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미야자키 하야오 (3)
성경, 인간의 감성과 지성 모두
활용해 하나님 뜻 알리는 서사
포스트모던 연출법 따라하면서
거대 서사 약화 후 미시 서사만
이런 풍조, 성경 접근에 장애물
고루한 성경교육 고수해선 안 돼
◈포스트모던 연출기법: 다층성과 감성적 자극에 주안점을 둔 포스트모던 연출법
최근 상업영화의 주요 트렌드 가운데 하나는 거대 서사(meta-narrative)를 해체하기 위해 미시적이고 다층적인 하위 내러티브들을 얼기설기 엮어내는 포스트모던 연출 기법이다. 기승전결과 주제의식이 뚜렷한 전통적 픽션 서사와 달리, 포스트모던 연출에 바탕을 두고 구성된 서사는 캐릭터와 장면 간 연결성이 모호하고 복잡다단한 감각적 자극을 선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포스트모던 연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체 줄거리는 어린 시절 미야자키 감독의 삶을 투영한 주인공 마키 마히토의 행적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막상 각 장면에서 극을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마히토가 아니라 마히토와 엮인 주변 인물인 경우가 많다.
이런 연출법은 이 작품에 대한 관객의 호응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일반 관객 입장에서, 특히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된 관객인 어린이 관객들 입장에서 마히토의 관점을 중심으로 일관된 서사를 전달하는 것이 내용을 이해하기 편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요괴, 영물, 인간(그것도 과거와 현재 시점이 뒤섞인 인물상)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와 서사의 중심을 계속 가로채다 보니, 관객이 어느 장단에 맞춰 줄거리를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더해 이 작품의 서사를 구성하는 각각의 미시 서사에 깃든 영상미와 음악효과, 그리고 분위기의 강렬함과 화려함 역시 서사를 파편화하는 데 일조하면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줄거리를 파악하려는 관객들의 기대를 외면한다.
하지만 이는 연출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연출 기법이다.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이 그 사람의 의도대로 자율적으로 진행되기보다는 대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끌려 나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서사전개 방식은 20세기 중후반 이후, 특히 1930년대 실존철학의 학문적·문화적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 시점부터 문학을 포함한 예술계에서 널리 활용되어온 것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런 식의 연출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흥행에 큰 약점으로 작용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는 애초 본 작품의 흥행 성적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 작품은 현존하는 애니메이션계 최대 거장인 미야자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미야자키 감독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채택한 이런 포스트모던 연출기법은 일본 사회에 공존하고 있는 구시대적 전체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 이 양 극단에 걸친 인간관계의 문제를 되짚어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연출법은 사상적 깊이를 담아내는 데는 제격이지만, 관객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성경의 서사 기법: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의 확고한 조화
이처럼 미시 서사를 통해 거대 서사를 해체하면서 감성적 인상을 깊게 남기는 메시지 전달 방식은 오늘날 음악·영화·드라마 등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다만 대중문화 장르별로 활용 방식에 차이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들이 포스트모던 연출법을 상업성·대중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음악 제작자들은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짧은 음원 재생시간 안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연출기법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감각적 예민함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장면 간 서사 부조화를 감성적 조화로 보완해야 하기에 각 장면에 담긴 영상미·음향효과·감흥을 극대화시키는 데 주력하고, 이에 따라 해당 콘텐츠 소비자들로 하여금 감성에 충실한 문화적 경험을 얻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기법에 익숙해진 세대는 미시 서사들 사이의 치밀한 내적 일관성을 확보하면서 거대 서사를 쌓아나가는 전통적인 서사 전개 기법에 갑갑함을 느낀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고전적 서사전개 기법은 절정 단계에 이르기 전 발단, 전개, 위기의 세 단계를 거쳐 서사를 쌓아 나가는데, 포스트모던 연출의 변칙성에 익숙해진 이들은 촘촘하게 짜여진 전통적 서사전개 기법의 빌드업 과정에서 절정 수준의 감성적 자극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
그래서 최근에는 서사 전개의 속도감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흥행의 필수 조건 중 하나로 지목된다. 서사의 내부적 연관성이나 개연성이 좀 부족하더라도 각 장면에서 고강도의 감성적 자극이 빠른 속도로 연달아 이어지면, 독자, 관객 혹은 시청자들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해당 콘텐츠를 계속 소비하게 된다.
성경은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 양측이 서로 확고한 조화를 이루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성서 기자 각각의, 그리고 그들이 기록한 경험들 각각의 미시서사들은 좁게 본다면 서로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부분적으로 포스트모던 서사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각각의 미시서사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거대한 뜻과 섭리를 촘촘하게 채워나가는 전통적 거대서사의 특성 또한 발견된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감성과 지성 양측 모두를 통해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알리는 서사의 힘을 갖추고 있다. 즉 성경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성경 속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 양측을 조화롭게 수용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런데 최근 대중문화 미디어 동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던 연출법의 영향력이 점차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는 거대 서사에 대한 이해력이 전반적으로 약해져, 자칫 성경을 읽을 때도 파편화된 미시 서사에만 집중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실제로 최근 한국교회의 설교나 신학적 견해들을 살펴보면 이런 문제점이 자주 목격된다. 성서의 일부 미시 서사만을 근거로 들어 보편구원론에 가까운 견해를 제시하거나, 자율적인 성적 정체성과 성적 결정권을 옹호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성서 전체의 거대 서사를 무시한 채 자의적으로 미시 서사가 주는 국소적 교훈만을 절대화하는 식으로 사견을 정당화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 미시 서사를 촘촘하고 치밀하게 연결해 거대 서사와 조화를 이루게 하는 전통적인 서사의 문법 대신, 미시 서사를 군집 형식으로 모아놓고 감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여러 효과들로 빈틈을 채우는 새로운 서사전개 방식이 대중문화계의 대세로 굳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이 애니메이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대중문화 속에서 확인되는 사고방식 전환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현 시대 문화풍조가 경험과 교훈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 일관성보다는 잡다함과 다층성을 중시하고, 합리성 확보보다는 감성적 자극과 만족 제공에 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 포스트모던 연출방식을 통해 확인된다. 이런 풍조는 오늘날 젊은 세대가 성경의 가르침에 익숙해지는데 하나의 큰 문화적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최근 설교학에서는 내러티브 설교 기법이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 설교 기법은 그 자체가 미시 서사를 중시하는 포스트모던 서사 전개법의 변형태로, 성경 전체에 걸쳐 계시된 하나님의 큰 뜻을 조망하게 하는 데는 효과적이지 않다.
게다가 미시 서사 전달방식이라는 측면에서 탁월한 영상미와 음향효과 등으로 고품격 감성적 만족을 제공하는 대중문화 콘텐츠에 비해 흡인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경험과 교훈, 메시지를 전달하는 서사의 법칙이 크게 변화된 현재, 교회는 신자들이 성경을 끈기 있게 읽어 나가면서 하나님의 뜻의 전체 범위를 조망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훈련시키는 데 이전보다 훨씬 큰 힘을 들여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됐다. 한국교회가 여기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지 않고 계속 고루한 방식의 성경교육 체계에만 의존한다면, 성경교육과 복음화는 큰 퇴보를 보일지도 모른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