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의 ‘故 김명혁 목사 추모사’
故 김명혁 박사님.
지금 달려갈 길 다 마치시고, 설교하러 가시는 길에서 순식간에 주님 품 안에 안기어 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너무 순식간에 우리 곁을 떠나셔서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네요.
18일 주일 오전 평소와 같이 춘천의 한 교회 예배 설교를 위해 가다 교통사고로 별세하셨네요. 86세의 삶을 마감하시기까지 전국 변두리 지역까지 손수 차를 운전하다 고령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소천하시어 후배들에게 선교적 순교로 삶을 마감하신 숭고한 자취를 남겨 주셨습니다. 애도(哀悼)보다는 남겨주신 아름다운 자취가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목사님께서 항상 신앙 간증을 하실 때 목회자의 아들로서 북한 공산당에 의하여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방문하시고 남한에 가서 자유로운 신앙생활과 성수주일을 하겠다는 허락을 받고, 11살 어린 나이에 뒤쫓는 공산군들의 추격을 간신히 뒤로하고 38선을 넘어 서울 이모 댁에서 철든 어린이로서 신앙생활을 하신 생생한 삶을 매우 감명 깊게 듣고 또 듣곤 했습니다.
서울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성봉·김치선 목사의 부흥회에 여러 번 참석하시어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에 대해 안수 축복기도를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1. 강변교회를 창립하시고 박윤선 박사를 도와 합동신학교 창립에 기여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찍이 순교자 부친의 신앙을 따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셨습니다. 대학 가는 전공을 선택할 때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역사를 공부하라는 조언을 받고, 미국에서 10년 넘게 역사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특히 아퀴나스 신학원에서 어거스틴을 연구해 신학박사를 받으셨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후암교회 교육목사로 초빙받은 목사님은 조동진 목사의 조언에 따라서 다시 미국 풀러신학교에 가서 선교신학을 공부하고 오셨습니다. 학자로서 목사님은 역사신학과 선교신학 분야에서 1970-80년대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애서 가르치시면서 영안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이어 강변교회를 창립해 모범적인 중견교회로 성장시키고 은퇴하신 뒤 소천하시기까지 원로목사요 선교목사로 섬겨 오셨습니다. 강변교회는 전도와 신앙 교육과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로 키워내셨습니다.
1980년 총회신학교가 너무 교단 정치에 휘둘리는 등 신앙윤리적 난맥상으로 더 이상 성경적 복음주의적 신학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다는 위기를 감지하시고, 박윤선·신복윤 목사 등과 함께 합동신학교(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함께 기여하셨습니다. 오늘날 합동신학교는 주요 신학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2.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창설 및 섬김, 한국교회 연합에 관심과 기여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이하 한복협)는 목사님께서 1978년 젊은 시절에 창설하고 평생을 바쳐 섬겨온 귀한 초교파 목회자들의 협의회입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초창기 한경직·정진경·김창인·임옥·한철하·림인식·최복규 목사님 등을 중심으로 20여 년 간 총무로 섬기시면서 복음주의자들의 단합에 힘써 왔습니다. 해외로는 영국 존 스토트 박사, 독일 바이어하우스 박사 등 국제적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을 형성하고 신앙을 단합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후반기에 들어 한국교회 통합을 위해 노력하시면서 진보 진영, 천주교·불교 지도자들과도 복음 안에서 관용과 열린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목사님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근거한 복음의 보편성을 깊이 파악한 이웃사랑과 선교의 동기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3. 연변 지역 및 해외선교, 은퇴 후 국내 작은교회 전도 설교로 섬기셨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생전 한복협 활동과 함께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시고 연변 지역 동포들에게 사랑의 물자를 가져다 주었고, 유진벨재단을 통해 북한 지역에 결핵 아동들의 치유를 위한 의료사역을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지역에도 학교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고 한국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반군 지역에 복음과 물자를 전달하러 갔을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국경을 통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김 목사님은 11살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신앙의 용기로 국경을 넘어갔을 때 반군 저항 없이 무사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선교 일화를 들을 때면 많은 감동을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강변교회 은퇴 후 선교목사로서 국내 시골 및 변두리 작은교회들을 매주 쉬지 않고 손수 차로 운전하여 가시어 성도들에게 빵이나 과자를 선물로 주시고 교제를 나누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16년 간 해 오셨습니다. 2월 18일 별세하신 날에도 춘천으로 주일 오전 설교하러 가시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주 순교의 제물이 되겠다고 하셨는데, 설교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를 허용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목사님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4. 기독교학술원에서 지속적으로 영성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제가 총신대 차영배 교수님과 함께 1982년 창립한 기독교학술원에 많은 관심과 협력을 해 주셨습니다. 초창기부터 기독교학술원 포럼에서 다양한 주제로 강의해 주시고 참석한 목회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특히 2016년부터 기독교학술원에서 영성신학 수사과정을 개설한 후에는 한 학기도 빠짐없이 오셔서 한국교회사(길선주 목사님부터 이기풍·이성봉·최권능·한경직·박윤선 목사에 이르기까지)와 세계교회사애 족적을 남긴 신앙의 위인들(성 어거스틴, 성 프랜시스, 조나단 에드워즈,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존 스토트, 페터 바이어하우스등)에 관해 강의해 주셨어요. 이번 학기 5월에도 기독교학술원 수사과정에서 ‘회개의 영성’ 강의를 하실 예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수사과정 생도들은 어느 누구보다 노년기 김 목사님 강의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돼 안타까워요. 학술원 생도들은 김 목사님께서 강의하실 때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된다”고 생각했다는데, 이렇게 가셨네요. 그렇게 사랑하시던 주님께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안기셨을 것 같은 귀하고 아름다운 목사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김 목사님께서 수업 시간마다 남겨주신 회개와 기도와 섬김의 정신과 삶은 우리 제자들과 후학들의 삶과 목회에서 계승될 것을 확신합니다.
5.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모범적인 목회자와 학자요, 전도자와 멘토 되셨습니다
김명혁 박사님은 기독교학술원 강의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신앙의 선배로 아홉 분에 관하여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이분들은 순교신앙을 보여주신 아버지 김관주 목사,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신앙’을 가르쳐준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이인복·명선성·최병목 선생님, ‘한국교회의 무디’라 불리는 이성봉 목사, ‘한국교회의 예레미야’로 불리던 김치선 목사, 희생적 사랑과 섬김과 순교신앙의 영성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 사랑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한경직 목사, 목회와 선교 사역에 헌신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신 조동진 목사,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협력과 따뜻함과 격려와 칭찬의 영성을 보여주신 정진경 목사, 인간적인 다정함과 기도 생활화를 보여주신 박윤선 목사 등입니다.
저 자신은 이 아홉 분들과 함께 신앙과 삶의 일치를 보여주신 김명혁 목사님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목사님께서 저와 생도 목사들의 좋은 스승(mentor)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존경하는 김명혁 목사님, 주님께서 이제 쉬라고 불러주셨으니 천국에서, 주님의 품 안에서 생명의 면류관 받으시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도드립니다. 잠시 후 천국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평소 아껴주신 후학 김영한 드림
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