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범죄도시 4> (2)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최근 개봉해 금주 내로 천만 돌파가 유력시되는 허명행 감독의 <범죄도시4>를 분석합니다. 지난 세 편처럼 마동석(마석도) 형사를 주인공으로, 빌런 김무열(백창기)과 이동휘(장동철)를 비롯해 박지환(장이수), 이범수(장태수), 김민재(김만재), 이지훈(양종수), 김도건(정다윗), 김지훈(조부장), 현봉식(권사장), 이주빈(한지수) 등도 출연했습니다. -편집자 주
우리와 함께 생활하려는 외국인들
올바르게 대우할 준비, 되어 있나
후진국 사람들에 차별적 시선 여전
혼혈이나 국제결혼 극단 거부감도
교회에서도 대다수 아웃사이더 돼
다문화인들, 목회 중점 요소 돼야
◈한국 영화 속의 외국: 외국인과 해외 문화에 방어적인 대중문화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에 등장하는 한국 근처의 ‘해외’는 대개 무법천지, 범죄의 온상으로 그려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비치는 중국 동북3성은, 빈곤한 조선계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후진국 거주지의 이미지를 덧입는다. 베트남과 필리핀은 유명 관광지들이 있고, 그래서 환락이 제공되고, 그 환락 이면에 온갖 범죄조직이 꼬여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중심 서사가 범죄자를 ‘때려잡는’ 형사의 활극이다 보니, 등장하는 배경지가 범죄의 온상으로 그려지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 <친구>에서 부산은 학교폭력과 조직폭력의 해방구처럼 그려지고, 해외에서도 <배트맨> 시리즈를 보면 뉴욕 등 미국 대도시들이 구제 불가능한 범죄자들의 왕국처럼 묘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도시>의 해외 묘사는 우리 한국 사회에 널리 만연된 특정한 편견을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친구>나 <배트맨> 시리즈와는 다르게 반성할 거리를 제공한다.
영화 <친구>나 <배트맨> 시리즈는 각각 자국의 범죄에 대한 문제를 되짚어보는 사회의식을 반영한다. 반면 <범죄도시> 서사는 한국 범죄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범죄의 뿌리 혹은 범죄가 활성화되는 원인이나 계기는 모두 주로 한국 근처 해외, 그것도 한국보다 경제력이 낮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에 자리잡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범죄도시> 3편인데, 여기서는 일본 야쿠자 조직이 범죄의 크기를 키우는 원흉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일본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아직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대중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반감에 힘입어, 불법과 범죄가 판을 치는 해외 국가 가운데 하나로 묘사되고 있다.
<범죄도시>의 해외 묘사 방식은 한국인들의 뿌리깊은 민족적·국가적 폐쇄성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영화 속에 묘사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대중에게 각광을 받는다는 것은, 곧 우리 한국인들 다수가 외국인과 외국 문화의 한국 유입에 대해 상당한 불만과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도시> 4편의 개봉 직전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파묘>를 봐도, 이런 불안감은 그대로 드러난다. 과거 해외와 얽혀 오랫동안 좋은 꼴을 보지 못했던 약소국민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아서 망령처럼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 영화나 방송계, 심지어는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의 모습 모두 실질적으로는 우리 문화의 틀 안에서 새롭게 조형된 외국인들 뿐이다.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하고 한국 대중문화와 요리에 푹 빠진 외국인들만이 우리가 반겨야 할 외국인들로 묘사된다. 막상 그들이 자신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 요소를 가지고 접근하면 관객 혹은 시청자들의 무관심과 반감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 그리고 한국교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정신적 문제다. 특히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이념이 깨지고, 다민족·다인종·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더더욱 우선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이다.
외국인 대량 유입으로 인한 치안과 안보 문제를 걱정하는 심정도 이해는 되지만, 이미 우리 사회 현실은 더 이상 ‘단일 민족’이라는 관념으로 치안 및 안보 문제를 대처해 나갈 만큼 문화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단일화되어 있지 않다.
◈한국 사회 속의 외국: 시대착오적 민족적 배타성이 만연해 있는 한국 사회
단적인 예로, 최근 급증하는 국제결혼 비율을 생각해 보자. 작년(2023년) 국내 총 혼인 건수 가운데 8.9%인 1만 7천 건이 한국인과 외국인의 혼인이었다. 이는 2022년보다 4천 건 증가한 숫자이고, 올해는 그 증가폭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혼인한 이들 모두가 한국에서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들 자녀들 가운데 상당수는 혼혈 한국인으로 향후 우리 사회의 한 주축을 이룰 것이다. 이전에는 농촌 쪽에 다문화 가정이 주로 집중돼 있었던 반면, 최근에는 도시 지역에도 다문화 가정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체류하며 일정 기간 근로를 마치고 떠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달리,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한국에 정착하는 외국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영구적으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해 나가는 우리 동반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법적으로든 사회적 인식으로든 우리 사회에 유입되는 외국인들과 외국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외국인이 가장 장기체류 비자를 받기 어려운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북한에서 파견하는 간첩의 국내 침입을 막겠다는 이유로 외국인, 특히 선진국 아닌 나라 국민들의 국내 장기체류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냉전 종식으로 이런 분위기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이후 주로 중국인들의 밀수 및 불법체류 문제가 심해지면서 외국인의 장기체류는 재차 강력하게 통제되기 시작했다.
재한 외국인 처우 기본법은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공정하고 평등한 처우를 보장한다. 하지만 법의 이상과는 다르게 한국의 외국인 대상 출입국 및 체류 관리 행정체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배타성이 강한 축에 속한다.
안보와 치안을 목적으로 외국인 출입국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통제 강도가 사회적 현실을 간과하는 수준으로 과도한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이런 통제가 제대로 작동하느냐고 자문한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다.
현재 40만 명에 달하는 불법체류자 관리가 온전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고, 나아가 정상적 방법으로 한국에서 생활하려는 이들에 대한 공정한 체류 심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특정 정치단체의 집권 목적이나 기업들의 비용 절감 목적에 따라 외국인 출입국 및 체류 관리 기준이 이리저리 뒤바뀌는 경우를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의 사회적 인식이 과연 선량하고 정상적인 목적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생활하려는 외국인들을 올바르게 대우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앞선다.
한국보다 경제적·정치적으로 후진국이라 여기는 주변국 외국인들에 대한 우리의 차별적 시선은 여전하고, 국제결혼이나 혼혈 자녀들의 존재에 대해 극단적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들도 자주 목격된다.
한국교회는 어떨까? 개인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국교회는 그래도 외국인 노동자들과 재한 외국인들에 대한 선교 및 봉사에 앞장서온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포용적인 목회활동이 영향력 있는 대형교회들에 의해 힘있게 추진된 것이 아니라, 주로 자유주의 신학 성향의 개교회 목회자들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데 대해서는 커다란 아쉬움을 갖는다.
한국 대형교회 내부를 보면 대부분 오랜 기간 사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해온 소위 ‘이너서클’이 가진 지배력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런 이너서클을 이루는 이들 대다수는 주로 나이 50대 이상의 장년 및 노년층 교역자들과 장로, 집사들이다.
이들 대다수는 외국인 혹은 혼혈 한국인 신자의 유입에 대해 언어적으로든 아니면 정서적으로든 목회적인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에 잠시 발을 들인 외국인 혹은 혼혈 한국인 신자들 다수는 아웃사이더로 겉돌다가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기 마련이다.
성급한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이 초래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정상적인 결혼이민과 혼혈 자녀들에 대한 인식마저 배타적 차별의 정서가 지배하는 현 상황은 비정상적이다.
여기에 더해 아예 ‘토종’ 한국인이 멸종해 가는 인구구조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에서 엿보이는 해외에 대한 배타적 인식은 우리 사회가 가진 심각한 정서적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도처에서 이런 민족적 배타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여러 목회자들을 배출한 공로가 있다. 다만 재한 외국인과 혼혈 한국인 대상 목회활동이 여전히 한국교회 목회의 중점적 요소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아쉽다.
한국으로의 결혼 이민이나 외국인들의 국내 장기체류 기조는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예측되고, 여기에 더해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저출산 기조로 인해 한국 전체 인구 가운데 토종 한국인의 비율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한민족, 한국인 중심의 자기중심적이면서도 방어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는 주류 대중문화의 행태는 시대착오적이라고 평할 수밖에 없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