채 점차 사라졌다.
노조란 근로자와 사용자라는 개념을 전제하며, 그것이 교회 내에 스며들면 엄청난 분란과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실제 교회 노조 일각에서는 부목사가 새벽예배나 수요 저녁예배, 금요 기도회 등에 참석하는 데 대해서는 ‘근무 외 수당’을 받아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있었다. 또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원만한 해결책을 찾기보다 시위, 소송, 언론 보도 등의 방법을 앞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고 행동을 하는 이들을 일방적으로 정죄할 순 없다. 혹 교회 내에서 ‘은혜’라는 명분으로 헌신을 ‘강요’하는 일은 없었는지 지도자들도 냉정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
헌신은 자발적일 때 아름다운 것이지, 타인에게 신앙을 명분으로 강요할 때는 심각한 폭력이 된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교회에서 과도한 일, 적은 급여, 낙후된 복지 등의 처우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물론 사역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신앙이어야겠지만,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교회 내에 갈등을 건전하게 조정하고 해결할 창구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그러한 창구가 없거나 부족했기에, 노조 결성이나 사회법 소송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임금이 어떻느니, 노동이 어떻느니, 투쟁을 해야 하느니 따위의 말들은 가급적 교회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덕스럽다. 이를 위해서 서로가 먼저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가 먼저 조금씩 배려해야 한다. 불만이나 균열이 생기기 전에 자발적으로. 분명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말씀을 붙들고 다른 이를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본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