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서울의 봄> (4)
발해 멸망 후 한반도 세계관 국한
민족 외부와 전 세계 영향 도외시
결국, 일제에 국권 무력하게 뺏겨
이승만·박정희, 국제 정치 활용해
김재규·정승화·장태완, 한계 보여
역사의식 편협, 망각보다 더 위험
박욱주 박사님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최근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에 대해 분석합니다. <아수라>의 김성수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황정민(전두광), 정우성(이태신), 이성민(정상호), 박해준(노태건), 김성균(김준엽), 김의성(국방장관), 정동환(최한규), 안내상(한영구), 정해인(오진호) 등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12.12 군사 반란을 극화했습니다. -편집자 주
◈편협한 민족의식: 고립된 지정학적 정세 속에 탄생한 한민족의 정체성
현재 국내 극장가 상황을 보자면, <노량: 죽음의 바다>가 누적관객 400만을 목전에 두고 흥행세가 주춤한 데 비해 <서울의 봄>은 누적관객 1,200만을 돌파하며 흥행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서울의 봄>이 <노량: 죽음의 바다>보다 더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연출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한일 간 외교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인 데다 양국 간 민간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면서, 더 이상 ‘반일’ 코드가 영화의 흥행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하게 된 점이다.
<서울의 봄>과 <노량: 죽음의 바다> 이 두 작품 모두는 기본적으로 진보좌파 진영의 역사관을 대변한다. <서울의 봄>이 군사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주력한다면, <노량: 죽음의 바다>는 한국과 일본의 오래된 군사적 긴장관계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진보좌파 진영의 근현대사 인식을 떠받치는 두 기둥인 반일자주와 민주화(정확히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화)의 열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진보진영 역사관을 대표하는 격언이 하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긴 말로 알고 있지만, 실상 이 격언은 출처가 불분명한 일종의 속담 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저명한 항일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의 격언으로 인식되면서 진보진영에서 반일, 반파쇼 정신을 고취시키는 말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모든 격언이 그렇듯, 이 말은 여러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역사’라는 말에 담긴 뜻이 워낙 함축적이어서, 사람마다 이 격언을 이해하는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나 <노량: 죽음의 바다>가 보여주는 ‘한민족 역사’란 일본 군국주의 세력과 국내 군사독재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과 투쟁이다. 그런데 이 역사관은 다소 편협한 민족의식을 대전제로 삼는다는 약점이 있다.
한민족 세계관은 926년 발해 멸망 후 약 1천 년 넘도록 한반도에 국한돼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서쪽으로는 당대 최강대국인 중국이 자리잡았고, 북쪽으로는 호전적인 유목 부족과 시베리아의 험난한 자연환경이 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남쪽·동쪽은 바다와 일본 열도로 막혀 있었다. 이에 남북국 시대 종료 이후 한반도에 들어선 두 왕조, 고려와 조선은 주변국에 비해 상당히 폐쇄적이고 고립된 정치체제와 문화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정치적·문화적 폐쇄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한국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험난한 제국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제강점기를 통해 와해될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미국의 패권에 도전한 군국주의 일본의 자충수 덕에 가까스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부침과 질곡 가운데 한국인들은 외세 침략에서 비교적 안전하던 시절, 지정학적으로 거의 고립되다시피 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복고적 역사관을 구축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사적 격변과 민족 외부 영향을 도외시하는 전근대적이고 폐쇄적인 역사관을 확립하게 됐다. 일례로, 북한이 내세우고 국내 진보진영이 호응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어는 한민족의 역사관과 민족의식을 지배하는 폐쇄성을 가장 잘 내보이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넓게 열린 국제정세 인식: 거시적 정세를 이용할 줄 아는 정치적 지혜
한국 근현대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에 갇힌 폐쇄적이고 편협한 민족의식과 역사관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미친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갑신정변에서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 조선 왕실과 대다수 엘리트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허술한 외교적 안목과 내부 정권다툼 끝에 국권을 일제에게 무력하게 빼앗기고 말았다.
1919년 3·1운동을 돌아보면, 비록 그 동기는 숭고했지만 저항 방식과 전략은 미숙했다. 무엇보다 민족자결주의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답답할 정도로 무지했던 탓에, 무모하고 비극적인 궐기로 귀결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에 유리한 국제질서 확립을 위해 패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해체를 위해 내건 공약을, 마치 모든 식민지 해방의 메시지인 양 잘못 받아들인 어리숙함이 실패의 주 요인이었다. 한민족 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이 낳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독립운동 역시, 뜻은 높았지만 그 결실은 보잘것없었다. 그나마 일정한 결실을 맺은 인물이 있다면, 태평양 전쟁과 그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해방 후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민족 자주라는 비현실적 이념에 매몰돼 있던 사이,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동맹과 미국 기독교계의 후원에 힘입어 한반도 남쪽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자리잡도록 힘쓰고 산업화 초기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그가 한반도 내부에만 갇힌 편협하고 전근대적인 민족의식과 역사관을 벗어나,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정치와 지정학적 식견을 가졌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한민족 중심의 세계관에 갇힌 인물은 아니었다. 친일 성향이 뚜렷해 자주 비판을 받았고 임기 말년에 판단력이 크게 흐려지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박 전 대통령도 나름 탁월한 국제정치적 식견을 갖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냉전의 엄혹한 현실에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반공 기조와 산업화 조류에 편승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또 한미동맹 강화와 국가의 경제적 성장을 위해 베트남전 참전이 반드시 필요함을 알고 있었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력을 이용해야 산업화의 결실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는 외세 개입을 죄악시하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옹호하던 인사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안목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묘사하는, 10·26 사태에서 12·12 군사반란, 나아가 5·18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 또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좁은 민족 자주이념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당시 국제정세에 부합하는 자유 개념에 입각해 보는 시각이 서로 충돌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10·26 사태로 인한 독재자의 사망과 커다란 권력 공백은 대한민국 내부적으로만 본다면 독재에 지친 국민들이 바라는 새로운 권력구조 정립 기회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정황은 어설프고 실험적인 한국형 민주주의로는 극복할 수 없는 중대한 위협들이 산적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을 포함한 세계 각국 독재정권을 껄끄럽게 여겼던 카터 행정부는 계속되는 실정으로 국정 장악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북한은 돌발상황으로 인한 대한민국 내부 혼란의 격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 국무부와 CIA는 대한민국 내부의 긴급한 정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조속하게 혼란을 가라앉히고 북한에 의한 안보위협을 불식시킬 인물을 찾고 있었고, 10·26 사태 수사를 총지휘하면서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행보를 묵인하면서 그를 잠정적인 차기 권력자로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당시 미국의 외교 및 정보담당 요인들과 전 세계 자유민주진영 외교 담당자들이 보기에, 암살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려 했던 김재규와 그 김재규를 비호하던 정승화·장태완 등이 당시 공산주의 진영의 이념적·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로 여겨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야권에서 정권을 노리던 김대중·김영삼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 또한 그 커다란 권력 공백과 군부 내의 혼란을 해결할 만한 역량을 갖지 못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속>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