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은 마음을 밝혀 신령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시는 그 일들의 객관적 진실에 대해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신다. 이렇게 영적 실재들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감각에 의해 획득하는 물질들에 대한 지식처럼 나름대로의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지식은 감각 인식이 주는 바와 유사한 직접적인 확신이라는 특성을 함께 가져온다.
굿윈(Thomas Goodwin)은 말하기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성령께서는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첫째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지각(요일 5:20), 즉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주신다. 둘째는 성령 자신께서 이 새로운 지각 위에 빛으로 오심으로 영적인 시야를 부여하신다.”고 하였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여기서 말하는 이 영적 지식은 사실상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이 영적 지식이 유혹들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는 수도 있으나, 그러나 진정한 영적 지식은 변함없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내적 증거(Inner Witness of Holy Spirit)에 대하여 논하는데, 여기서 ‘내적’(內的)이란 기록된 말씀과 이 기록된 말씀에 기초한 설교 말씀을 외적인 것으로 볼 때 이와는 상대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칼빈이 ‘하나님이 친히 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할 때, 성령의 사역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성령의 증거는 모든 이성보다 탁월하다.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적합한 증거자이신 한, 이 말씀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 각인 되지 않고는 인간의 마음속에 수용될 수 없다.”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의 내적 증거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무오설이나 교황권에 의한 교리 전승 및 그 어떤 교회의 규범이나 권위보다도 힘이 있으며 이성의 증거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이 성령의 내적 증거를 참 신앙의 기반과 보증으로서 크게 강조한 일은 이후 청교도 그리고 웨슬리(John Wesley)를 포함한 전체 개신교 성령운동사에 크게 각인 되는 ‘성령의 내적 증거’의 모티브를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또한 양심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였다. 양심은 하나님 자신의 영(靈)과 함께 연합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길로 우리를 지도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의 증거란 단지 인간 자신의 영의 증거 또는 간증을 확증하고 강화하고 분발시키고 풍성하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성령께서도 증거하시는 것인데, 더 이상 간접적으로 하시지 않고 즉각적이고도 직관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은혜는 성령의 사역과 직결된다. 성령, 즉 보혜사(保惠師)란 헬라어로 ‘옆에 계시면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NIV 영어성경에는 ‘상담자’(Counselor)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말 성경에 나타나는 이 말의 한문의 뜻으로는 ‘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선생’이라는 의미이다.
이 모두가 성경에서 일치되는 것은, 성령은 곧 인격적으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제자들의 인격적 보혜사의 역할을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또 다른 보혜사”(요 14:16)로서 성령이 오시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고 또 우리 안에 동거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육체로가 아니라 오직 영으로서만 가능하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위격(位格)을 통하여 오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
그 예수께서 성령의 위격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임재(臨在)하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혼 속에 중생의 기적을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Savior)와 주님(Lord)으로 영접하게 하신다.
나는 전도 현장이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면 언제나 성령께서 중생, 즉 거듭남의 영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는 이름뿐인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중생의 은혜를 받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 함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 함은 내 영혼 속에 오신 예수를 내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예수님이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John Lilley) 이처럼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따라서 성령께 이끌리는 삶,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 곧 예수 믿는 삶의 실체이다.
배본철 성령의삶 코스 대표(성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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