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현식 목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충돌한다.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와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가 그것이다. 사실 인본주의는 무서운 사상이다. 얼핏 보면 멋지지만, 실상은 파괴적이다. 인본주의는 “내가 기준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기준을 결정한다, 사람이 선을 결정한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형식은 철학, 전통, 민주주의 원리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핵심은 사람이 기준과 선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지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낙태” “동성애” “안락사” 등의 논쟁을 보라. 모두 사람이 기준을 결정한다.
“자기 결정권”, “성 결정권” 이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기준을 정한다는 것이다. “존엄사”라는 말도 들었을 것이다. 매우 아름다운 말로 포장한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이 모든 기준과 선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할 때의 모습은 구약 성경 사사기가 잘 보여준다.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사사기 17-21장을 보라. 입에 담기도 힘든 해괴함이 일어난다. 로마서 1장 21-31절을 보라. 사람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멋대로 결정한다.
하나님의 최고의 심판은 “버려둠”이다. 그냥 내버려 둔다. 인본주의적 유토피아를 말하지만 결과는 역겨움이다. “불의, 추악, 탐욕, 비방, 무자비”가 나온다. 그래서 무너진다. 쓰러진다. 망한다. 선악과의 결과, 즉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창세기 3장 5절)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민낯이다.
사실 신본주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불편하고 반감이 생긴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한다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인생의 모든 길을 아시는 분이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희생한다. 그것이 살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
경제학에서 나오는 가장 충격적인 개념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다. 즉 진정한 가치는 희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나의 집에는 여러 권의 성경이 있다. 대충 1권에 4만원 정도 주고 구입하였다. 내가 서점에 가고 오는 교통비까지 합치면 4만 5천원 정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성경책의 값은 얼마인가? “사람의 생명 그 자체이다. 북한에서 성경을 지니면 죽음이다.” 죽음 아니면 정치범 수용소, 요덕 수용소로 간다. 북한에서의 성경의 가치는 바로 목숨이다.
그렇다. 진정한 가치는 내가 무엇을 희생했는가에 달려 있다. 신본주의 세계관에서는 가치가 희생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희생이 크면 가치도 크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나를 최고로 사랑한다. 그리고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셨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라는 목숨을 희생하셨다. 이것이 기회 비용이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의 목숨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는 “예수 가치”와 동일하다. 진정한 가치는 양에서 나오지 않는다. 희생에서 나온다. 사랑에서 나온다.
마가복음 5장에 세상의 달콤한 구호를 붙들었던 한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붙들었을 때의 모습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9).
나와 우리들의 살 길은 명백하다. 그 길은 유일한 길이다.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어야 산다. 세상은 멋진 구호, 멋진 설득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람이 최고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길을 모르는 인간이 이렇게 자신있게 외친다고 그게 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최고의 영적 기회 비용을 지불하신 분이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예수다. 오직 예수를 붙들어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