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게 상처받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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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북뉴스 칼럼] 다시 자기 자리 찾아가기 위해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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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좋은 목사도 상처를 준다(딤전 3장 기준에 따라 기도로 세운 목사의 경우도). 때로는 성도를 권면하고 경책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말의 실수’가 생기고, 지옥 불처럼 사르는 불의의 혀로 인해 듣는 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길 때도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라고 경고하지 않았는가(약 3:1)?

아직 성화 되지 않은 인격과 태도의 문제, 생각의 차이 등으로 목사 개인적으로 성도(들)을 실족하게 할 수 있고, 초대 교회 헬라파 과부 구제가 실수로 누락되어 원망이 생겼던 것처럼(행 6장), 복잡하고 다양한 교회 사역과 그 사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의 부재, 미흡한 결정과 선택 등으로 성도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필자도 목회하는 사람으로서 크고 작은 상처를 분명히 주었을 것이고, 알고 있는 실수와 잘못은 용서를 빌었지만 알지 못하는 일에 관해서는 이 칼럼을 통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주 안에서 은혜롭게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목사에게 받은 상처가 상식 밖의 일이라면 어떨까? 가령 폭행, 폭언, 사기, 갈취, 압제 등의 범죄 대상이 되었다면? 안타깝게도 이런 문제는 가상의 시나리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이다. 필자는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을 것을 제안한다.

첫째, 범죄한 목사를 은혜로 바로잡아야 한다

성경은 용서를 강조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무한한 은혜와 끝없는 용납이다. 하지만 복음의 정수는 우리의 죄과에 대한 대가를 조금도 치르지 않고 간과하는 불의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김없이 단번에 영원히 치르신 하나님의 의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범죄를 다룰 때도 무턱대고 ‘은혜(?)’로 덮으려 하면 안 된다. 영혼의 의사이자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은혜로 그냥 덮어버리는 무책임한 분이 아니시다. 은혜로운 손길로 모든 문제를 다루고, 죄의 결과를 책임지게 하시고,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교회는 이처럼 주님의 방식대로 범죄한 목사를 다뤄야 한다.

먼저 범죄한 목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되, 그가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기록된 목사의 자격에 더 이상 미치지 못한 자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목사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딤전 3:2).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딤전 3:4),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딤전 3:7), 그러니까 교회 안팎에서 손가락질하고 수군수군댈 만한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나아가 가족과 이웃에게 존경을 받는(적어도 인격적이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기준에서 심각하게 멀어진 목사는 이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스스로 죄를 자백하고 물러나는 것이 맞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가(다른 리더나 성도들이) 고발하여 그렇게 치리하는 것이 옳다.

물론 목사의 죄에 대한 고발을 함부로 할 수 있게 하면 오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두세 증인 없으면 받지 말라”고 권면한 것이다(딤전 5:19). 하지만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세 증인이 장로 또는 목사의 죄를 입증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한 문제의 경우, 언제든지 고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목사/장로를 포함한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했다(딤전 5:20). 목사와 성도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방침인가? 그렇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말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딤전 5:21).

어떤 면에서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부패해 세상의 질타를 받는 이유는 이 성경적인 원칙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행을 저지른 목사가 아무런 징계 없이 목회 활동을 지속하고, 폭행과 폭언, 가스라이팅의 주범이 된 목사도 이 교회를 떠나 저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말을 듣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고, 이 과정에서 상처 입은 성도는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 빠져 2차, 3차 가해를 지속적으로 받는다.

은혜는 반드시 죄를 다룬다. 죄 용서를 구하는 자백은 죄를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회개하는 자에게 십자가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처럼, 범죄한 목사가 진심으로 자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분명히 그를 용서하고 회복하실 것이다. 물론 그 회복이 목회로의 회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요즘엔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권징의 원칙 자체를 실행하지 않는 교회가 너무 많다. 교회는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죄가 만연하다. 목사의 죄도 다루지 않으니 목사가 성도의 죄를 다룰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런 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아니라 방종이 넘치는 교회다.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라 싸구려 복음을 가진 교회다. 말씀 앞에 순종하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을 무시하는 교회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께서 가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경고하신 심각한 상태에 빠진 것이다(계 2:5).

둘째, 상처받은 성도를 은혜로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잡다’라는 말을 상처 입은 사람에게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상처 입은 먹잇감을 맹수가 가장 먼저 노리듯, 상처받은 성도는 쉽게 사탄의 목표물이 된다.

치우친 생각, 건강하지 못한 정서, 말씀에 민감하기보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더욱 민감한 상태,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시기보다 자기 자신이 중심에 있고, 내부에서 쏟아지는 소리가 너무 많아 외부로부터 전달되는 메시지가(권면, 격려, 위로, 종종 설교 말씀까지도) 거의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그렇게 고립된 영혼은 울부짖는 사자, 마귀가 덮쳐 한입에 삼키기 딱 좋은 제물이다.

‘당신이 내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기나 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런 권면은 들을 만한 당신에게나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겠지’, ‘계속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고통스러운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상처 입은 성도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때로는 상대적으로 아주 심각해 보이지 않는 일을 겪은 성도들도 자신이 체감하는 고통이 크기 때문에 이렇게 울부짖는다. 그리고 누가 봐도 도저히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일을 겪은 이들이 이렇게 토로할 땐,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답을 찾기 힘들 때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따르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크기를 헤아려 볼 때, 문제는 결국 항상 단순한 저울 게임과 같다. 한쪽엔 상처받은 우리가 다른 한쪽엔 상처 입은 치유자가 올라가신다. 누구의 상처가 더 말도 안 되게 크고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치욕적이고 심각한가? 거의 비슷하다고 보거나 자신의 상처가 더 크다고 보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을 우리는 은혜로 바로 잡아야 한다.

사실은 그리스도의 상처가 훨씬 더 크고 더 깊고 더 고통스러우며 더 치욕적이고 억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때까지. 저울 한쪽이 밑바닥에 닿아 ‘쿵’ 소리를 낼 때, 우리는 상처의 격차가 곧 은혜의 크기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야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은혜를 진심으로 노래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상처 입은 성도는 상처 준 목사를 생각하며 계속해서 분노하고 상처를 떠올리며 아파하고, 감사보다 불평을, 노래보다 원망을 쏟아낼 수 있다. 은혜로 바로잡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귀는 정확히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시시비비를 온전히 맡기고,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한다. 나의 상처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통해 나에게 헤아릴 수도 없이 크고 깊고 넓고 높은 사랑을 지금도 부어주시고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 무한하고 영원한 은혜에 압도되어 상처를 잊고 감사와 찬양을 전심으로 그분께 돌려드릴 수 있도록.

성도여, 우린 그런 삶을 위해 구원받았고, 영원히 예배하는 삶을 위한 천국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상처 준 목자 때문에 방황하지 말고, 이제 당신을 위해 상처 입으신 은혜가 풍성한 목자에게 돌아오라.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유평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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