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7주년 논평 발표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이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를 향해 “공교회의 사유화, 금권주의, 교회의 임직헌금 관행에 관한 매관매직의 비난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정(自淨)하자”고 촉구했다.
샬롬나비는 10월 28일 기념 논평에서 “우리나라의 근대문화의 도입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며 한국사회를 선도했던 한국교회는 최근에 들어 성장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신뢰성까지 추락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포스트모더니즘을 맞이하여 상대주의가 만연하고 금권주의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다시 이 위기를 극복하며 종교개혁의 십자가의 영성을 회복할 것인지를 깊이 성찰해야 할 시기”라고 했다.
이들은 먼저 “기계적 유물론의 첨예화된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은 인간에게 무지와 결핍을 자연과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짓 망상을 심어주고 있다”며 “종교개혁 신앙만이 AI 과학기술이 가져올 데이터(Data) 종교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교회는 근대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이나 청년층들과 대화하며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변증의 길을 게을리 했고, 오히려 지적인 성도들은 다루기 힘들다는 이유로, 마치 반지성이 순수한 신앙인 양 호도(糊塗)했다”며 “한국교회는 칭의 신앙과 전인적 성숙의 종교개혁 영성과 달리 교권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퇴행에서 돌아서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공교회의 사유화, 금권주의가 하나님을 대체하여 지배하고 있으며, 교회의 임직헌금 관행에 대해 매관매직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며 “오늘날 한국의 일부 교회들이 중세후기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본 받아온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또 “개혁 신앙의 본질은 한번 구원(칭의)에 끝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인격의 성숙과 성화로 나아가는 것”이라며 “한국의 기독교는 과거의 향수에만 젖은 극단적 칼빈주의에서 나와, 세속 문명에 성육신하며 저들의 문명을 변증, 해석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변혁해 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샬롬나비는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못하며,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며 “종교개혁신앙은 세상을 떠남과 세상 속의 성실이라는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종교개혁의 오직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행위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지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며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십자가 영성, 권력 욕망 내려놓음의 영성을 매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
<종교개혁일 507주년 논평>
오늘날 한국교회는 공교회의 사유화, 금권주의, 교회의 임직헌금 관행에 관한 매관매직의 비난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정(自淨)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십자가 신앙을 실천하고 욕망내려놓기, 성화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올해는 독일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서구 세계는 종교개혁 이후 중세를 넘어 근대로 발전하며 세계 문화를 선도하여 왔다. 그러한 서구의 근대문화가 140년 전에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말기의 절망의 어둠 속에서 근대문명의 빛을 전해주는 미국를 비롯한 여러 나라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과 함께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근대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여 왔다. 우리나라의 근대문화의 도입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며 한국사회를 선도했던 한국교회는 최근에 들어 성장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신뢰성까지 추락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어느 대형교회에서는 금권을 통한 교회 정치, 교회 세습, 그리고 2013년 한국교회가 제정한 자정(自淨)장치인 교회세습법을 폐기하려고까지 시도하였으나, 2024년 통합교단 총회에서 양심있는 총대들의 압도적인 반대로 관철하지 못했다. 이번 사례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자정(自淨)이라는 좋은 사례를 남겼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맞이하여 상대주의가 만연하고 금권주의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다시 이 위기를 극복하며 종교개혁의 십자가의 영성을 회복할 것인지를 깊이 성찰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샬롬나비는 종교개혁의 십자가 영성을 회복하기를 염원하며 다음과 같은 논평을 발표한다.
1. 종교개혁 신앙만이 AI 과학기술이 가져올 데이터(Data) 종교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 안에는 정교 분열의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정교일치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로마 전통 위에 세워졌던 서구 문명의 전체성은 분열되었다. 하나님에게 떠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죄성, 그리고 이로 인한 욕망의 분출을 기독교는 통제할 수 없었고 손을 놓아야 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견제에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인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을 여는 발판을 제공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제 세상은 그것이 지적이든, 감각적이든, 너무 거대해져, 어떤 변증도, 증인도, 적대자도 필요하지 않는 절대 권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무신론을 토대로 한 다윈,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와 같은 인물들이 있다. 이들 사상은 인간의 고통이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거부한다. 이러한 지적 체계위에 세워진 기계적 유물론의 첨예화된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은 인간에게 무지와 결핍을 자연과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짓 망상을 심어주고 있다.
과연 기독교가 이 거대한 근대주의의 물결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의구심은 이제 기독교들 마음속에도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영국의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과 같은 정신분석가들은 <미래의 비망록>(A Memoir of the Future)에서 이제 기독교는 명을 다했고, 기독교로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다른 대체물이 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기독교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한다.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는 <호모 데우스>(Homo Deus)에서 신흥종교로서의 '데이터 종교'를 언급한다. 사실 이 신흥종교에 가입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미 알고리즘의 마법에 빠져 과학의 신도가 되어 버렸다. 과학이 현대인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되었으며, 그 결과 첨단과학은 이미 종교화되었고 과학의 효율성 앞에 기독교적 제의가 무너지며 ‘탈교회’의 문제가 대두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사실 종교개혁의 십자가 영성 안에 잠재해 있었지만 기독교는 늘 이 길을 거부해 왔고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였다.
2. 한국교회는 칭의 신앙과 전인적 성숙의 종교개혁 영성과 달리 교권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퇴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의 종교개혁이 병리적인 권위주의와 교권주의를 무너뜨린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골방에서 주님과 대화하며 경건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종교개혁 덕분이었다. 그러나 첨예화된 IT 문명은 인간에게 이런 시간들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주의는 건강한 권위와 건강한 공동체까지 무차별적으로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뒤늦게 근대주의를 받아드린 한국교회는 근대화의 화려한 불빛 위에서 번영이라는 마법에 취해, 근대주의의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교회 지도자들은 조직과 경영의 효율성을 위해 중세의 병리적 권위주의를 되찾아오는 악순환의 고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교회는 근대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이나 청년층들과 대화하며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변증의 길을 게을리 했고, 오히려 지적인 성도들은 다루기 힘들다는 이유로, 마치 반지성이 순수한 신앙인양 호도(糊塗)했다. 개혁은 먼저 인간의 내면 안에서, 개인적 성장과 인격의 성숙을 통해서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는 전인적인 일임에도 오히려 저들의 유아성과 병리를 이용해 하향 평준화하는 일에 함께 공모했다. 이는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취지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는 종교개혁 정신과는 반대되는 퇴행의 길을 선택하였다. 초심의 소명 회복위해 삶과 고난을 통해서 성숙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한다.
3.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공교회의 사유화, 금권주의가 하나님을 대체하여 지배하고 있으며, 교회의 임직헌금 관행에 대해 매관매직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목회 초창기 시절에는 머슴의 정신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목회자와 교인의 모범이 된 목회자가 대형교회를 이루자 자신은 결단코 세습을 하지 않겠다고 한 공언을 뒤집고 세습했을 뿐 아니라 이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개교회주의 우선을 내세워 교단의 세습방지법까지 폐기시키려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는 매우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예장통합교단은 2013년 제98회 총회에서 “교회 사유화를 막고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자”는 취지로 총대 84%(870명)의 찬성으로 교회세습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서울 명성교회 새습사태가 발생하면서 지난 10년동안 교회세습방지법 유지를 놓고 예장 통합교단은 내홍을 겪었다. 2024년 10월 24일 창원 양곡교회당에서 열린 예장통합교단 제109회 총회에서 양심있는 교회세습법 폐기안은 총대들에 의하여 압도적으로 거부(찬성 370명, 반대 661명)되었다. 한국교회 안에 예장통합교단 같은 종교개혁정신을 잘 지키고 있는 교단이 있어 자랑스럽다. 그리고 (전임)교단헌법위원장 7명이 제109회기 총회를 앞두고 “교회세습방지법을 삭제해야 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한 것에 대해서는 교단내외에서 비난이 제기되었다. 이분들이야말로 자기들이 교단이 제정한 헌법을 수호해야 할 지킴이가 되었어야 했는데, 반대로 자기들이 만든 법을 스스로 폐기하도록 한 것은 공적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대형교회를 비롯한 모든 목회자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서는 자기 성찰을 해야한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교회들이 중세후기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본 받아온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이것을 깊이 회개하고 변혁해야한다. 그리고 최근 일부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가 되기 위해 임직 헌금을 해야하는 관행이 유행하고 있다. 루터가 비판했던 당시 면죄부를 팔던 종교 상업주의 관행이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다. 임직 헌금만이 아니다. 임직자들이 교회에 필요한 가전을 구입하거나 음향 공사, 리모델링 비용, 목회 차량 구입을 임직 수락의 조건으로 부담해야 하는 관행이 번지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교계 안팎에선 “가난하면 직분도 맡을 수 없는가”라는 냉소(冷笑)적 한탄도 나오고 있다. 자본주의적 세속 사회 관행에 대한 냉소적 비평인 “유전유직(有錢有職) 무전무직(無錢無職)”이 한국교회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개혁 신앙의 본질은 한번 구원(칭의)에 끝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인격의 성숙과 성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목회 현장에서 구원받는 신앙(칭의 신앙)과 성화의 삶(칭의의 생활화) 사이에 항상 평행선을 달려 왔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패러다임이다. 아담 타락의 사건이 오르페우스의 유배된 영혼의 신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육체가 영혼의 유배의 장소이며 감옥이라는 이원론적 영지주의 사상은 끊임없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해 왔다. 우주적 드라마나 초월적 역사에 개입할 수 있는 어떤 지도를 인지하고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은 현실의 삶에서 인격의 성숙이나 성화는 ‘의미없음’으로 추락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교회가 도덕, 윤리적으로 타락하는 이유가 이러한 영지주의적 세계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초대 교부들이 이러한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조직적인 신학체계를 세워 왔지만, 목회 현장은 늘 실존적 생존전략만을 고집하며 하나님 말씀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이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작용해 왔다.
영지주의 세계관은 주로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고도의 지적 체계를 그럴 듯하게 혼합해서 순수한 복음과의 분별이 쉽지 않도록 조작된다. 무엇보다 영지주의는 안아주고 위로를 주는, 오직 성도들의 욕망에만 초점을 두는 모성적 초자아의 목회와 궁합이 잘 맞아, 말씀을 가르치고 자아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부성적 초자아의 기능에 소홀하게 된다. 복잡한 현실을 간단히 정리하는 이항 대립적, 회피적 종교는 구원에 관한 지식에만 초점을 두고 삶과 역사의 현실을 중시하는 형성적 기독교를 소홀히 하고 고난에 대한 설교를 부담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화란의 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역시 이러한 잘못된 영성을 해결하기 위해 공적 영역인 사회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 곧 일반 은총의 중요성을 삶으로 증거해냈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 2권 2장 15, 16절에 학술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았고 또 예술과 문학에 관한 재능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고 기술했다. 한국의 기독교는 과거의 향수에만 젖은 극단적 칼빈주의에서 나와, 세속 문명에 성육신하며 저들의 문명을 변증, 해석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변혁해 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5. 종교개혁신앙은 세상을 떠남과 세상 속의 성실이라는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적 목회자인 본회퍼(D. Bonhoeffer)는 그의 저서 <윤리학>에서 세상을 등지는 그리스도교는 부자연, 비이성, 오만, 자기의에 빠진다고 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못하며,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전적으로 세상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사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욕망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초기 기독교 십자가의 영성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급진적 이원론으로 세속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쳐 왔지만 실패해 왔다. 급진적인 해결책은 거짓승리감에 도취되기에 삶의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거나 쉽게 타협하게 되어 이중적인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는 교인수의 감소와 대서특필되는 사회문제에 늘 기독교가 한 몫을 담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영지주의적 영육이원론으로는 세속을 이겨낼 수 없고 그것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해 왔다. 이제는 개혁신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인 것이다. 좌, 우의 칼날 위를 걸어가야 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길을 찾아내야 한다.
6.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십자가 영성, 권력 욕망 내려놓음의 영성을 매일 실천해야 한다.
중세교회의 ‘행위구원’ 교리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던 ‘이신칭의’는 변혁과 개혁이라는 시대적 상황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오직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행위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지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여전히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 욕망을 추구하는 ‘실천적 무신론’은 개혁신앙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이다.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공개 토론, 논제24에서 “십자가 신학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선한 것을 가장 악한 방식으로 오용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을 살아내야 한다는 너무 낯설고 섬뜩하기까지 한 이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은 손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제2의 종교개혁은 추상적인 신학적 이론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영성이다. 이것은 초기 공교회 교부들의 내려놓음, 및 순교적 영성이었고 이것을 다시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 종교개혁의 영성이었다. 칭의의 구원 신앙 이후에 성화의 영성과 인격의 성숙은 어느 시대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이다. 기독교는 이 역설의 길에서 갈등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길을 수정할 수는 없다. 실패해 왔더라도 다시 일어나 이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지난(至難)한 길이다. 삶에서 도망가지 않을 때, 세상으로 성육신할 때, 인간으로서 매일 당하는 아픔을 통해 성숙한 인격과 구원이 만들어진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질과 명예와 권력의 욕망을 내려놓는 십자가의 영성, 종교개혁의 영성을 되돌아보며 그 길에 순종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2024년 10월 28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