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설교] 주일 성수와 이웃 사랑의 귀중한 신앙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명혁 목사님은 매 주일 전국 곳곳의 작은교회를 손수 운전해 찾아가 설교 사역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홈페이지에 한두 달 뒤 예정된 설교문을 미리 게재하기도 하셨습니다. 매주 화요일이면 본지에 연락하셔서 “이번 주에는 OO교회를 간다”며 홈페이지 설교문을 ‘참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혹은 다음 날 본지 온라인 홈페이지에 목사님의 설교문이 게재되면, 가끔 연락도 주셨습니다. 지인들에 따르면, 생전 본지에 실린 당신의 설교문을 보시는 것이 목사님의 큰 낙이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목사님의 육성을 들을 순 없지만, 홈페이지에 미리 게재해 놓으신 설교문들을 미처 전하지 못한 유언처럼 여기면서, 마지막까지 계속 게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전하지 못한 장소: 서울 중국동포교회
전하지 못한 날짜: 2024년 3월 10일
전하지 못한 본문: 마 12:8, 롬 12:1,2, 행 1:8
허물과 죄가 많은 부족한 사람을 오늘 중국 동포 교회에서 불러 주시고 여러분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부족한 저를 불러주신 김해성 목사님과 중국 동포 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무슨 제목의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주일 성수와 이웃 사랑의 귀중한 신앙"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 성수와 이웃 사랑의 귀중한 신앙"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9시 예배 시간에는 저의 어린 시절의 "주일 성수와 이웃 사랑의 귀중한 신앙"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11시 예배 시간에는 저의 한평생의 "주일 성수와 이웃 사랑의 귀중한 신앙"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제가 어린이 시절에 체험한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유아 시절과 유년 시절을 주로 북한의 평안북도 신의주와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의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1살 때부터 9살 때까지는 신의주에서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기 때부터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요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아버지의 고향인 안주와 어머니의 고향인 박천에 가서도 살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살던 유아 및 유년 시절 동네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놀러 다니면서 심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중국 사람들이 가꾸던 토마토 밭에 들어가서 몰래 토마토를 따서 먹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길가에 조그만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를 종이와 흙으로 덮은 다음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썰매를 티고 쇠통에 담은 숯불을 쇠줄에 매달아 휘둘으며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몰려 다니면서 신나게 놀기도 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에 들어가서 미역을 감고 물 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놀기도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당(신의주 제이교회) 지붕 위와 교회 꼭대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대변이 마렵다고 하면 대변을 종이에 담아서 멀리 던져 남의 집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는 못된 장난까지 쳤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했고 장난 치기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손자들이 저의 장난꾸러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손자 수혁이는 세상에 장난꾸러기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외할아버지처럼 노는 것이 첫째이고 공부하는 것은 그 다음 다음 다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신앙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유치부 시절 어느 성탄절에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성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감동을 평생 지니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인 알타반 박사에 대한 성극이었습니다.
동방에서 떠난 네 번째 박사는 세 박사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던 중 길가에 쓸어져서 죽어가던 병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므로 세 박사들을 약속 장소에서 만나지 못했고 결국 베들레헴에 늦게 도착해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도 경배하지도 못했다는 서글픈 이야기였습니다. 왕에게 드리려고 준비했던 보물 하나는 병자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 어느 집의 아기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려고 하는 것을 살리기 위해서 써 버렸습니다. 그 후 알타반 박사는 평생 메시야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 애굽으로 이곳 저곳으로 찾아 다녔지만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다는 서글픈 내용의 성극이었습니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30여년이 지난 후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는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 거리의 군중들 사이에 끼어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팔리기 위해 군인들에게 잡혀서 끌려가던 한 소녀가 알타반 박사를 향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알타반 박사는 하나 남을 보물을 그 소녀에게 주므로 그 소녀를 구해주었습니다. 서글픈 이야기였지난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유치부 어린이였던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장면은 성극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빈 손으로 서글픈 마음으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던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가 지진으로 인해 돌무더기에 뒤덮혀서 죽어가면서 들은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너는 나를 만났느니라. 네가 준비했던 보물들은 내가 모두 받았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 유치부 어린 시절에 제가 들은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성자 예수님의 음성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국 목회자가 된 다음에도 저는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신의주에 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에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셨는데 저는 신의주에 있을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갇혀 있던 감옥을 자주 찾아가서 감옥 담장 밖에서 목청을 돋아서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이… !”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였습니다. 저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면서 그때부터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감옥에도 가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저에게 잔소리는 고사하고 타이르는 말씀도 별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저를 칭찬해 주시고 격려하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저의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고난의 삶을 바라보면서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신앙의 유산을 제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체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림니다.
저는 신의주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는 언제나 잘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가 공부 잘 하라고 잔 소리를 하신 적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됩니다. 특히 어머니는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하도록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또는 창의적으로 무엇을 하곤 했습니다. 좀 심한 장난도 쳤지만 말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면서 그런 일을 찾아서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저를 칭찬하시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도 잘 했고 놀기도 잘 했고 글도 잘 썼는데 글을 잘 쓴다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에 때때로 안주에 있는 친할머니 댁에 가곤 했는데 한 번은 산에 올라가서 신나게 놀다가 늑대 같은 짐승이 나타나 소리를 지르면서 저에게 달려와서 저는 높은 산에서 도망쳐 굴러서 내려오다가 몸에 상처를 입은 일도 있었습니다. 친 할머니는 기도와 예배와 전도에 전념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수요일 밤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먼 논길과 밭 길을 걸어가서 예배드리고 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머니는 주일날 농사 일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에 전념하시기도 했습니다. 할머니의 신앙으로 남편인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어 영수가 되었고 두 아들이 목사가 되었고 한 아들이 장로가 되었는데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오늘의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우연이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친 할머니의 신앙의 유산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친 할머니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립니다. 한 번은 박천에 있는 외 할머니 댁에 가서 지내면서 심한 장난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외 할머니와 아모와 삼촌이 저를 아주 예뻐해서 저는 때때로 심한 장난을 치곤 했는데 성냥을 가지고 뒷 산에 올라가서 나무에 불을 붙이는 불 장난까지 쳤습니다. 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아서 할머니 집 마당에 쌓아놓은 옥수수 나무 무더기에 불을 붙인 일도 있었습니다. 마른 옥수수 나무 무더기에 불이 너무 잘 타서 저는 아주 좋아했는데 할머니가 그것을 바라보면서 며느리를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그저 가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불을 놓았다고 고백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저에게는 어릴 때부터 심한 장난을 치는 못된 기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양에서 지낸 저의 소년 시절”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 교회를 사임하시고 평양 서문밖 교회로 부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산주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강량욱 목사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탄광에 투옥되어 중노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를 면회하러 어머니와 함께 사동탄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남루한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뵈온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이 아닌 삶으로 전수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 인민학교를 다닐 때 벌을 서고 정학을 당하면서도 주일 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합다.
저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평양은 바로 최봉석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께서 1944년 4월에 순교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에게 순교적인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들이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일 성수와 새벽기도를 철저히 했고 순교신앙을 귀중한 신앙으로 이어받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했고, 새벽 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 기도를 했고, 주일날 공부를 하지 말고 물건이나 음식을 사지 말라고 하면 공부도 하지 않고 물건이나 음식도 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평양 제 오 인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하라는 명령을 매주 받았지만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섰고 때로는 정학을 받았지만 주일날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학교 오후 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기도하라고 하면 제가 제일 먼저 나가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주일 저녁 어른 예배시간에 때때로 제가 나가서 "간증" 또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저를 가장 많이 사랑했지만 저에게 잔소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라고 또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타이르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도 저는 공부도 잘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저를 믿고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신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깊은 사랑과 존경을 표합니다. 잔소리보다는 순수한 사랑과 격려가 그 무엇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어린이들은 자발성이나 창의성보다는 짜증과 불쾌감을 지니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장성껏 드리면서 살기 위해서 11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는데 제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을 저는 잘 압니다.
평양을 떠나기 전에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를 한 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시면서 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의 모험적인 기질을 잘 아시는 어머니가 제가 떠나기 전에 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저를 믿고 저를 멀리 떠나보내시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저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로 오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저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해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 날 밤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을 따라서 조용 조용히 국경을 넘다가 우리 일행은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일행을 향해서 모두 손을 들고 서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예배 드리기 위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손을 들고 설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남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긴 파 밭을 지나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면서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파 밭을 지날 때 파들이 꺾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아마 3,40분 동안 달린 후 저는 남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사건은 그후 저의 평생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없이 모험적으로 뚫고 나아가는 "막가파"의 삶이 저의 삶의 모습이 된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떤 삶을 사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 오더니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어떻게 누구하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잡혀서 어떻게 서울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저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젊은이와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습니다. 서울 역에 도착했을 때 저는 화려한 모습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젊은이의 친절한 안내로 해주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서울역에서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 집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주머니에 넣고 온 것은 이모님의 집 주소 한장 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모님을 반갑게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에 저를 서울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 그 젊은이를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애를 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천사"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처음 2년 동안 저는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마음껏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일에는 영락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 성수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했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귀중한 스승님이셨습니다. 신의주 제이교회 출신인 김익순 장로님도 저를 따뜻하게 만나주시고 대해주셨습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는데 저는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제가 이북 사투리를 한다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친구가 저를 계속해서 놀려서 제가 그 친구에게 학교 뒷마당에 가서 싸움을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반 친구들이 학교 뒷마당에 모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때려 눕혔습니다. 결국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저를 놀리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싸움도 제가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두 명씩 뽑아서 남산에 가서 과학 경연대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뽑혀서 간 일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평생 신앙생활이 첫째이고 공부는 둘째였는데 저는 공부도 잘 해서 그 당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 서울중학교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저는 서울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잘 했고 엉뚱한 짓도 잘 했습니다.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이 저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은진미륵같이 생긴 놈이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저를 책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고 특히 김원규 교장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지키며 살라는 말씀을 잘 들었고 그대로 살려고 평생 노력을 했습니다. 결국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의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변영태 교수님(후에 총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변영태 교수님은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치약도 절약해서 조금씩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그렇게 살려고 평생 힘썼는데 저는 지금도 양치할 때 치약을 절약해서 조금씩 사용합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엉뚱한 일을 하나 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을 하는데 구청 직원이 나보고 "본"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본"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얼떨결에 내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남양 군도에 살던 토인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갑자기 남양군도가 생각나서 나의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내 본은 "김해" 인데 저는 평생 "남양" 김씨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동신학대학에서 “은퇴 기념논총”을 저에게 증정할 때 “남양 김명혁 목사 은퇴 기념논총” 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저의 딸은 "남양" 김씨 가문이 자기 대에서 끊어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월남한지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인민군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비행기 B 29의 폭격도 눈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제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방공호가 폭격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가에 쓸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쟁의 불행과 비극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모부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님의 봉고차를 함께 타고 사장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차를 타고 또는 걷기도 하며 힘들게 피난을 가는데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갔으니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길에서도 폭탄이 터지고 길가에 쓰러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전쟁은 불행한 것이고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부산에서 몇달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대구로 옮겨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셋방 하나를 얻고 한 방에서 불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님이 시장에 나가서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잘 벌어서 차츰 어려움이 없는 피난 셍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일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셋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교회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처음에는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며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린이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목사님이 어린이 사역을 담당하시고 어린이 사역에 관한 모임도 주관하셨는데 저는 그 때부터 안싱전 목사님을 평생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때 대구에서는 SB(Sister/Brother) 즉 누나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했는데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던 누나뻘 되는 주명숙이라는 고등학생이 저하고 누나 동생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를 귀엽게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주명숙 누나는 그 때 제가 다니던 영남중학교 교장인 주덕근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저를 누나 집에 데려가서 음식도 해 주고 선물도 주고 내 손수건도 빨아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 사과 껍질을 깍는 법을 누나에게서 배웠습니다. 즉 칼로 사과를 톡 친 다음 껍질을 깎는 법을 배웠는데 저는 지금도 그렇게 사과 껍질을 깎곤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고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이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빠지지 않고 거의 매번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 때는 부흥회가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개학때는 새벽과 저녁 집회만 참석했지만 방학 때는 오전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례로 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새벽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오전과 저녁 집회때는 은혜 사모와 성결과 헌신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천로역정 강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은혜로웠습니다. 때때로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 되구나..." 허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감동도 충만했습니다. 성경 아무데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저는 성경을 찾지도 않고 암송해서 읽곤 했습니다.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제가 거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의 하나는 시50:15 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 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평생 회개를 힘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게 되었고 결국 2000년 5월 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란 제목으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였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사는 동안 이모님의 아들인 저의 사촌 동생을 잘 가르쳐주어서 공부를 잘 하게 되었고 이모님의 친구의 아들을 잘 가르쳐주어서 공부를 잘 하게 되어서 저는 이모님으로부터 그리고 이모님 친구 분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으면서 신나고 즐겁게 지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결국 자는 "왕자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후예가 된 것이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서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의 사랑과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서 살게 되었고 후에는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들의 특별한 사랑과 칭찬과 격려와 축복을 받으면서 살게 되었고 나중에는 강원용 목사님, 이중표 목사님들의 틀별한 사랑과 칭찬과 결려와 축복까지 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이셨던 이인복 선생님과 최병목 선생님을 만났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후에는 서울에서 명신성 선생님도 만났는데 세 분이 모두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이인복 목사님은 대구 외곽에 동광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즉시 대구 제일교회에서 대구 동광교회로 옮겨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했습니다. 조그만 개척교회였지만 저는 정성을 다해서 교회를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중학생 때 교사의 일도 했고 봉사도 했고 주일 오후에는 교회 근처 언덕에 올라가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외치면서 노방전도도 했습니다. 어느 해 성탄절에 교회 친구들이 모여서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색을 하면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절기이기 때문에 즐겁고 기쁜 절기이지만 사실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기 위해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슬픈 절기이기도 하니까 너무 즐겁게 놀지 말고 슬퍼하고 회개하면서 지내는 것이 옳을 것이야.” 철이 좀 일찍 들었는지 모릅니다.
한 번은 대구 어느 교회에서 미국에서 온 잘비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한경직 목사님이 통역을 하셨습니다. 저는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었는데 잘비스 목사님이 회개는 혼자서 조용히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무도 나가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회개의 중요성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무슨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는지 기억이 되지 않지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진지하게 회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과 목사님들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들음과 순종의 은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듣는 귀를 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귀중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김치선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일심히 하면서 보다 철저한 회개와 성김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때 제가 남산 근처에서 살았는데 새벽 기도회 후에 남산으로 올라가서 20여분 이상 더 기도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사실 저의 삶에는 못된 기질과 허물과 실수와 죄악으로 가득했는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을 귀중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저로 하여금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려는 소원을 지니고 한 평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다윗처럼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6:20).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제가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주력한 것은 친밀한 교제와 사랑과 섬김이었는데 특히 새 신자들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과 섬김 그리고 어린이들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과 섬김에 주력했습니다. 제가 어린이들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과 섬김에 주력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어린이들을 아주 많이 사랑하며 좋아했습니다. 어린이들도 저를 아주 많이 사랑하며 좋아했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예배 시간 전에 제가 주일 학교 각 부서에 들어가곤 했는데 유아부 유치부 어린이들은 저에게 달려 들어 안기고 업히곤 했습니다. 유치부 어린이들 몇 명은 빙빙 돌려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이들의 두 손을 붙잡고 빙빙 돌리곤 했습니다. 유년부 어린이들 몇 명은 저에게 꼭 안겨서 그대로 안겨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 시간에는 유아부 유치부 유년부 어린이들 10여명이 나와서 성경 암송도 하고 노래도 부르곤 했는데 얼마나 예쁘고 귀여웠는지 모릅니다. 2살 난 예나 4살 난 혜성이 4 살 난 주한이 4살 난 지민이가 성경 암송하는 모습은 너무너무 귀여웠습니다. 성경 암송과 노래 후 제가 스티커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곤 했는데 모두 너무 너무 좋아했습니다.
은우 라는 3살 난 아이는 주일 날 교회에 오면 꼭 목사님 방에 가자고 했습니다. 스티커 한 장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배 후 점심 식사를 할 때 거의 매번 예은이와 지원이가 내 옆으로 다가 오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스티커 받지 말랬어요”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 표정은 스티커를 한 장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스티커를 한 장 씩 나누어 주면 활짝 웃으면서 좋아하곤 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유년부 어린이들이 양평으로 수련회를 떠났습니다. 제가 버스에 올라가서 어린이들을 배웅하며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때 어린이들이 “목사님도 함께 가자!” 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래서 저는 짐도 싸지 않았는데 어떻게 갈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때 어린이들은 저보고 빨리 집에 가서 짐을 싸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물, 어물 말하며 어린이들을 떠나 보냈습니다. 저는 한참 생각하다가 몇 시간 후 김종군 목사님과 함께 양평으로 달려갔습니다. 유년부 어린이들이 함께 모여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어린이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목사님이 약속을 지켰다!” 저는 어린이들과 물 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얼마 후 제가 떠나려고 하자 어린이들은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서 자겠느냐” 라고 하자 은정이와 하림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둘 사이에서 자면 되잖아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들이 너무 너무 재미있어 했습니다. 어린이들은 너무 너무 예쁘고 귀엽습니다. 저는 길을 가는 어린이들을 보아도 너무 귀여워서 안아주고 싶고 스티커라도 한 장씩 나누어주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주머니에 스티커 몇 장씩을 늘 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사는 어린이들이 저를 보면 아는 척 하며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가까이 와서 스티커를 받아가지고 가곤 합니다.
제가 2023년 3월 12일 암미 선교회에 가서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일이 있는데 그 때 한 설교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려고 합니다. 성자 예수님은 좀 이상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성자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는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고 귀중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1-6).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마 19: 13-1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5-15).
어린 아이를 만나서 오병 이어를 받으신 성자 예수님께서 아주 많이 행복하시고 고마워하시면서 거기 모인 오천 여명의 군중을 먹이신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린 아이는 그 놀라운 일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계속해서 놀라운 일들을 간증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어린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어린이들의 엄마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엄마들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만져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제자들이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4-16). 성자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을 성자 예수님에게 데려와야 하는 귀중한 진리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제가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 사역을 하면서 주력한 것은 교인들을 사랑하는데 주력한 것이었고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하는데 주력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을 아주 많이 사랑했고 어린이들은 저를 아주 많이 사랑했습니다. 제가 주일 아침마다 11시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어린이들 모임에 거의 전부 참여하곤 했는데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저를 만나는 것을 아주 좋아했고 어떤 어린이들은 계속해서 안아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어린이들을 안아주곤 했습니다. 어떤 어린이들은 저녁 예배까지 참석했는데 성경 암송도 하고 노래도 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어느 날 유년부 어린이들이 양평으로 여름 성경 수련회를 하려고 떠나려고 했습니다. 버스가 와서 어린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버스에 올라가서 어린이들을 배웅하며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때 어린이들이 목사님도 그들과 함께 양평으로 가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짐도 싸지 않았는데 어떻게 갈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때 어린이들은 다시 나보고 빨리 집에 가서 짐을 싸 가지고 양평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사무실로 왔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다가 양평으로 차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유년부 어린이들이 함께 모여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어린이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목사님이 약속을 지켰다!” 저는 어린이들과 몇 시간 동안 함께 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얼마 후에 제가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하자 어린이들은 돌아가지 말고 저들과 함께 머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서 자겠느냐 라고 하자 두 어린이들이(은정이와 하림이가) 우리 둘 사이에서 자면 되잖아요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들이 너무너무 재미있어 했습니다.
제가 잠깐 미국에 간 동안 원주 라는 어린 아이는 교회에 와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원주가 엄마 보고 목사님 어디 있어? 라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미국 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원주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원주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원주가 전화를 하면서 내가 지금 미국에 있는지 강변교회에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제가 지금 강변교회에 있다고 했더니 원주는 아주 행복하고 기뻐하면서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꼭 안았습니다.
저는 교회의 어린이들을 아주 많이 사랑했고 교회의 어린이들은 저를 아주 많이 사랑했습니다. 우리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아주 많은데 사랑의 편지들 일부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전 교회가 제일 그리워요. 그동안 예뻐해 주시고 안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고 싶어요. 예쁜 스티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동생 예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멋 지세요 주은이가”
“사랑하는 목사님께 ♡ 사랑해요. 축복 많이 받으세요. 전 초등학교 들어갔어요. 친구들 사귀기가 힘들어요 기도해주세요. 여기 교회들은 성경공부를 안 해서 실은 데 기도해주세요. 강변교회처럼 좋은 교회 되게 달라고 기도해주세요. 주은이가 목사님에게 ♡ “
“사랑하는 목사님, 제 꿈이 커졌어요. 저의 꿈은 성탄절을 맞으면서 선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어요. 설교 말씀을 듣고 나서 달라졌어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건 좋은 소식이지만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실 분이었기 때문에 슬픈 사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결국 이번 성탄말에는 모든 종류의 성탄 선물을 추구하는 대신 예수님께 대한 회개와 감사의 순수한 마을을 지니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성혜진 올림”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도 커서 목사님이 되고 싶어요. 목사님이 되고 싶으면 성경을 많이 읽고 외우고 쓰고 그래야겠죠. 그렇지만 참 어려울 것 같아요.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게 목사님이 되셨어요. 목사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많이 믿고, 성경을 많이 읽고 외우고 쓰셨죠. 목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목사님 같아요. 저는 자라서 꼭 목사님이 되고 싶어요. 성혜진 올림 2001.3.6”
제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추수감사주일에 강변교회를 방문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교회의 어린이들이 사랑의 편지들을 써서 주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김명혁 목사님께. 목사님, 벌써 목사님께서 이 교회를 떠난지 1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저는 11살 때 탈북 하신 목사님께 대한 사랑을 가슴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사랑해요. 목사님께서 제가 어렸을 적부터 저에게 항상 스티커를 주시곤 하셨죠. 목사님께서 교회를 떠나신 다음 저는 목사님이 너무 그립곤 했어요. 오늘 다시 만나게 되어서 참 반가웠어요. 지난 날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많이 사랑해요!! 목사님을 사랑하는 금찬후 올림”
“김명혁 목사님께. 목사님 잘 지내셨어요? 목사님 뵈니까 너무 반가워요. 목사님 2년 전에 있었던 여름 성경학교 수련회를 기억해 주시니 너무 기뻐요. 목사님은 은정이를 오래오래 기억해 주세요. 저 은정이도 목사님의 사랑을 오래오래 기억할께요. 자주자주 교회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스티커를 오랜만에 받아서 기뻐요. 저도 목사님처럼 사랑하면서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아름답게 살겠어요. 감사합니다.. 2008년 11월 16일 김은정 올림”
“김명혁 목사님 저 하림이에용~♥ 목사님이 이제 교회 설교를 안 하셔서 너무 슬퍼하고 있어요. ♥ ㅠ.ㅠ 저는 김명혁 목사님이 2006년 여름 여름 성경학교 때 오신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 목사님이 다시 오셨으면 좋겠어요 ^^ 저는 목사님을 너무 사랑해요. 목사님 사랑 ♡ & ♡ ^^ ♥ 스티커 마니마니 주신거~ 한번도 안쓰고 스티커 앨범에 모두다 ~~ 모으고 있어요. 목사님 주시는 스티커 정말 예뻐요~ ♥ ♡♡♡♡X1,000,000. 매일 기도해드릴 게요. 목사님 ~~ 항상 감사하며 살게요 ♡ 사랑해요 ♡ 목사님을 사랑하는 하림이 올림 ♡”
“김명혁 목사님! 저 솔림이에요. 전 목사님을 정말 좋아하며 사랑해요. ♥ 목사님이 계속 우리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은퇴하시고 원로 목사님이 되시다니 …ㅠㅠ 오래오래 사셔서 우리 교회에서 매주마다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세계 곳곳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도하시길 기도할께요! 목사님을 너무 LOVE 하는 솔림 올림 ♥♥ 다음에 꼭 뵈요. 2008.11.16 S솔림이 ♡♡♡”
가장 귀중하고 행복한 일은 어린이들을 안아주며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안아주며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 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5,46).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아주 크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저는 가난과 고난에 처한 중국 연변 조선족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게 하셨고, 가장 불쌍한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학교 하나를 지어주도록 하셨습니다. 너무너무 놀랍고 너무너무 고마운 일들이었습니다. 중국 연변 조선족 어린이들은 부족한 저에게 감사와 고마움과 사랑의 편지들 수백 통을 써서 저에게 보냈습니다.
악의 축이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불쌍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건축하고 학교 준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감사와 고마움과 사랑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한국 말로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들은 모두 어린이들을 귀여워하고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모두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수하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주 귀중한 말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뢰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성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라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우리들은 정말 어린이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어린이들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찬송을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故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