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구축함에서 설교단으로
과달카날 해전 아카츠키호 승선
전쟁 중 포로 된 신야 미치하루
포로수용소에서 예수 받아들여
신학교 나와 목회, 간증서 발간
본지에 비대면 성지순례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2년 이상 절찬리에 연재하고 있는 권주혁 장로님(국제정치학 박사)께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 59주기 추모일(7월 19일)을 맞아 특별기고를 보내 주셨습니다. 요즘 말로 ‘밀리터리 덕후’인 권 장로님은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해전 중 타고 있던 구축함이 침몰해 미군 포로가 된 일본 해군 대위가 포로생활 중 예수를 믿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에 돌아와 목사가 되어 요코하마에서 오래 목회한 신야 미치하루 목사님 이야기를 이번에 소개해 주십니다. 장로님은 신야 목사님의 구축함이 침몰 장소와 요코하마의 목사님 자택을 직접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
남태평양 솔로몬 군도에서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제주도 3배)과 사보(Savo)섬 사이에 있는 해협에서는 태평양 전쟁 동안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 해군 사이 여러 번의 대규모 해전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현대식 군함들이 해저에 가라앉아, 전쟁이 끝나자 이곳에 ‘쇠바닥만(Iron Bottom Sound)’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붙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11월 13일 새벽부터 15일 저녁까지, 이 해협에서는 미국과 일본 함대 사이 거대한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미일 양측 해군 모두 27척의 군함이 이 해협에 침몰하였다.
이 가운데는 일본 구축함 아카츠키(曉)도 포함돼 있다. 배수량 2천 톤인 아카츠키는 최고 속력 34노트를 내며 6문의 5인치 함포를 장착하고, 220명의 승무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당시 아카츠키의 수뢰장(水雷長)이던 신야 미치하루(新屋德治) 대위는 타고 있던 구축함이 침몰하자 부상당한 몸으로 물 속에 뛰어들었으나, 해전이 끝난 뒤 바다 위를 수색하던 미군 경비정에 의해 포로가 됐다.
구축함에 타고 있던 제6구축함대 전대장 야마다 유스케(山田勇助) 대좌(대령), 함장 다카스카 오사무(高須賀修) 중좌(중령)와 거의 모든 승무원이 전사하였으나 신야 대위를 포함한 몇 명만 물에 뛰어들어 살아남은 것이다.
그는 다른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과달카날 섬을 떠나 뉴칼레도니아섬을 거쳐 뉴질랜드 북섬 남부, 즉 수도 웰링턴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페더스턴(Featherston) 마을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수용소에는 750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는데, 이 가운데 400명은 일본 정부에 징용되어 과달카날섬에서 비행장 건설 공사를 하다가 미군 포로가 된 한국인 노무자들이었다.
미군은 이 비행장을 일본군으로부터 탈취한 후 ‘헨더슨 비행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미국 해병항공대 헨더슨 소령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필자는 1995년 헨더슨 소령의 친동생(6.25 전쟁 때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참전함)과 조카 부부도 만나서 형과 삼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무라이 전통을 갖고 있는 일본군에게는 포로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치욕이었다. 그러므로 포로수용소에서 뉴질랜드 군목이 아무리 전도를 해도, 일본군 포로들은 포로가 된 사실조차 치욕인데 적의 종교까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해 전도를 거부했다.
신야 대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신야 대위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성경을 읽는 동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3년을 보내는 동안 수용소 트러톤(Hessell W. F. Troughton) 군목을 통해 예수를 알게 되어 수용소에서 세례를 받았고, 전쟁이 끝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돌아온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다른 직업을 찾으려다 수용소에서 결심한 대로 목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일본 성서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1920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해군이 되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히로시마 근처 조그만 섬인 에다지마(江田島)에 있는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미국 아나폴리스, 영국 다트머스 해군사관학교와 함께 세계 3대 해군사관학교로 손꼽혔던 이 학교에 제68기(입학 300명, 졸업 280명)로 입학한 그는 3년 6개월의 교육이 끝난 뒤 해군 소위가 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남태평양 해역에 구축함을 타고 참전했던 것이다.
포로수용소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여러 명이었으나, 이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일본에 돌아온 뒤 예수 믿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1949년 신학교를 졸업한 신야 목사는 도치기현 가누마(鹿沿) 교회와 우쓰노미야(宇都宮)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구축함(驅逐艦)에서 강단(講壇)으로’라는 글을 월간 교회소식지에 올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1957년 <죽음의 바다에서 강단으로>라는 책을 발간했고, 많은 일본인들을 감동시켰다. 이 책은 1973년에 뉴질랜드에서 <죽음과 불명예를 넘어서(Beyond Death and Dishonour)>라는 제목으로 영문판으로도 출판됐다.
신야 목사는 도쿄 스기나미구(杉並區) 아케보노(曙)교회에서도 목회를 하였고 도쿄의 덴야에다(田園江田)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목회했다. 소년 시절부터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신야 목사의 요코하마 집 서재에는 물론 기독교 서적이 책장을 메우고 있었으나, 벽 한 면에는 그가 참전하였던 해전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쇠바닥만 해전(海戰) 지도 3장도 붙어있었다.
그는 설교 도중 “태평양 전쟁에서 적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고 수시로 간증했다고 한다. 필자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직업군인이 되기를 원하였기에, 신야 목사를 만났을 때 국경을 넘어 신앙과 애국심에 동질감을 느꼈다.
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 헨더슨 비행장을 둘러싼 과달카날섬 전투를 처음으로 알게 돼, 그 후 헨더슨 비행장을 꼭 보게 되기를 원하였다. 결국 필자는 헨더슨 비행장, 과달카날섬, 그리고 신야 목사의 구축함이 침몰한 쇠바닥만을 볼 수 있었고, 신야 목사가 포로생활을 한 뉴질랜드 페더스턴 수용도에도 가 보았다.
그 수용소의 책방에서 구입한 <죽음과 불명예를 넘어서>라는 책을 읽고, 신야 목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 후 필자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생산한 상품(목재)을 수입하던 일본 회사 거래처에 부탁해, 그의 주소를 얻어 집을 방문하였다. 신야 목사에 관련된 해전과 신앙 글을 쓰자면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므로,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
권주혁 장로
세계 145개국 방문
성지 연구가, 국제 정치학 박사
‘권박사 지구촌 TV’ 유튜브 운영
영국 왕실 대영제국 훈장(OBE) 수훈
저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기가 이스라엘이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