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의 구원론에 따른 한국교회 구원 신앙 되돌아보기
2. 한국교회 이신칭의 구원 신앙 문제해결의 대답으로서 코메니우스의 칭의와 믿음, 소망, 사랑과의 관계성에 관한 이해
1) 칭의와 믿음, 소망, 사랑과의 연관성
코메니우스는 “도대체 칭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의 대답에서, 그것은 법적 논쟁에서 방어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재판에서 무죄한 자로 인정되는 사건으로 설명한다. 이 말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유죄로 판단되거나, 또는 무죄로 선언된 일에 합당한 언어로 이해하였다. 그는 신실한 영혼은 화려하게 장식한 신랑(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어 거기서 칭의를 확인된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칭의는 신적인 본성(거룩)에 참여하는 기회(은혜)의 부여로(벧후 1:4) 이해하였다, 즉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심을 믿는 그것이 믿음인 셈이다. 그는 믿음과 칭의의 관계를 성립되게 하려고 신인(神人)의 의(義)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신인(그리스도가)이 고난받음으로써 우리에게서 상실된 무죄를 획득했으며, 우리의 상처받은 의(義)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그의 의(義)를 통하여 우리의 무죄가 방어되며,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그의 의(義)를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획득하게 된다고 일러준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에게 유용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을 믿는데, 우리는 그의 피를 통하여 죄에서 정결하게 되었으며,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었음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저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하여 의(義)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우리 것으로 삼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말씀대로 그의 순결을 본받게 되기 때문에 역시 행할 것을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 코메니우스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본받음이 사랑을 뜻하는데, 그것은 사랑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불타는 동경(憧憬)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일러준다. 그리고 믿음은 그의 모든 귀중한 것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포착하며, 사랑은 포용하며, 소망이 그를 붙드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코메니우스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과정이 믿음, 소망, 사랑과 어떻게 연관되어 전개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 특히 종교개혁 이래로 항상 과도하게 논쟁 된 질문, 즉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 것인지? 또는 행함을 통하여 의롭게 된 것인지? 그것에 대해 성경은 양자 모두를 상세히 말하고 있음을 밝혀 준다. 전자는 롬 3:24,28과 갈 2:16의 말씀에서이며, 후자는 약 2:24의 말씀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리고 너희는 부분적으로는 믿음으로, 부분적으로는 행함을 통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한쪽 것만을 가지고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단지 한 번, 그리고 간단히 칭의의 과정은 하나님의 행위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서로 분리하여 있는 일이 아님을 코메니우스는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에 인간 편에서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동일하게 필요하며, 전체적으로는 총체적인 결과와 관계 속에 있는 것임을 말하면서, 즉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일로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진실하게 꾸며대며 거짓으로 보이지 않으며, 또는 부분적으로 생각하면서 믿는 태도가 아닌, 전체에 대해 입증하는 행함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획득한 죄인들의 용서(칭의)를 보증하기 때문이며, 모두에게 지각과 믿음으로 불러내는 성령께 순종하는 자들에게서 이것을 보증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역시 코메니우스는 다음의 3가지 관점들이 칭의와 구원의 토대를 말해 준다고 일러준다. 첫째,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소망)는 하나님의 자비이며, 둘째, 아버지와 함께 우리와 화해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은혜)이며, 셋째,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은혜)이다. 그것들은 우리 인간 편에서 역시 3가지가 요구됨을 일러준다. 1)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참으로 바라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며(소망), 2)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며(신뢰), 3) 우리가 벌써 구원에 참여한 실제가 스스로 우리에게 보이게 되도록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 되는 것이다(사랑). 그렇게 무장된 자는 바울과 야고보와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을 올바르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을 코메니우스는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거기서 반발할 것은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며, 매일 믿음의 더 큰 빛과 사랑의 더 큰 불꽃과 더 큰 소망을 지향하는 마음의 일치와 조화와 내적인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일러준다.
이러한 언급에서 판단되는 것은, 코메니우스가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단순히 믿음 하나의 관점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직결된 통전의 시작으로 이해한 점이 우리는 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코메니우스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의(義)가 성경에 3가지 모습으로 전파되었음을 밝힌다. 첫째, 사제(司祭)로서의 인내, 둘째, 교사로서의 행동, 셋째, 그가 교회의 왕으로서 영원함이다. 그것들(그리스도의 의)이 다음과 같은 질서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면, 완전한 권리로써 우리의 소유가 되리라고 일러준다. 즉 먼저 그의 생명을 우리의 몸값으로 주신(마 20:28) 사제(司祭)로서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 자신 것이 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믿음을 통한 칭의(稱義)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 것이 되게 해야 하는데, 그의 거룩한 삶의 가장 정확한 모범을 통하여 우리를 그의 의(義)에 붙들리게 해야 한다. 그것이 행함을 통한 의(義)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이르기까지 전진(성화)해야 하며, 우리들의 목적 안에서 역시 피난처를 찾아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본성에 참여를 통해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도록(벧전 1:12), 그는 다시금 우리를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자들로 만들어 주었다(벧후1:4).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궁극적으로는 닻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몫을 얻게 되는 그것이 본질적인 하나님의 의(義)를 통한 칭의(稱義)인 셈이다(의롭다고 인정함). 달리 말해서, 이러한 세 번째 단계는 그가 스스로 계신 것처럼(요일 3:2),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소망과 신뢰를 통한 칭의를 뜻한다. 그것은 요한이 이따금 하나님에게서 탄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전파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신분의 마지막 정점으로 이해하였다(요일 3:9).
여기서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구원론은 루터에게서처럼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란 명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믿음, 소망, 사랑의 관점에서 칭의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는 기독교 구원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의 신앙 본질로 이해된 구원론의 통찰에서만 이신칭의가 초래하는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음을 또한 확인하게 된다. 그 이유는 믿음, 소망, 사랑을 중심에 둔 코메니우스의 구원론은 전인적이며, 윤리적이며, 영성과 관계된 총체적인 기독교 구원론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구원론은 매 상황에 따라 야고보서가 행함을 강조한 것처럼, 바울과 루터의 의미에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란 이신칭의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는 일방적 주장의 단면성과 그것으로 안심하고 만족해하는 구원의 자만심의 문제를 극복하는 신학적인 대안임을 확인하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여러 사도에 의하여 차별적으로 표현된 성서의 말씀은 청취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재해석 되어야 할 것을 일러준다. 그 이유는 첫째, 바울이 믿음을 통한 칭의를 강조한 것은, 말하자면 율법의 행위에 대한 신뢰(믿음)로부터 잘못 인도된 것과 그리스도의 희생과 공로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거절했던 개종한 기독-유대인들과 관계된 것 때문이었다. 둘째, 야고보서는 행동을 통한 칭의에다 중점을 놓은 것인데, 그는 말하자면 믿음 안에 확고히 서 있었으나, 믿음을 통한 칭의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을 남용했던 자들과 행동했었기 때문이다. 셋째, 요한은(그는 마지막 사람으로서 성경을 기록하였고, 기독교의 비밀을 그의 절정으로 이끌었기 때문임) 기독인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닮아야 할 뿐만 아니라, 역시 본질에 있어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러내기를 열망하게 되어야 할 기독인들에게 그들의 존엄성을 보여준 것이다. 넷째, 사람들은 베드로에 의해, 이러한 모든 진술의 3가지 단계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들의 정화(벧전 1:18-19, 2:24, 3:18)에 기초한 믿음을 통한 칭의를 강조하기 때문이며, 둘째, 삶, 또는 행동을 통한(벧전 2:21,24) 칭의를 강조하기 때문이며, 셋째,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중재된(벧전 1:14-15, 4:14, 1:14) 본질적인 칭의를 말해 주기 때문임을 밝혀 준다.
결과적으로 코메니우스는 칭의를 하나님 안에서 온전함을 향한 우리 신앙의 움직임의 출발점으로 이해하며, 칭의와 온전함(성화)은 마찬가지로 믿음과 소망처럼 불가분리의 관계로 서로 예속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믿음처럼 그렇게 우리가 먼저 행동하는 사랑의 움직임 안에서 갈망했던 언약을 향하여 움직일 수 있는 근본토대가 분명하다. 이러한 완전함을 향한 칭의와 성화(영화)의 통전적 관계는 벌써 코메니우스의 범지혜 배움을 통한 교육 선교론에서도 확인된다(골 1:28). 우리는 여기서 코메니우스의 구원론은 칭의에서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칭의와 성화 사이에서도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2) 믿음과 행함(사랑)만 생각하고, 소망을 망각한 신앙의 문제성 비판(코메니우스)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루터의 프로테스탄트와 중세가톨릭 교회는 구원론에 관한 논쟁과 함께 서로 믿음과 행함(선행/사랑)의 중요성만을 각각 주장하다가, 결국 소망에 관해서는 전혀 침묵하며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벌써 17세기에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모습에서 나타나는 온전한 구원 신앙 문제점의 지적과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그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1660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이성의 분별력“(Ratio)이란 책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특히 그는 그 책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란 소주제를 첨부하여 기독교 구원 신앙의 본질에서 믿음과 사랑만이 아니라, 소망도 잘 보존하고 가르쳐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학적인 체계를 구분하거나, 하늘의 구원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준비하는 3가지 바울 사도의 구분을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보존하지 않고, 말하자면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음과 사랑’ 안에서, 왜 두 부분으로만 나누는지에 대하여 참으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경건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 아무것도 진기하거나 위대하지 않은 것처럼, 또는 단지 이따금 조금씩 말해 주는 것이 충족한 것처럼 생각하는 행위는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러면서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체결했던 가장 최초의 장엄한 언약은 이 3가지 항목인 믿음, 사랑, 소망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 3가지는 역시 새 언약의 창시자이며, 신약 시대에 구원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 가운데 명하신 것이며, 사도 바울과 여러 사도에 의하여 전파되었으며, 초대교회 교부들이 잘 보존하여 전수해 준 기독교 구원 신앙의 본질로서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계속 전파하고 깨우쳐야 할 기독교 구원의 진리임을 강조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러한 소망의 망각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란 이신칭의의 지나친 강조가 초래한 문제로서, 참된 믿음을 근거로 칭의(稱義)의 선물인 소망의 모든 대상이 벌써 가시적으로 충분히 경험되고 확인한 것처럼 인식하여, 소망의 가치들을 외면하고 상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더 노력해야 하는 신앙의 목표를 상실한 모습이며, 거기서 기독인의 신앙은 안일과 안주와 나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오직 믿음으로(ola fide)란 이신칭의가 벌써 미래적인 영광의 미리 맛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칭의의 영광이 결단코 직접적이거나, 수동(자동)적으로 미래의 목표로 그대로 옮아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래서 기독인의 행동에서 믿음과 소망 사이에는 특별한 긴장이 생겨나기 때문에, 인간에게 요구되는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償)을 위하여 달여가야 하는” 소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빌립보서(빌3:12-14)의 인용으로 충고하였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생각은 오늘날 현대 개혁신학의 구원론에서 벌써 논의된 이미(칭의) 와 아직(종말론적인 구원 신앙/최후의 심판) 사이에 나타나는 기독교 구원 신앙의 긴장 관계를 전제한 이해와 일치하며,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믿음, 소망, 사랑과의 연관성을 지닌 소망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기독교 구원 신앙의 선구자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한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생각에 의존하여 믿음. 소망, 사랑의 신앙 본질로 이해한 통전적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이신칭의 구원 신앙의 비윤리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비결)이며, 믿음, 소망, 사랑 그 자체가 구원 신앙의 원동력임도 확인하였다. 여기 구원 신앙의 원동력이란 성령의 도움에 의한 구원 신앙 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령의 은혜로 깨닫게 된 진리의 자유에 이름과 그 자유의 책임에 관한 그 신앙의 본질을 전인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것은 루터가 오해했던 대로 구원(의)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서의 행위가 아니며, 성령의 은혜 아래서 하나님의 3가지 계시(구원, 계명, 언약)에 대한 전인적인 응답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것(믿음, 소망, 사랑)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이해하고 전파하던 복음의 진수(眞髓)이며, 사도바울에게서 확인되며, 교부 시대의 어거스틴과, 15세기 형제 연합교회와 17세기 코메니우스에게로 이어져 온 역사적인 기독교 구원 신앙의 본질임도 확인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로 전인 관계에서 응답하며 자유로운 은혜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거기서 성령이 함께하시는 신앙의 역동성(Dynamic of Faith)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루터의 이신칭의 구원론의 종교 개혁적인 역사적 의미는 존중하되, 믿음, 소망, 사랑의 구원 신앙 본질의 관점에서 기독교 구원론의 의미를 더욱 새롭게 확인하기를 바라며, 특히 사도바울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일러주면서(고전13:8), 왜 “믿음, 소망, 사랑, 이 3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전13;13)고 말했던지를 깊이 되새기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말씀을 따라, 그간 상실한 한국교회 구원 신앙의 원동력이 믿음, 소망, 사랑의 성숙한 신앙으로 온전히 회복되며, 나아가 한국교회를 더욱 새롭게 하며, 우리 사회로부터 상실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이 세대를 위한 구원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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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교수(전 총신대학교 총장, 현 한국 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