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지옥에서 온 판사> (2)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회에 이어 SBS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를 분석합니다. 이 드라마에는 악마 판사 ‘강빛나(박신혜)’를 비롯해 경찰 한다온(김재영), 구만도(김인권), 이아룡(김아영), 오미자(김영옥), 정재걸(김홍파), 정태규(이규한), 장명숙(김재화), 김소영(김혜화), 박동훈(김지훈), 고은섭(박지훈), 정선호(최동구), 김재현(이중옥), 문동주(하경민), 안대용(김광규) 등이 출연합니다. -편집자 주
드라마 속 판타지: 판타지 서사가 드라마 업계를 양분하기까지
2000년대 이후 장르문학 활성화
국산 판타지 드라마도 본격 시작
드라마로 내세 관한 호기심 충족
<신과 함께>, <도깨비> 결정적
<지옥에서 온 판사>는 2000년대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내세를 배경으로 삼는 판타지 장르 서사를 다룬다. 과거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판타지 장르는 금기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특히 1995년 3월 케이블 채널 서비스가 시작되기 전의 방송가, 즉 공중파 3사가 드라마 방영권을 독점하던 시절에는 판타지 요소가 드라마 서사에 거의 관여될 수 없었다. 아주 드물게 <전설의 고향> 같은 고전극 시리즈에 저승이나 혼령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다였다.
당시 방송가는 드라마 내용 선정이나 심의에 매우 보수적이어서, 판타지 서사를 각본으로 채택하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시청자들 또한 국산 공중파 드라마로 판타지 서사를 접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니 방송에서 판타지 드라마를 보려면 외국 드라마를 봐야 했다. 이에 <육백만불의 사나이>, <후 박사의 모험(닥터후)>, <브이>, <내 친구 바야바>, <환상특급>, <천사 조나단> 같은 미국산 공상과학, 몬스터, 심령, 내세 관련 판타지 드라마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곤 했다.
국내 드라마 업계에서 판타지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주로 사극 부문이었다. 역사적 고증은 포기하는 대신 판타지 서사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시청자들 정서에 맞는 서사를 선보이면서, 극에 신비감을 더하기 위해 신화적 요소들을 도입하여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2006년 방영된 <주몽>과 2007년 방영된 <태왕사신기>를 본격적 출발점으로 볼 수 있고, 이후 유사한 형태의 드라마가 여러 편 제작되었다.
또 2000년대 국내 장르문학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고 이 시장이 온라인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국산 판타지 드라마에 거부감이 없는 시청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를 배경으로 삼는 드라마에도 점차 판타지 서사요소가 유입되기 시작한다. 2010년 방영된 <시크릿 가든>, 2013년 방영된 <별에서 온 그대>가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판타지 드라마는 갈수록 한국 드라마 시장의 주변부가 아닌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현재는 웹소설-웹툰-드라마의 활발한 미디어 믹스를 통해, 판타지 드라마가 남녀간 연애사를 다루는 드라마와 함께 해당 업계를 거의 양분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 판타지 드라마 분야에서 유독 눈에 띄는 영역이 있다면, 내세나 영혼에 관한 서사를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2016년 이래 무속, 신화, 불교 교리,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이리저리 뒤섞은 작품들이 우후죽순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국내 웹툰업계에서 전설적 흥행기록을 남긴 <신과 함께>(2010) 시리즈와 드라마 <도깨비>(2016)의 파급효과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신과 함께>는 2017년과 2018년 영화화돼 극장가에서도 두 편 모두 천만 관객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내세와 영혼에 관한 판타지 서사가 웹툰, 영화, 그리고 드라마 업계에서 모두 폭발적인 흥행 기록을 낼 수 있었던 까닭에, 이제는 방송가에서도 거의 주기적으로 내세 관련 판타지 드라마가 제작되곤 한다.
드라마 속 내세: 구전설화 및 마술서와 동격의 레퍼런스 취급을 받는 성경
한민족 내세에 대한 믿음과 관심
선교사들 기독교 전파에 큰 도움
민속신앙 잔재 유입 부정적 영향
성경, 전래설화 비슷한 문헌 취급
내세 관련 판타지 드라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일견 당연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세속화되고 과학주의가 득세한다 할지라도, 무한·초월·신비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끌림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반드시 죽음에 이르며, 이 죽음에 대해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불안감은 죽음 너머 초월의 세계에 대한 원초적이고도 강렬한 관심을 유발한다.
전근대 한반도에서 내세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실존적 관심은 주로 무속과 불교 같은 전통 민속신앙을 통해 표출됐다. 구전설화와 민담은 민속신앙 속 영혼의 세계에 대한 상상을 민중에게 전달하는 주된 방편이었다. 오늘날 내세에 대한 판타지 영화나 드라마가 담당하는 역할을 과거에는 구전설화와 민담이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한민족이 가지고 있던 내세에 대한 이런 믿음과 관심은 비록 이교적이었으나, 구한말 개화기에 북미 지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입국해 활동할 때 복음 전파가 수월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분명 큰 도움을 주었다.
고려 말과 조선조 성리학자들은 괴력난신을 멀리하다 못해 멸시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인정한 영혼에 대한 교설은 죽음 이후 이 땅에 얼마 동안 남아있는 조상신에 대한 가르침 뿐이었다. 이처럼 현세중심적이었던 성리학자들은 이 땅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독교 교리가 전파되었을 때, 유일신론이나 영원에 이르는 내세관을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깊은 성리학 지식을 갖지 못했던 한반도 민중은 유교 이념에 따라 조상신을 섬기면서도 괴력난신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영적 존재들에 대해서도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내세와 영혼의 세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니,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많은 이들이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내세와 영혼에 대한 올바른 지식으로 믿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존재했다. 과거 민속신앙 잔재들이 기독교 신앙에 유입되어, 이교적이거나 이단적인 믿음과 관행으로 발전되는 부정적 토착화 현상이 발생했다.
오늘날 내세와 관련된 한국의 판타지 드라마를 보면, 과거 한국 교계 내부에 발생했던 이 부정적 토착화 현상이 대중문화 분야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독교계 내부에서 발생했던(혹은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순전한 복음과 이교적 종교관념의 혼합은 목회의 중대 위협요소다. 그런데 이런 이질적 종교문화의 혼합이 문화예술 창작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흥미롭고 참신한 영감을 주는 현상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지옥에서 온 판사>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작된 내세에 대한 드라마 가운데 가장 다양한 종교들의 가르침과 관념들을 섞어놓은 서사를 선보인다. 로마 신화, 무속과 불교가 혼합된 한국 민속 신화나 설화, 성경의 천사들에 대한 기록, 그리고 근대 유럽의 이단적인 악마학 서적인 흑마법서 레메게톤의 내용까지 이 드라마의 서사 속에 모두 총망라되어 있다.
이런 서사가 대중에게 남기는 기독교에 대한 인상은 교회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부정적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바탕을 둔 진지한 신앙 정신과 정밀한 교리 지식이 고대 신화나 무속, 혹은 이단적 마술서와 동격의 판타지와 다름없다는 인상을 심어준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장르문학 중심으로 재편되는 국내 대중문화 업계 동향이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작품에 진중한 철학이나 세계관을 담아 전달하기보다, 오로지 독자의 소비를 유도하는 데 혈안이 된 장르문학 작가들 입장에서 성경은 돈벌이의 재료가 될 ‘아이디어 창고’ 취급을 받는다.
그들의 눈에 성경은 외도서나 전래설화와 큰 차이가 없는 고대 종교문헌으로 비쳐진다. 즉 대중에게 친숙한 판타지 서사의 소재를 수급해주는 창작 레퍼런스 가운데 하나로 비쳐질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장르문학 소비자들을 통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나가는 중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좁은문은혜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