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1. 현 상황: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세상의 정치는 요지경이다. 국제 사회나 국내 상황은 ‘정치는 거대한 쇼(Show)’라고 웅변하는 것 같다. 이미 정치가 하나의 정교한 엔터테인먼트로 전환되는 시대에 쇼라고 해서 폄하하는 의미는 아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되어야 하기에 정치는 모든 과정에서 투명해야 하며 절차에 불의가 있어서는 안 되며, 국민의 능동적 참여가 절대적이어야 한다. 정치는 국민이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함께 행동해야 하기에 재미와 흥미가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그러다 보니 흥행(?)에 성공해야 유권자들의 표와 지지를 얻게 되지 않는가.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 나아가 당대표 선출 등과 같은 선거에 고도의 ‘연출력’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공의와 진실에 의한 정당한 연출력이다. 현대 정치는 그런 의미에서 진심을 호소하고, 그 기반에서 정권을 쟁취하려는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 니체)로 표출되는 한판 멋진 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내, 국외 여러 상황을 보고 있으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5-8).
현재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현상들은 그야말로 종말론적이다.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리라 예언된 그런 현상들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각 처에서 쉬지 않고 들려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일들이 또한 끊이지 않는다. 외신을 타고 들어오는 국제 소식들은 지구의 종말이 멀지 않음을 예견케 하기에 충분하다. 지구 종말시계는 거의 자정에 가깝다고 하지 않는가!
종말을 재촉하는 원인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성경은 여러 교훈으로 말씀하신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현재는 ‘왕’이 너무 많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본다. 도처에서 진보의 왕, 보수의 왕, 사이비 진보의 왕, 사이비 보수의 왕, 각종 권력중독증 환자들, 암약하는 수많은 로비스트 등등 정계(政界)에 들어와 있는 이들이 벌이는 쇼 때문에 그야말로 정치판은 난장(亂場)으로 보일 때가 있다. 국민들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하고 무관심하게 하는 것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려는 교묘한 쇼일까? 정치의 중도(中道)는 협치와 상생이며, 이로 인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 홍익인간(弘益人間)이게 하는 종합예술이 되어야 하거늘 정계가 우려스럽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사태에 이른 것은 왜일까?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다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사 시대의 재현인가?
그러함에도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주님 음성을 들어야겠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경고를 가슴에 새기자.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b). 지금 대한민국은 지배자들이나 피지배자들이나 그릇 행하여 각자가 좋아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마 7:13)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은 이러한 결과와 후유증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할 시점이다. 더 늦기 전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마 7:14)으로 가야한다.
2. 정치 환멸증후군: 현대의 허무주의
현대를 일컬어 초연결사회, 초개인화사회라 한다. 인터넷, 모바일로 접속(access)에 접속을 하다 보니 연결망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다. ‘내’가 주체가 되어 접속을 시도했는데 사이버 세계에서 ‘나’는 사라지고 부호와 기호, 아바타가 나를 대신해 준다. 나는 어디 있는가? 익명으로 환치되어 나는 숨어버리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나의 위상이 혼미해지기 때문이다. 광대한 익명의 우주 안에서 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을 느낄 때는 안심이 되지만 세계라는 불특정 세계로 들어갈 때는 혼란스럽다.
세계는 추상화된 지구, 즉 가상의 세계처럼 자아(Self)를 삼켜버린다. 익명성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그 형상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모습 아닌가. 문제는 현재의 삶을 지배하는 권력은 무엇이며 누가 그 힘을 쥐고 있는가? 마치 삼국시대 제자백가들이 활개치며 정권을 주무르듯, 세상을 인간의 교묘한 지략과 힘의 논리에 따라 좌지우지 하는 형국이다. 힘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약육강식이 판친다. 시대는 원시 사회로 다시 회귀하는 것 같다. 노골적인 야만성이 그야말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설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본격 궤도에 오른 탈중심, 탈가부장, 탈전통, 탈역사의 파도는 ‘나’를 강조하면서 반면에 ‘나’를 상실하게 했다. 이른바 초개인화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인본주의 구호가 이제는 “모두가 모두의 척도다”로 바뀌었다. 절대적 가치와 세계관은 상대성에 자리를 내어주고, 개인의 존엄조차 전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밀려난다. 세상의 권력은 개인의 자유와 복지 보장이라는 안전망을 내걸지만 어느 순간 비정한 헤게모니로 다가온다. ‘전체가 살아야 개인이 산다’(나치즘 대표 프로파간다) ‘국가가 유지되야 국민이 있다’로 돌변한다. 의식있는 시민이 그 진실을 깨달을 때 행동하기에 이미 늦어 버린다.
프랑스 혁명이 주장한 자유 평등 박애는 시민혁명으로 계승되기보다 신자유주의 아래서 신기루가 된다. 양극화가 <설국열차>처럼 달려가고 승객들은 더 안락한 객차로 갈아타기 위해 목숨 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 비정한 사회에서 패자는 승자에게 무릎꿇고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챙겨먹어야 하는 <기생충> 정도로 낙오하게 된다. 이 모든 결국은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볍게 여기는 세상 주권자들의 3만(교만, 오만, 자만) 때문이리라. 세상은 각자도생, 케세라세라를 되뇌이며 뼈대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게 된다. 세상에 영적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이다. 이른바 허무주의(nihilism)이다. 현대 정치는 주권의 주체인 유권자들을 정치적 허무주의로 미혹한다. 점점 그 힘이 강해진다. AI 연결망 속에서 개인은 고유의 설 자리를 잃어간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예견한 빅브라더에게 지배당하게 된다. 딥스테이트니 세계정부니 가공할 음모론(conspiracy)이 끊이지 않는다.
3. 권력도 하나님 주권 아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세상 권력은 선거로 주어진다. 선거에서 이기면 통치권을 얻는다. 선거가 공명선거가 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사도들은 세상 권력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고 선포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베드로 사도는 어떠한가.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총독에게 하라 /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3-15). 그런데 지배자들이 권력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모세의 열정, 애국주의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국 동포를 위해서 애국적 행동을 했다고 자부했었다. 그럼에도 이 일이 드러나 광야로 피신했어야 했다. 현재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라며 목청을 돋운다. 하지만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모세처럼 이러한 탄원과 원성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출 2:14).
하물며 이기심과 야욕에 의해 정치를 그르친 이들에게 쏟아지는 분노는 어떠하겠는가. 곳곳에서 “저항하라!” 시위가 멈추지 않는다. 법적 조치에 의하여 해직이나 명예손상 당하는 정도는 그나마 참회의 기회가 될 것이다. 심하면 생명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무릇 모든 직위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여기어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자세로 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들에게 이런 저항은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비록 선거를 통해 집권자들을 뽑기는 하였으나, 그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4. 책사로서 선지자
세상 권세의 주관자들이 전권을 갖는다해도 혼자서 일할 수는 없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세분화 되어 있고, 전문화가 깊숙이 진행된 시대에 독불장군은 정치할 수 없다. 정치는 사회 각 분야를 조율하고 최대의 효과를 가져오도록 해야 하는 종합예술이다. 다양한 소리를 최상의 음률로 아우르는 오케스트라이어야 한다. 정치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쇼로는 완성될 수 없다. 유능한 책사(策士)가 함께 해야 한다. 지금 시대에 유능한 책사는 어디에 있는가!
고전 시대에 책사는 왕의 측근에서 난세를 헤쳐나갈 혜안을 제시해주며 구체적인 결단이 필요할 때 조언하는 모사(謀士)의 역할이었다. 조선 시대로 예를 들면 여러 재상들, 청백리 이항복, 황희, 유성룡 등은 누구보다 사적에 남을 책사의 직을 감당했다. 임금이 그들의 간언을 두려워했다. 백의종군으로까지 나라와 백성을 지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책사 중 책사라 아니할 수 없다. ‘충신(忠臣)은 나라를 지키고, 간신(奸臣)은 나라를 허문다’는 격언은 시대마다 충신의 역할을 한 책사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짐작케 한다.
이제 믿음의 눈으로 책사를 살펴보자. 세상과 자연의 이치에 통달하여 지혜를 내는 인간적 책략을 가지고도 나라와 백성을 살리고 죽이는 역할을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인물들에서는 어떠할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믿음의 책략이란 관점을 적용을 해본다면 우리 시대를 향한 소중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자상하신 분이시다. 역사를 주관하실 때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일러주신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 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예상문제라고나 할까?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선지자와 역대 선왕들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 비록 인간적인 부족함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행하는데 본을 보인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는 한 가지 대표적 사례, 나단 선지자와 다윗 왕의 관계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성취를 위하여 동행하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뛰어난 선왕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다윗은 결정적인 죄를 범한다. 밧세바를 얻기 위해 그 남편이자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정치 살인극을 기획했다. 완전 범죄에 묻혀버릴 이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적자가 없는 절대군주 앞에 누가 나아와 그가 죄를 범했다고 고발할 것인가. 그에게 공의를 말할 자 누구인가. 그런데 있었다. 선지자 나단이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선지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으로 나온다. 다윗에게 한 비유로 이야기 한다. 이 이야기 끝에 다윗은 정의감에 충만하여 격정의 노를 발한다. “...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삼하 12:5). 다윗은 나단의 비유가 자신에게 향한 것인 줄 모르고 공의로운 척 행동한다. 피할 수 없는 자충수였다. 스스로에게 심판을 내린 것이다.
이제 나단이 담대히 심판의 판결을 내린다. “...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으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몸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 12:7-9). 가슴을 후려치는 심판 앞에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주님 앞에 고꾸라진다(참고, 시 51편). 다윗의 역사는 그가 회개하였을 때 다시 지속된다. 오, 이런 권세자들의 회개를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면!
절대자 왕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하고, 왕의 죄악을 호통칠 수 있는 선지자.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이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행동 아니었던가. 왕의 죄상을 들추어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고 경책하다니. 나단은 다윗 왕의 죄악을 경책하라시는 하나님의 준비된 선지자였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연히 행동했던 것이다. 모두가 “이 때를 위함”이었던 것이다(참고, 에 4:14,16).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런 선지자를 볼 수 있는가? 세상의 군왕에게 정의와 공의로 호령하고 그들의 적폐를 지적할 수 있는 그런 선견자를 발견할 수 있는가? 정의를 외치지만 권세자들에게 타협하고, 자기 권력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지금 이런 선지자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5. <고도를 기다리며>, 참을 수 없는 가벼운 비관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 현 상황, 이를 일컬어 정치쇼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가 국민을 보듬어 안고 같은 마음과 비전으로 전진해도 부족한 판에 갈등과 반목을 유발한다. 현재와 미래는 불확실하고 고난의 파도는 넘실댄다. 국민들은 실존의 불안을 심각하게 체득하고 있다. 고난이 보편화되는 시기에 사람들은 무얼 기대할까. 본능적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줄 구원자를 기다린다. 이른바 구원자 증후군이다.
대부분의 민족 신화에는 이런 구원자 대망 사상이 들어있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이 구원자 열망은 그대로 새겨져 있다. 민족 신화는 예외 없이 민족을 구한 영웅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영웅담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국민들은 구원자를 기다린다. 어느 특출한 인물이 나와서 현실의 고난을 평정하고 삶을 안정시켜줄 수 있는 그런 영웅은 없을까. 혹 언제 그런 인물이 나올지 모두가 기대한다. 그러다 스스로 악수(惡手)에 걸린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낭패가 있기도 하다.
나치주의(Nazism)는 바로 이런 사회심리 현상을 최고로 이용했던 정치집단이었다. 독일은 일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정치, 경제의 피폐함과 인플레이션에 의한 물가 불안, 그리고 무너진 민족적 자존심을 다시 재건하려는 애국적 민족주의가 그 중심에 있었다. 독일 국민들은 재건을 실현하기 위해 영웅이 필요했다. 여기에 나치주의자들이 집결하고 히틀러를 총통으로 선출하여 절대 권력을 쥐어주었다. 꿈이 이루어지는가 했다. 하지만 국민은 노예가 되어 가고, 최고지도자는 우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들이 기다리던 정치적 영웅은 독재자가 되어 환호하는 국민을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 넣었다. 지금도 역사는 경고하고 있다.
베케트(S.Beckett)는 자신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로 일약 세계적 작가가 되었다. 1960년대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의 깊은 상처 속에서 유럽인들은 실존의 경계에서 방황했다. 그리고 반문한다. 만약 우리에게 제대로 된 구원자가 있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우리에게 제대로 된 구원자가 있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고, 폐허를 딛고 재건하기에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에게 제대로 된 구원자가 있었다면... 이 실존의 참극은 해피엔딩으로 전환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걸출한 영웅, 구원자는 오지 않았다. 아니 신은 그런 구원자를 보내지 않았다.
베케트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인류는 신적 구원자를 기다리고 기다리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수백 년, 수천 년 기다려 왔지만 결국 오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그런 구원자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적막한 사막 속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의 모습.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기다리다 지쳐서 ‘동쪽에서 오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환대하려는 자들의 허망함. 그 허무함, 작가는 황량해 보이는 무대 위에 초라해진 현대인들의 내면, 허무한 몸짓을 고발하고 있다. 고도는 진정한 구원자일까. 그는 오고 있는가. 등장인물들은 이렇게 말한다. ‘고도가 온다는 소문은 있지만 안 올 수도 있지. 그가 안 와도 상관없어...’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살아간다는 현대인, 그 초상에 관한 패러디가 뼈아프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베케트의 ‘고도’인가 아니면 고도라는 상징 속의 그 어떤 구원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 압제에서 구원자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선지자를 통해서 분명하게 들려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적 사자는 언제 오는가. 그는 정녕 와서 우리의 억압된 삶을 평탄케 할 것인가. 이스라엘은 그렇게 ‘고도’를 기다렸다. 예수의 이적과 소문을 들은 이들이 와서 묻는다. “...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20).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거는 기대감, 당신이 우리가 기다려오던 그 인물인가. 당신은 정말 정의와 공의로 권력을 바로 사용하고 국민을 바로 이끌 수 있는 그 인물인가. 수없이 의문과 검증을 반복해도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불신과 회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우리 앞에서 멋진 연설과 정견을 발표하는 당신이 바로 그 구원자인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가.
6. 이 시대의 <큰 바위 얼굴>
이런 상황 속에 떠오르는 <큰 바위 얼굴>. 호손(N.Hawthorne)의 작품으로 은은한 감동과 교훈을 안겨준다. 어느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한 소년이 다른 이들처럼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린다. 모든 이들이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번번히 실망한다. 큰 바위 얼굴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노인이 되어가고, 어느 날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님’을 기다린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외친다. 그가 바로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이었다고. <고도를 기다리며>가 오지 않을 영웅을 기다리는 허무한 인간 상황을 그리고 있다면, <큰 바위 얼굴>은 당신 자신이 바로 그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페시미즘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몸짓으로는 일어설 수 없다. 일의 도모는 믿음의 몸짓에서 시작된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우리는 묻는다.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자는 언제 오는가.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우리가 기다리는 ‘큰 인물’은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나는 여러 기회의 후보들, 지방자치단체장에서부터 당대표, 국회의원,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정말 우리가 기다려온 ‘그 인물’일까. 과연 그가 난세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신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가들은 이 구절을 통해 만인제사장설을 발견했다. 주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르게 되면 곧 그 큰 바위 얼굴이 되리라고. 중세교회가 장악했던 교권주의에서 신자들을 해방시켜 복음 안에서 성도(Saint)가 되리라고.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없다. 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백성들을 통해 그 분의 역사를 이루어진다. 그 어떤 인간적 영웅을 기다리기 보다 예수의 복음 안에서 섭리를 기다리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길이 곧 가야할 길이다.
7. 새 영으로 새 시대를 창조하므로!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작정은 혼란한 시대에 갈 길을 보여준다. 그 길은 새 언약(렘 31:31)을 이루기 위해 새 영을 부어주시리라는 예언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두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대한민국이 새롭게 세워져야 한다. 이 역사를 위하여 영웅이나 구원자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복음으로 세워진 믿음의 백성 한 명 한 명이 곧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인쳐진 성도들이 이 역사에 부름받은(calling) 자들이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이며,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3)를 취한 이들이먀 곧 십자가 군사로 나선 이들이다. 집권자를 깨우치고 난세를 평정하는 고귀한 역할을 맡은 이들이다.
대한민국의 각 영역들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국방, 외교, 언론, 스포츠, 예술 등등. 모든 성도가 예언자적 상상력에 붙잡힌 바 되어 선한 역할을 감당할 때 대한민국은 살아날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 권력 다툼으로 혼탁해진 사회를 새롭게 할 것이다. 성도의 소명과 역할은 주님을 향한 고백에서 나온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b). 오직 주의 나라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