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만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승만… 역사 바로 세워”

송경호 기자  7twins@naver.com   |  

샬롬나비, 환영 논평 발표

그간 중복 선정에 공산 성향 운동가도
사회주의 동경, 왜곡된 인식 드러내와
무려 464번째에… 만시지탄이나 환영
탁월한 독립운동가, 국부로 추대하고
공적과 과오 미화 없이 그대로 전해야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오른쪽)이 26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24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패 수여식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 등 후손들에게 선정패를 전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오른쪽)이 26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24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패 수여식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 등 후손들에게 선정패를 전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국가보훈부가 1992년부터 매년 선정해 왔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32년 만에 선정된 것에 대해,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이 “만시지탄(晩時之歎) 감이 없지 않으나,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정부의 노력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2023년을 마무리하며 12월 25일, 이 전 대통령을 2024년 한 해 동안 국민이 기억할 독립운동가 38중 한명으로 선정하고, ‘1월의 독립운동가’로 단독 선정했다.

이에 샬롬나비는 “지난 32년 동안 총 463명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다. 그동안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반복 선정되었고 심지어 공산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선정되어 왔음에도, 우리나라의 독립과 건국에 가장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자,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물론 1919년 임시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을 무려 464번째에야 정부가 독립운동가로 공식 선정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제라도 정부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 공적을 올바로 인정하고 마땅히 기리게 된 것에 대해 만시지탄(晩時之歎)감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께 깊이 감사한다”며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정부의 노력을 환영하며, 나아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 공적을 재정립하고, 한국교회가 이승만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업적을 성도들에게 적극 알릴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샬롬나비는 이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공적으로 “청년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근대 정치사상을 배웠고, 한성감옥에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 수많은 동료 독립운동가들을 전도하여 가르쳤으며, 국민 계몽서인 <독립정신>을 저술했다”고 했다.

이어 “5년 7개월의 미국 유학시기 동안 청년 이승만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무려 200회 이상의 강연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렸다”, “1912년부터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한인 독립역량 강화와 실력양상운동에 힘쓰며 한국의 독립과 새 나라의 건국을 구상했다”고 전했다.

또 “1919년 3‧1운동 이후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로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친한파 미국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1941년 태평양에서의 미일 충돌을 예견하며 한국의 독립을 준비했다”고 했다.

한국교회를 향해선 “감리교 장로요 일평생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이승만을 탁월한 독립운동가요 국가의 건국 지도자로 모셔야 한다. 더 나아가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추대해야 할 것”이라며 “그가 말년에 경륜이 부족한 측근들의 권력욕으로 인해 독재의 비난을 받고 물러난 불행한 행적까지 미화 없이 남겨준 모습 그대로 후대에 교훈을 받도록 지속적인 홍보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

이승만은 일생동안 국민계몽과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이승만은 한일병합에서부터 해방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일관되게 독립운동을 했다.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국가보훈부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2024년 한 해 동안 국민이 기억할 독립운동가 38중 한명으로 선정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특별히 올해 ‘1월의 독립운동가’로 단독 선정되었다.

1992년부터 매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 발표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그 공적을 기려온 국가보훈부는 지난 32년 동안 총 463명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정되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반복 선정되었고 심지어 공산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선정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건국에 가장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자,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물론 1919년 임시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을 무려 464번째에야 정부가 독립운동가로 공식 선정한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를 동경하여 대한민국의 탄생을 아쉬워하는 이념 편향적인 운동가들이 그동안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여 잘못된 인식을 우리 사회에 심어놓았는지 잘 드러나는 단면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정부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 공적을 올바로 인정하고 마땅히 기리게 된 것에 대해 만시지탄(晩時之歎)감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께 깊이 감사한다. 이에 샬롬나비는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정부의 노력을 환영하며, 나아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 공적을 재정립하고, 한국교회가 이승만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업적을 성도들에게 적극 알릴 것을 제안한다.

1. 청년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근대 정치사상을 배웠고, 한성감옥에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 수많은 동료 독립운동가들을 전도하여 가르쳤으며, 국민 계몽서인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895년 4월, 만 20세가 된 청년 이승만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학인 배재학당에 입학해 자유와 평등 등 근대 정치사상을 배웠다. 특히 이듬해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한 서재필을 만나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한 동지들과 함께 ‘협성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이 호버 헐버트 선교사의 도움으로 창간한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영자 신문인 <독립신문>에서 주요 필진으로 활약하였다. 1897년 이승만은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뽑혀 ‘조선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유창하게 영어연설을 하여 많은 외국인들을 놀라게 하고 전도유망한 미래 지도자로 낙점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계속해서 서재필 등의 개혁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여 1898년 3월 처음 열린 만민공동회 집회에서 연설하였고, 4월에는 <매일신문> 창간에 함께하여 편집과 논설을 맡았다. 그리고 11월 고종의 독립협회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이듬해 1월 고종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온갖 고문으로 인해 감옥에서 죽을 고비를 맞은 이승만은 나라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처음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함께 투옥되었던 동료 독립운동가들을 전도하였으며, 더 나아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감옥에서 학교와 도서관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감옥에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청일전기> 집필했으며, <제국신문> 및 <신학월보>에 기고하는 등 활발한 ‘옥중 국민계몽운동’을 펼쳤다. 무엇보다 올바른 근대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선제적 필수조건으로써 국민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독립’하도록 하는 기독교로의 교화를 주창한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2. 5년 7개월의 미국 유학시기 동안 청년 이승만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무려 200회 이상의 강연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렸다.

청년 이승만은 1904년 12월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들고 미국 워싱턴 D.C.에 도착하였다. 1905년 2월 조지워싱턴 대학에 3학년으로 편입학하며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8월에는 하와이에서 온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1882년 조인된 조미수호조약을 근거로 한국 독립을 위한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1907년 조지워싱턴 대학 졸업 후에는 하버드 대학 석사과정과 프린스턴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단 3년 만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하였다.

그런데 최근 밝혀진 놀라운 사실은 이승만이 초단기간 동안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이수(履修)하는 와중에 미 동부와 중부 지역까지 수많은 교회와 단체를 순회하며 무려 200여회 이상의 강연을 했다는 사실이다. 한 달에 13번꼴이다. 지역도 최소 10개 주 36개 지역을 다녔다. 이승만은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이 강연들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 침략을 고발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강력히 호소했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민간 공공외교이자 독립외교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대중강연을 통해 학비와 생활비도 충당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1906년 여름 매사추세츠 주에서 열린 만국기독학도공회와 1908년 3월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 1910년 5월 세계주일학교대회 등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에서도 한국인들을 위한 계몽운동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서는 의장으로 활약하며 국민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저술·번역·출판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3. 1912년부터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한인 독립역량 강화와 실력양상운동에 힘쓰며 한국의 독립과 새 나라의 건국을 구상했다.

이승만은 1910년 한국에 귀국했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2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피신하였다. 1912년 6월 프린스턴 대학 은사이자 대선 캠페인 중이던 뉴저지 주지사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윌슨의 도움을 받아 미 동부 대도시를 순회하며 다시 한 번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당위성 알리는 강연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은 그러다가 1913년 2월부터는 한국과 미국의 경유지인 하와이 호놀루루에 정착해 본격적인 한인 독립역량 강화와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와이에서 그는 일제의 한국교회 탄압의 이유가 바로 기독교 교회의 자유‧평등사상 배양에 있음을 역설한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했다. 그리고 한인들의 독립의식과 국제정세 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한글 월간지인 <태평양잡지>를 발간했다. 또한 이승만은 한인들의 독립역량 강화를 위해 무엇보다 자립자족을 중시했다. 하와이 감리교가 세운 한인기숙학교 교장을 맡아 점차 미국인의 지원으로부터 독립시켜 1918년에 남녀공학제의 한인기독학원으로 확대하였다. 또한 하와이 감리교 산하의 한인감리교회도 독립시켜 독자적 자립교단인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다.

4. 1919년 3‧1운동 이후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로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친한파 미국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1941년 태평양에서의 미일 충돌을 예견하며 한국의 독립을 준비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수립된 임시정부 여러 곳은 대부분 이승만을 새 나라의 지도자로 추대했다. 미국에 있었던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14일에서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여 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천명하고 지지를 요청했다. 그리고 회의 결의안을 통해 미국을 모델로 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민주정 수립을 원한다는 ‘건국의 대강’을 발표하였다. 이어 미국과 파리강화회의 그리고 일본 천황(天皇)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지했다. 8월에는 한성입시정부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공식적인 독립외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승만은 이후 계속해서 구미위원부를 통해 미국 정부와 여론 또는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열망을 전하고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활동을 펼쳤다. 또한 외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친우회를 미국 중·동부와 서유럽에까지 설치하여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등의 친한파 인사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 한국을 지지하는 세력을 확보했다. 이 외에도 <한국평론>과 <자유한국>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 서적 및 팸플릿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32년에는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에서 한국독립을 탄원할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어 제네바에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세계 주요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청원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일본군국주의의 ‘전쟁심리’ 분석을 통해 일제가 미국을 침공할 것을 예견한 <일본내막기>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1941년 실제로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 발발함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 등을 결성하였다. 미국 정계와 여론을 대상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로비활동을 전개했으며, 미국의소리(VOA)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세계 한인들을 독려했다, 1945년 4월에는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했다.

위와 같이 20세 청년 때부터 1945년 해방을 맞는 70세 노인이 될 때까지, 꼬박 반세기동안 이승만이 이루어 낸 국민 계몽과 독립역량 강화, 그리고 실력양성과 독립외교의 위대한 독립운동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방대하고 전방위적이며 치밀하고 정교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준비하고 세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5.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요 일평생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이승만을 탁월한 독립운동가요 국가의 건국 지도자요 국부(國父)로 모셔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대통령을 선정한 정부의 노력에 발맞춰, 이승만의 독립외교 업적을 성도들에게 올바로 널리 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요 일평생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이승만을 탁월한 독립운동가요 국가의 건국 지도자로 모셔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추대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가 말년에 경륜이 부족한 측근들의 권력욕으로 인해 독재의 비난을 받고 물러난 불행한 행적까지 미화 없이 남겨준 모습 그대로 후대에 교훈을 받도록 지속적인 홍보를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개봉되는 두 편의 이승만 관련 다큐멘터리, <건국전쟁>과 <이승만의 독립외교 33년>을 교회에서 상영하거나 전교인이 함께 관람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대한민국 역사 바로 세우기에 적극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2024년 1월 29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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