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2)
인류 문명 선하지 않음 폭로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대표
종말 진중한 주제의식 담아내
위기 알리고 구원 필요 이끌어
◈문명의 붕괴: 인류 문명에 대한 교만과 환상을 분쇄하는 종말론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성경의 창세기-출애굽기,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절묘하게 섞어 인유한 <매드 맥스> 시리즈 최신작으로, 국내 흥행 성적은 저조했으나 평단과 관객들에게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종말의 상황에 놓인 인간 군상의 불안한 심리상태와 문명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 어우러진 진중한 주제의식을 전하면서, 작품성을 따지는 관객들에게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존 문명 붕괴와 그 처절한 회복 노력을 상상해 봄으로써 인류 문명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세계관은 서구 기독교 문화의 탁월한 강점이다.
<매드 맥스> 시리즈처럼 성경 기사를 차용해 인류의 운명을 예견해 보는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우리 삶의 기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되짚어볼 것을 권한다.
문명이라는 것이 태어나 보니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건설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라는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로써 성경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우리 존재와 삶의 ‘원인’과 ‘목표’에 대해 되짚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 역사에는 인간과 만물을 초월해 있는 형이상학적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직선적이고 연대기적인 기독교 세계관과 달리, 동양적 세계관은 전반적으로 복고적(유교)이거나 순환적(도교·불교)이다.
기독교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동양적 세계관도 나름 인류 문명의 원인과 목표를 제시하고는 있기는 하다. 다만 여기서는 대개 인류 문명 목표가 과거 특정 시점(요순 시대)으로 고정돼 있거나, 만물의 무인격적 순환에 그저 순응하는 것으로 지정되기 일쑤다. 그래서 그 가운데 인류 종말에 대한 예견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인류의 종말에 대한 성경적 예견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교만을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존속과 번영에 대한 확신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물론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협과 환경파괴, 기후변화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이를 진정 위급한 문제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인류의 대다수가 이런 문제들을 진정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처럼 문제 상황을 방치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온 지식과 기술에 힘입어 자력으로 영구히 생존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인류 진보에 대한 신념은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이 신념을 절대 보장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현재의 인류 문명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할 만한 요인들은 지금도 삶의 여러 영역에서 발견된다.
물리적 영역에서는 환경 문제, 전염병, 천체의 변동 등이, 정신적 영역에서는 탐욕에 의한 분쟁과 불평등 심화 같은 요인이 인류 문명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종말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은 이런 위태로운 현실 가운데 인류의 영화로운 앞날에 대한 우리의 교만한 신념을 분쇄하고 우리 문명이 직면한 위기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문명의 본성: 저주를 앞둔 큰 성 바벨론의 운명
인류의 종말에 대한 성경적 예견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구원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열망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죽음과 멸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갖지 못한 채 하루하루 다가오는 일상을 그저 무감각하게 감내하고 향유할 뿐이다.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위협으로부터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는 이에게 삶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하찮게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감각과 열망이 없는 이는 삶을 올바르고 충만하게 가꾸어 나갈 의지를 상실하고, 그저 매일 권태 속에서 혹은 그 권태를 잠시 뒤흔드는 말초적 즐거움을 이어나가면서 살 뿐이다.
종말과 구원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은 이렇게 무력하고 무가치한 삶의 방식을 차단하고 각자 일상을 뛰어넘는 소망과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종말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현재의 인류 문명이 과연 선하고 올바른지, 존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해 보도록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죄로 타락한 인류, 그 인류가 수천 년 넘는 시간에 걸쳐 이룩한 문명은 물리적 측면에서는 화려하고 치밀해 보일지 모르나, 정신적 측면에서는 늘 썩어 있었다.
무수한 혁신적 발견과 발명, 그리고 그로 인한 지식과 힘의 증가는 인류의 삶과 자유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일보다는 억압, 착취, 약탈, 그리고 과시의 목적으로 활용돼 왔다.
이에 성경은 인류가 이룩한 그 어떠한 고도화된 문명도 모두 죄악과 교만으로 가득한 “큰 성 바벨론(계 18:1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매드 맥스> 시리즈는 이처럼 현재 인류 문명이 결코 선하고 정의롭지 않음을 폭로하고, 그로 말미암아 종말이 다가올 때 인류가 극도로 피폐해진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독교적 전망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대표작이다.
각 편마다 흥행에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이 시리즈가 이토록 장수하면서 명맥을 이어온 데는 그만한 문화적 매력과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드 맥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러 악역들, 토커터, 휴멍거스, 엔티티, 임모탄 조, 디멘투스의 공통점은 대표적으로 모두 폭력을 바탕으로 권력 야욕을 충족시키는 인물들이란 점이다. 이들은 현 인류 문명을 움직이는 권력구조의 근본 속성을 드러내는 인물상으로, 공의, 자비, 신실함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세속 위정자들의 추악한 본모습을 대변한다.
맥스 로카탄스키와 임페라토르 퓨리오사는 작중 이런 악독하고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저항하는 영웅이자 구원자로 등장하지만, 이들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 또한 그리 선하지만은 않다.
두 사람 모두 복수와 증오, 분노, 폭력성을 바탕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작중 맥스와 퓨리오사의 고달픈 행적들은 삶을 지배하는 문명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살아가는 선량한 이들마저 끝내 불의와 폭력의 무게에 짓눌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매드 맥스> 시리즈는 현재의 인류 문명이 결코 선하고 올바르지 않으며, 멸망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태로운 지경에서 그저 교만과 뽐내기에만 골몰하는 암울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 폭로한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매드 맥스> 시리즈처럼 종말에 대해 진중한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작품들이 계속 제작되고 좋은 평가를 받는 상황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런 작품들은 인류가 이룩한 업적에 도취돼 문명의 불의함과 위태로움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비유로나마 종말 위기를 알리고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