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샤먼: 귀신전> (3)
무속과 점: 앞날의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한 세 종교문화, 풍수와 관상과 무속
무속, 역사 유규한 민족 전통종교
관상·풍수와 무속과 기원 다르나
길흉화복 점치는 속성 공유하다
시간 지나면서 같은 부류 인식돼
인생 컨설팅·솔루션 제공 서비스
희생? 무속인들 악행 날로 늘어
무속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전통 종교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속의 긴 역사가 그 사회적·영적 유익함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계몽이 덜 진행된 사회에는 항상 유구한 전통을 가진 인습이나 악습이 곳곳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최근 여러 무속인들의 사기와 갈취 행태는 무속이 영화나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그저 신비롭고 영험한 풍습이자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근자에 무속에 대해 좋은 방향으로 인식 변화가 일어난 데는 대중문화와 모바일 미디어 역할이 크다. 무속인이라는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룬 영화 <곡성>이나 무속에서 존숭하는 신령을 중심 소재로 삼은 드라마 <도깨비> 외에도 <관상>, <풍수>, <파묘> 같은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며 무속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크게 개선시켰다.
엄밀히 말해 관상이나 풍수는 무속과 근친성은 있지만 그 문화적·사상적 기원이 다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풍수와 관상은 무속과 구별되는 종교적 영역으로 인식됐다. 조선 건국 시기 도읍을 결정하는 사안을 두고 각자의 풍수 이론을 가지고 대립했던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사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여러 관상쟁이들의 활약상이 이를 증명한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최고의 가치로 받들었던 인물이고, 무학대사는 이름난 승려였다. 태조 이성계의 관상을 본 것으로 유명한 관상가 혜징도 승려였고, 정도전의 동문이자 태종 이방원의 책사로 정승 벼슬까지 지냈던 유학자 하륜 또한 유명한 관상가였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최측근 가운데는 조선 최고 관상가로 이름난 박유붕이 있었다.
만일 풍수와 관상이 무속의 지류로 여겨졌다면 정도전이나 무학대사, 혜징이나 하륜이 풍수지리나 관상 이론을 설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여러 군왕이나 권세자들이 관상가들을 총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마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상과 풍수가 무속의 지류로 편입되거나 무속과 결을 같이하는 주술로 인식되게 된 듯하다.
이는 무속, 풍수, 관상 모두가 앞날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주술로서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 초 천만 관객을 달성하며 크게 흥행했던 영화 <파묘>를 보면 오늘날 무속이 세간에서 풍수와 동종의 종교문화로 여겨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속인들이 점을 치면서 관상학 이론을 자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예능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결국 세간에 인식된 무속의 본질은 점술이다. 어떻게 해야 병마와 잡귀에게 시달리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주는 인생컨설팅 및 솔루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무속인들의 주된 역할이다.
예언과 점: 기독교적 예언의 본의(本意)를 왜곡하는 무속의 점술 문화
바울, 점술과 예언 차이를 보여줘
점술, 다른 영에 의해 주어지는 말
주로 개인 운명과 욕망에 결부돼
예언, 하나님 성령 의해 주어지고
교회·민족·나라·인류 앞날 관련돼
대중문화 속 무속, 경계심 가져야
간혹 교회에서도 개인의 앞날에 대한 예언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신앙과 순종의 방향 자체를 좌우하지는 못한다. 교회는 개인에 대한 예언보다는 말씀의 지식에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점술에 특화된 무속의 문화적 확산은 예언에 관한 교회 내부의 질서잡힌 지식을 희석 또는 오염시킬 우려가 있다. 그래서 교회는 더더욱 대중문화 속 무속에 대해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제보다 훨씬 신비롭고, 영험하고, 친숙하게 미화된 무속에 대한 이미지가 일반 대중을 넘어 교회 내부에까지 경건하지 못한 이교적 풍습을 전파하는 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널린 퍼진 종교적 속설 가운데 유명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천기누설’ 위험성에 대한 속설이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 혹은 한 나라의 앞날에 대해 점치는 일에는 반드시 어떤 대가가 따른다는 믿음이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그 점술 내용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경우, 이를 밝히는 데 대한 대가가 더욱 커진다. 대개 미래를 점친 자의 목숨이 희생되거나 그 후손이 불운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속설은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통용된다. 그래서 점을 치는 무속인들은 그들의 고객에게 마치 숭고한 희생자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점을 치고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겉보기에는 막강한 카리스마와 큰 경제적 이익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무속인들의 인생 전체를 그들이 떠받드는 신에게 바쳐야 하는 희생이 뒤따른다.
이는 실제로 접신을 통해 무속인이 된 이들의 공통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속을 소개하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속인들은 마치 숭고한 희생을 감내하는 선한 종교인들처럼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떨까? 양심적으로 영업하는 무속인들도 있지만, 자신이 가진 카리스마와 무속인들의 희생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무기삼아 고객들을 등쳐먹는 이들도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개신교, 불교, 천주교 등 고등종교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리와 불법행위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무속인 집단에서도 사이비 무당들이 악행을 저지른다.
사이비 무속인들에 의해 발생하는 폐해의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가스라이팅을 통한 갈취, 폭행, 성폭행 등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힘든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무속인들의 불법행위는 거의 다 사후 처방에 그치고 만다. 이는 무속인과 그 고객의 관계가 종교의 자유라는 권리개념 안에서 방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은 무속이 ‘종교’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수록 더 빈번하고 심각해질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무속인들이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 서비스를 통해 상시적으로 고객들과 소통하기 때문에, 사이비 무속인들이 일반 대중의 일상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로가 대폭 확장돼 있는 실정이다.
무속이 이처럼 우리 일상생활에 더 친숙하게, 그리고 긴밀하게 엮이게 되면서 발생할 부작용 가운데는 사이비 무당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입장에서 보면 점치는 일 즉 자의적 예언의 미혹에 넘어가는 교역자들이 생겨날 공산이 크다. 무속과 점치는 일에 대해 별 경계심 없는 신자들이 예언을 바라게 될 때 이를 이용하려는 이단 사이비 지도자들의 활동 또한 더 활발해질 수 있다.
성서의 예언은 개인의 앞날에 대해 알려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거의 민족·국가·인류 단위의 앞날을, 그것도 율법과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 내용만을 전한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애초 하나님의 성령이 아닌 다른 신의 힘으로 앞날을 말하는 경우, 그것이 어떠한 내용을 전달하든지 영적으로 유익하거나 유효한 것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일례로 복음주의적 성서해석을 중시했던 성서주석학자 프레드릭 브루스(F. F. Bruce)가 그의 저서 <사도행전 주석>에서 밝힌 것처럼, 바울 사도는 아폴로 신을 섬기며 점을 치던 여종(pythoness, 아폴로의 말을 듣는 여사제)이 바울과 실라를 가리키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행 16:17)”라고 말했어도 그 내용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 말 내용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말의 주체가 점치는 자에게 접한 신이었기에 동조하거나 인정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성령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선지자 아가보의 말(행 21:10-14)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브루스의 주석에 따르면, 아가보의 예언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의 죽음을 미리 아셨던 것처럼 바울 또한 복음을 위해 죽을 것임을 미리 알리는 내용이었다. 즉 바울에게 아가보의 예언은 죽음을 피하라는 내용이 아니라, 죽음에 앞서 지혜롭게 사역을 예비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런 바울의 태도는 샤먼들의 점술과 기독교의 예언 사이에 드러나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 준다. 샤먼들의 점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에 의해 주어지는 말이며, 주로 개인의 운명과 욕망에 결부돼 있다. 반면 기독교의 예언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주어지며 교회, 민족, 나라, 그리고 인류의 앞날과 신앙에 관련돼 있다.
간혹 교회에서도 개인의 앞날에 대한 예언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그의 신앙과 순종의 방향 자체를 좌우하지는 못한다. 교회는 개인에 대한 예언보다는 말씀의 지식에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점술에 특화된 무속의 문화적 확산은 예언에 관한 교회 내부의 질서잡힌 지식을 희석 또는 오염시킬 우려가 있다. 그래서 교회는 더더욱 대중문화 속 무속에 대해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제보다 훨씬 신비롭고, 영험하고, 친숙하게 미화된 무속에 대한 이미지가 일반 대중을 넘어 교회 내부에까지 경건하지 못한 이교적 풍습을 전파하는 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좁은문은혜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