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 칼럼] 독일 종교개혁에서 동서독 통일까지: 섭리의 역설과 역전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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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1. 현 상황과 <종교개혁>에의 갈망

세계에 뷰카(VUCA)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불확정성”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실에 가장 발빠르게 적응하는 유수 기업들은 불확정성, 기후위기, AI 시대에 맞게 전환하고 있다. 또한 ESG 경영으로 무한경쟁시대, 불안시대, 위기시대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깊은 고뇌에 싸여 있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국민의 삶의 질과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정치권과 교육계가 허둥대며 뒤처지는 모습이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에 위기라는 말이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곳곳에서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나온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미래의 국가 존립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국론 분열이 심상치 않다. 양극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갈등을 불러오며,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 국가로서 이데올로기의 상처와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다. 이제 정치는 진보, 보수의 선의의 경쟁 너머에서 정권 쟁탈을 향한 진흙탕 싸움이 되어가니 주권의 주인인 국민이 정치혐오에 빠지는 심각한 수준이다.

일반 사회 상황이 이러한 때 기독교계, 교회가 중심을 잡고 사회와 시민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했다. 주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 말씀하셨고, 교회는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로서 당연히 그 역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뢰도가 점점 추락하고 있으며 일명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고 특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교세는 확연하게 떨어졌다. 더구나 기독교 안에서 크리스찬 리더들의 여러 문제들이 대중에 노출되니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상황이 되어간다. 그리하여 여기저기서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나타나 이제 제2, 제3의 회개운동,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 하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종교개혁>에의 열망, 그 종교개혁의 현재적 의미와 이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역설과 역전의 관점에서 성찰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와 교인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에 대한 대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독일의 신학자 루터(M.Luther)가 당시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 안에 자리한 궁정교회 현관에 95개조항 논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팩트는 맞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살펴보면 그 전 시대에 중세 시대를 벗어나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시대 개혁>적인 전조현상이 있어 왔음을 잊어선 안 된다. 르네상스, 인문주의(휴머니즘), 봉건제와 기사제도 쇠퇴, 신흥귀족 등장, 미디어로서 인쇄술 등 다양한 면에서 종교개혁을 촉발시키는 요소들이 등장하였다.

성경교수였던 루터는 당시 인문주의(Humanism)의 영향을 받아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는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기에 신앙의 원전인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특히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세기전환적 깨달음을 얻는다. 교황과 사제 중심인 가톨릭이 전유물로 삼고 있는 신앙 세계(예전과 권력 구조)가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은 점점 깊어졌다. 이 의구심은 역설적이게도 로마 순례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된다. 경건한 삶과는 무관한 사제들, 그들의 타락과 방종, 탐욕과 치부, 외형적 상징과 유물에 의존하는 미신적, 우상숭배적 태도, 성서와 교회 위에 군림하는 교황의 전제적 위상 등은 루터로 하여금 복음의 본질에 대해 다시 고뇌하게 하였다.

드디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합 2:4)는 말씀으로 농축된 신앙의 핵심을 발견한다. 루터 연구가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지는 비텐베르크가 아니라 로마였다.” 그의 개혁적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갔다. 스위스 취리히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칼뱅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예배(예전) 개혁, 신앙(신조) 개혁, 사회 개혁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 개혁 운동은 교회 안에서 시작되어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변혁(Transformation)을 가져왔다. 이로서 정립된 종교개혁 5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3. 루터 정신과 긍정의 민족주의

종교개혁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성경 말씀이 루터를 통해 교회를 개혁한 것이다. 즉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큰 일이었다고 본다. 루터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 말씀>이 시대와 상황을 바로 보게 한 것이며, 그는 이 비전으로 행동한 충성스러운 청지기였던 것이다. 엄중한 섭리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루터가 본래 추구하고자 한 기독교적 민족 사랑은 민족주의라는 형태가 되면서 세속 역사와 만나게 된다. 이로서 민족주의의 양면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루터 정신(Luther Geist)은 독일 정신이다”란 슬로건은 긍정과 부정의 요소가 들어있다. 긍정적 측면에서 루터가 강조한 기독교적 사랑이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부정적인 면에서는 그 민족주의가 어느 정치 및 사회 계층에게 왜곡되어 세속 권력으로 변질되는 경우를 말한다.

루터의 비전은 독일의 신앙 개혁이며, 나아가 이를 이루기 위하여 교육과 민족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의 개혁적 저술이라 알려진 3개의 논문 중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고함>에서 루터는 교육을 강조한다. 사회가 성숙하려면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가르쳐야 하고, 귀족들은 이를 중요한 정책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교육을 통한 민족 정신 함양으로 이어졌는데, 역사를 통해 국가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크리스천 학교를 설립하고 보전해야 할 필요성에 관하여 독일의 모든 시의 시의원들에게 보내는 글>(1524)에서 역시 젊은이를 교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리스천은 시대와 국가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야 하므로 세상 지식도 중요하지만 영적 교육으로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칠 것을 강조했다.

코람 데오(Coram Deo)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므로 루터는 첫째도 성경, 둘째도 성경을 바로 알고 행하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개혁 의지는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정신이 되고, 시민정신으로 승화되면서 자연히 민족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로서 “루터 정신은 곧 독일 정신이다”란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순수한 루터식 민족주의는 그 뒤에 어떠한 길을 걷게 되었는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4. 현대사의 비극: 부정의 민족주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00년 후 독일은 어떠했을까? 종교개혁의 해인 1517년에서 400년 후인 1917년을 살펴보자면, 당시 유럽은 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이 1918년에 종전되었으며 그 상처는 매우 깊었다. 유럽에서 일어났으니 기독교 국가 간에 전쟁이었다 아니 할 수 없다.

루터 정신이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기에 정치인들은 이를 여러 모로 활용하려고 했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루터교는 종교적, 정신적 밑거름이 되는 국가프로테스탄트(Nationalprotestant) 정신을 내재하고 있었기에 국민 통합에 부응한다고 여겼다. 루터교 교인은 거의 애국 민족주의자로 자처했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루터교인들이 앞장서서 국가를 위하여 전쟁에 나가야 한다며 자발적 참전 슬로건을 펼치기도 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서로 향했던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니, 국민도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런 민족주의가 <1차 세계대전>(1914-1918) 패망과 더불어 왜곡되기 시작했다. 즉 국가를 위해 국민도, 교회도 국가 재건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 특히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일명 나치주의) 아래 모인 이들은 획일화된 전체주의 국가론(파시즘)을 주장했다. 1931년 총선에서 수많은 루터교인들이 나치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이렇게 히틀러는 나치당의 수장으로 총통으로까지 권력의 최상부에 올랐다. 독재의 시작이었고 유대인 학살(Holocaust)의 서막이 오른 순간이었다. 기독교인들이 독재자를 옹호하는 기막힌 비극이었다!

기독교인들의 표로 정권을 잡은 나치당은 거꾸로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폈다. 한쪽에서는 독일만의 고유한 민족적 기독교를 세워야 한다며 회유하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치즘을 비성경적이라며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히틀러에게 임명된 루터교 총주교 뮐러 목사는 <실용적 기독교>를 주장하며 국가 조직의 한 기관으로서 교회이기를 역설했다. 교회는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라는 의미였다. 이에 저항한 기독교인들은 감시와 투옥 되기에 이르렀다. 니묄러 목사는 <목사긴급동맹>을 형성하여 저항하였고, 본회퍼, 슈나이더 목사 등은 반나치운동 끝에 투옥, 순교에까지 이르렀다. 기독교는 친나치, 반나치로 분열되었고, 가톨릭은 1937년 3월 고난주간에 교황 피우스 11세의 교서 <불타는 근심으로>가 공식 발표되기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후 가톨릭은 나치에 공식 반대하는 편에 섰다.

한편 나치는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세계 지배라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처음에는 동부에서 체코, 서부에서는 프랑스를 점령하고 이태리를 지나 지중해 그리스까지 군사력을 자랑하고, 영국에 맹폭을 퍼부어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1942년 모스크바 침공을 앞두고 겨울 추위로 인해 전세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부사관 출신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고도의 군사 전술 전략에는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그는 세계 지배라는 야욕을 못 버린 나머지 진격 명령을 내렸다. 그의 오판은 나치군으로 하여금 패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의 참전은 전세를 역전시켰고, 연합군의 대공세로 결국 나치군은 패망하기에 이른다. 왜곡된 민족주의가 부른 참극이 아닐 수 없었다.

5. 사회주의 탄압: 핍박과 회개

1945년 5월 나치의 패망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한다. 갓 결혼한 에바 브라운과 함께였다. 프로파간다 장관으로 권력을 누린 괴벨스는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모두 강제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므로 2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고한다.

4개 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독일 점령지를 분할하였다. 미국은 이탈리아를 지나 독일 중남부, 영국은 독일 북부, 프랑스는 독일 서부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 진영이어서 독일의 자체적인 재건에 우호적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동유럽을 지나 독일 동부를 점령하게 되었는데,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는 독일 동부를 점령한 후에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게 하였다.

독일은 1949년 동, 서독 정부로 분열하며 분단국으로 남게 되었다. 동독 지역은 이 때로부터 기독교 탄압이라는 또다른 형태의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 한때 가장 루터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던 지역이 사회주의 정권에 핍박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점은 역사적 아이러니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동독 정부는 반기독교정책을 펴나는 과정에서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인들에게 교육, 직업, 사회생활에서 철저히 차별을 하므로 점점 기독교인 수가 줄어들어갔다(1948년/1,500만, 1988년/500만). 사회주의 정권의 탄압은 그토록 극심했다.

6. 베를린 장벽 붕괴와 통일

그러나 서독 정부과 기독교인들은 동독 시민과 교인들을 위해 대화와 원조를 쉬지 않고 제공했다. 동독 시민 중 60세 이상 되는 이들이 서독으로 여행 올 수 있는 인도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심지어 동독 내의 반체제 인사들을 위해 보석금을 제공하고 서독으로 데리고 왔다. 프라이카우프(Freikauf)라는 이 정책은 동독 현실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중에는 정치인을 비롯하여 시인, 작가 등 문화예술계의 반체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어 비인간적인 체제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했다.

그러던 중 동독 기독교인들에게 각성의 기회가 오기 시작한다. 1980년대 초 동독 몇몇 교회에서 기도회로 모인 것이다. 이 모임은 월요평화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처음에 몇 명 되지 않았으나 해가 갈수록 점점 그 수가 많아져 갔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르던 1989년 월요기도회는 교회 밖으로까지 확대되어 평화기도회가 되었고, 라이프치히에서만도 수만 명이 모이는 비폭력 비무장 평화촛불기도회로 확산되어갔다.

동독 사회주의 정권은 시민들의 이런 움직임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동독 베를린 장벽은 동독 주민의 여행자유화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장벽 주변에 무장한 경찰,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장벽 앞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발포할 기세였다. 동독 정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여행 자유화 문제를 어찌할 것인지 회의했다. 이때는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가 상부에서 온 메모를 받았다. “동독 주민의 여행 자유화는 즉시 이행된다”(이는 ‘베를린 장벽 개방은 즉시 시행한다’와 같은 뜻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샤보프스키의 명백한 실수였다. 메모를 잘못 읽은 것이다(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통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시기도 하신다).

회의장에 모인 세계 매스컴은 이 발표를 속보로 타전했다. 경찰, 군인들은 무장을 해제했고, 동독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에 올라타거나 망치로 부수며 승리를 만끽했다. 관리의 실수는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어 동독 사회주의 정권 몰락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동독에서 탄압받던 기독교인들이 시작한 월요기도회가 승리한 것이다. 주님의 섭리로 볼 수 밖에 없는 역설적 장면이었다. 이 사건은 곧 독일의 염원인 통일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기도회의 중심에 니콜라이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가 바로 라이프치히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7. 맺는 말

루터의 고뇌는 이랬다. “어떻게 유한하고 죄인된 인간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품을 수 있겠는가?”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형식적 예전과 사제들의 권력에 지배당하고 있을 때 루터는 성경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알프스 북쪽 지역을 중세적 미신적 신앙으로부터 해방시킨 독일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다. 루터 자신이 성경과 인문주의적 교육을 통해 민족을 깨우치려 했던 정신은 곧 독일 정신이 되어 민족주의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이 정신이 몇 세기를 지나며 왜곡된 사례가 나타났으니 400년 후 등장한 나치즘에 악용당했던 것이다.

이 왜곡된 민족주의에 물든 기독교인들이 나치즘에 야합했으며, 나치식 우상숭배에 무릎 꿇게 했던 것이다(이는 일제시대 중인 1938년 한국 교계 지도자들이 신사참배 하기로 결의한 치명적 죄악과 유사하다). 러시아에 점령당한 독일 동부 지역은 사회주의 지배에 들어갔는데, 그 지역이 루터식 민족주의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지역이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역설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환란 때에 믿음의 불꽃이 다시 일어났다.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고통받던 30년 지난 즈음 1980년대에 동독 기독교인들이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지난 1989년 11월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3일에 독일 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역설의 역설, 대역전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 섭리의 엄중함이여, 이 역사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역설과 역전의 교훈이 현재 한국 기독교와 교인들에게 어떻게 깨달아지고 신앙적 영적 행동으로 연결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긍휼히 여겨 주소서. 허탄한 권세에 굴복하지 않게 하시고, 영적 분별력을 허락하옵소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결단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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