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서울의 봄> (5)
韓 5.18과 비슷했던 中 천안문 항쟁
공산 정권 유지로 기억에서 사라져
세계 냉전 종식, 韓 군부 독재 마감
우리 힘만으로 민주화 이루지 못해
<서울의 봄>, 편협·국수주의 시각
광주 희생, 특정 세력 출세 방편 돼
박욱주 박사님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최근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에 대해 분석합니다. <아수라>의 김성수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황정민(전두광), 정우성(이태신), 이성민(정상호), 박해준(노태건), 김성균(김준엽), 김의성(국방장관), 정동환(최한규), 안내상(한영구), 정해인(오진호) 등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12.12 군사 반란을 극화했습니다. -편집자 주
◈민주화 투쟁의 명암: 5·18 민주화운동 성패에 대한 잘못된 역사인식
영화 <서울의 봄>이 전두환 보안사령관 일파를 극악한 범죄집단으로 그려내는 결정적 요인은 사실 12·12 군사반란 자체보다는 약 6개월 뒤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일 것이다.
이때 전두환 일파는 광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을 저질렀다. 광주에서의 폭력은 어떠한 관점으로도 변호할 수 없는 악독한 범죄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자가 민간인을 상대로 군을 움직여 학살을 저지르도록 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폭거였다.
12·12 군사반란은 비극으로 귀결된 5·18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따라서 광주에서의 비극에 희생당한 이들에게 동정적인 입장에서는 12·12 군사반란이 악의 씨앗이 심긴 사건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고, 그런 맥락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정승화-장태완 일파를 참 군인으로까지 묘사하면서까지 전두환 일파를 악의 축으로 몰아가는 태도가 심정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광주의 일이 남긴 깊은 심리적 상흔이 우리 정치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왜곡된 인식을 낳은 데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통상 5·18 민주화운동을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중의 정치적 투쟁과 승리로 치장하곤 한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국가 외부의 국제정치적 요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일 1980년대 말 공산권 붕괴라는 세계사적 대변혁이 없었다면,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슬그머니 은폐된 비극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렇게 예측해볼 수 있는 이유는, 비등한 예가 바로 인접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1989년 발생한 중국 천안문 6·4 항쟁은 여러 측면에서 5·18 민주화운동과 유사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중국 사회는 덩샤오핑의 자유시장경제 도입을 통해 급격한 경제 성장과 도시화, 그리고 국민 교육수준의 향상을 경험했다. 여기에 더해 베를린 장벽 철거와 소련 내부의 혼란을 필두로 전 세계 공산주의 체제 붕괴가 가속화되자, 중국에서도 공산당 일당독재의 철폐를 바라는 이들이 급증했다.
이에 중국의 대학생과 지식인, 대도시 화이트칼라 노동자 계층이 힘을 합쳐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개시했다. 하지만 이 사태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대응은 5·18 민주화운동 이상으로 무자비하고 폭력적이었다. 시위대와 진압군을 합쳐 사망자가 최소 1,000명 이상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수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타국으로 망명했다.
한국과 달리 중국의 독재정권은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며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 독재정권은 중국인들로부터 천안문 사태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데 성공했다.
중국 공산당의 강력한 정보통제가 30년 넘게 지속된 결과, 이제 중국 내부에서는 당시 직접 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천안문 사태의 실상을 파악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화 투쟁의 성패: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한 5·18 민주화운동 칭송
한국은 중국과 경우가 많이 달랐다. 우선 외부의 군사독재 정권들을 인정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과 강력한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미국에 종속되다시피 할 만큼 깊게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처럼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언제까지나 묵살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든 전두환 정권이든 미국을 리더로 삼는 전 세계 자유민주 진영의 인정과 지원 없이는 자생할 수 없었고, 따라서 어느 순간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보다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미국은 카터 행정부의 연이은 실정으로 인해 한국 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1981년부터 8년 동안 미국 행정부 수반을 맡은 레이건 대통령은 1970년대의 데탕트를 아예 허물어버릴 정도로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에게 있어 대한민국의 가장 시급한 역할은 자체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소련·중공에 맞서 일본과 태평양의 군사적·사상적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낙점된 덕분에 쿠데타를 통한 군사독재를 감행했어도, 그리고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지시했어도 별 탈 없이 7년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후반 소련 체제가 큰 위기를 맞이하고 냉전이 끝나려는 기미가 보이면서, 그동안 미국의 묵인 아래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세계 각국 군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힘을 잃고 문민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는 수순을 거치게 되었다. 공산권 붕괴는 곧, 냉전 당시 시급하게 요구되었던 반공의 기조를 더 이상 유지할 명분이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동안 반공, 반사회주의 기치 아래 유지되었던 여러 군사독재 정권들은 더 이상 미국의 암묵적 승인이나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덕분에 이 시기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 하에 있던 남미 여러 군사독재 국가들(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등)에서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간으로 권력이 이양되었다.
한국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군사독재 정권이 명분과 국정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런 거시적 정황은 국내에서 1980년대 내내 이어져온 대학가의 민주화요구 시위가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그 결과 6·29 민주화선언이 공표되고 직선투표를 통한 대통령 선출이 이뤄졌으며, 5공 청문회가 성사되어 5·18 민주화운동이 다시 재조명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미국을 수장으로 삼는 자유민주 진영의 냉전 승리가, 천안문 6·4 항쟁처럼 완전히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묻혀버릴 지도 몰랐을 5·18 민주화운동을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되살려냈다.
그렇지만 통상 국내 언론과 미디어에서 그토록 우리 민족의 자체적 민주화 열망이 이뤄낸 쾌거라며 칭송하는 5·18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 모두, 실은 거시적 국제정세의 격변이 아니었으면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이는 1945년의 8·15 해방이 결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 일이 아니고, 덕분에 역사 속에 완전히 묻혀 버렸던 3·1 독립운동과 그 외 여러 독립을 위한 몸부림들이 재조명될 수 있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민족 자존심을 살리려 이런 저런 역사적 성과들을 다 우리 민족 스스로 성취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엄밀하게 바라본 우리 현대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상적·문화적·경제적·정치적 진보 상당 부분이 외세에 의존하면서 국제정세에 이리저리 편승해 이루어진 일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화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역사적 진보가 전부 순수하게 우리 사회 내부에서 우리 민중에 의해 일어난 일인 것처럼 여기는 편협하고 국수주의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우리는 12·12 군사반란과 그로 인해 촉발된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을 자체적으로 방지하고 우리 나름의 민주주의를 일궈나갈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나, 전두환 일파와 같은 ‘악질적이고 반민족적인’ 이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신념이 영화 전반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시각으로 본다면 대한민국에서 문민 민주정권 수립은 1980년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아직 시기상조였고,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직후 대한민국 통치구조는 그 이전 2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군부독재의 그림자를 떨쳐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라 전체가 군부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 민간 정치지도자들이 문민 통제를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상존하던 북한의 남침 위협과 한미동맹 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부 내에서 누군가 나라를 안정시킬 역할을 맡아야 했다.
결국 12·12 군사반란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쌓아올린 군부독재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 군 내부 파벌들이 일으킨 권력다툼이 그 핵심이다. 그리고 전두환 일파나 김재규-정승화 일파 모두 군내 파벌의 영달을 위해 수도 서울의 안전과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였기에, 양측 다 정치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어느 편이 나라의 안정에 더 기여할 수 있을지,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을 더 잘 막아낼 수 있을지가 당시 우리 국민들과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에게 관건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12·12 군사반란은 영화 <서울의 봄>이 잘못 그려낸 것처럼 독재자와 군내 민주화 세력의 다툼이 아니었다. <서울의 봄>이 이런 식으로 사태를 왜곡해서 보여주는 것은 5·18 민주화운동을 어떻게든 숭고하고 유의미한 항쟁이자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으려는 진보좌파 성향의 강성 민족주의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3·1 독립운동과 마찬가지로 뜻은 숭고했으나 방법과 시기가 지혜롭지 못했기에, 비극과 실패로 마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운 좋게 세계정세의 흐름에 맞아들면서 성과를 거둔 1987년 6월 항쟁의 주동자들이 이 5·18 민주화운동을 기득권층에 녹아들기 위한 팻감으로 활용해 왔다. 광주의 안타까운 희생이 종래에는 특정 세력이 출세하고 영달을 누리는 방편으로 이용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정부와 국회, 그리고 사회 지도부 전반에 포진하고 있는 당대 민주화 항쟁 참여자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가능한 한 최대로 미화하고 칭송하는 데 힘쓴다. 그렇게 할수록 이들이 기득권층에 편입돼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각종 편익과 혜택을 누리는 정당성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이런 진보진영 기득권층의 구미에 맞는 방식으로 역사를 편집, 왜곡해 보여주고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