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12) 한국 선교, 우연인가 섭리인가
기차에서 보빙사절단 만난 가우처
일본 선교 준비하다 바꾼 아펜젤러
담임목회와 사랑 포기한 언더우드
사람, 사건, 성공, 실패 모두 역사
선교 모두 섭리, 우연처럼 보일 뿐
한국교회 선교의 산 역사가 보여줘
선교의 역사에 우연은 있는가?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섭리만 있는가? 세계 선교의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퍼즐들이 과연 어떤 큰 그림의 작은 모자이크인지, 나는 선교의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묻곤 했다.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황재진 목사와 함께 한 선교투어는 호남 선교사의 후손들이 사는 블랙마운틴, 빌리 그래함이 묻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럿, 7인의 선발대를 잉태시킨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를 지나 미국 선교의 중심인 매릴랜드, 펜실베이니아로 들어섰다.
여기부터는 우리가 존경하는 한국 선교의 아버지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리고 가우처의 역사가 펼쳐지는 곳. 벌써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먼저 가우처(J. F. Goucher, 1845-1922)가 목회했던 볼티모어의 러블리 레인 교회(Lovely Rain Church)로 향했다. 볼티모어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교회는 놀랍게도 미국 연합감리회(UMC)의 첫 번째 교회였다. 1772년 시작한 이 교회는 1784년 12월에 미국 감리회의 첫 번째 연회가 열린 곳으로, ‘미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라 불리고 있었다. 육중한 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는 후일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에서 펼쳐질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예고하는 듯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우처가 누구인가? 때는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과 함께 조선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 미국방문단이 미국을 향해 떠난 때였다. 이름은 보빙사절단. 1883년 7월 제물포를 출발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일행은 9월 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기차로 여행을 계속해 마침내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40여 일 동안 미국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훗날 한국 선교를 위해 꿈에도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기차가 시카고 근처를 지날 때, 기차에 올라탄 감리교의 가우처 목사가 우연히 조선 대표단을 보게 된 것이다. 평소 해외 선교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볼티모어 가우처 목사는 가까이 가서 이들이 어디에서 온 민족인지 물었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조선’이라 불렀는데, 가우처에게 이 말은 ‘Chosen’으로 들렸다. 이 말은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쓰고 있던 모자도 특이해 이름을 묻자, 그들은 ‘갓’이라고 대답했다. 가우처에게 이 말은 ‘God’으로 들렸다. 세상에,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 여기 있다니. 이 우연한 사건이 세계 역사에 빛나는 한국 선교의 위대한 시작이 될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기차에서 조선인을 만난 가우처는 억만장자 아내를 둔 감리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다. 그해 11월, 그는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에 “조선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형편에서 조선 선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도나 중국, 일본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가우처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비전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2천 달러를 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헌금했고, 선교부는 드디어 가우처의 열정에 따라 3천 달러를 더해 조선 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미국 감리회는 첫 번째 조선 선교사로 훗날 이화학교를 세운 스크랜턴 부인과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그리고 첫 번째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를 파송했다.
가우처의 헌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07년부터 1920년까지 6회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으며,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대학을 후원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조선 선교를 위해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920년 늦가을 한국 여행으로 인한 여독으로 1922년, 77세의 나이로 하나님께 돌아갔다.
나는 볼티모어 묘지에 묻혀 있는 가우처의 무덤을 찾았다. 그는 그보다 20년이나 먼저 죽은 아내 메리 피셔 가우처(Mary Fisher Goucher)와 함께 말없이 묻혀 있었다. 20년을 아내 없이 외롭게 산 가우처의 인간적 아픔이 가슴 깊이 저며왔다.
피 흘려 사신 하나님의 교회는 피 흘려 지켜야 하기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종들에게 가혹한 희생을 요구하는지 모른다. 나는 가난한 나라 조선에 복음의 문을 열어 오늘날 한국교회의 발전과 축복을 가져오게 한 한국 선교의 아버지에게 머리 숙여 감사했다.
다음으로 찾은 것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흔적이었다. 아펜젤러는 그가 선박 사고로 별세한 한국 서해안 몽금포 앞바다에서 지난 여름 이미 만났지만(우리는 선교사 아펜젤러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2) 아펜젤러의 죽음), 그를 그의 고향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나에게 큰 감격이었다.
아펜젤러는 독일 개혁교회에 뿌리를 둔 장로교회 출신이었다. 그러나 젊은 날 거듭남을 체험한 이후 장로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겼다. 감리교가 장로교보다 더 체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교회가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Lancaster The First Methodist Church)였다.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에 도착했다. 겉으로 볼 때 평범해 보이는 교회는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크고 아늑했다. 젊고 영적인 아펜젤러는 같은 랭카스터에 있는 마셜 대학을 다니면서 이 교회에서 미래의 꿈을 키웠다. 그는 특히 이 교회에서 영적인 생명력 있는 작은 모임(감리교회는 그것을 ‘속’이라고 부른다)을 통해 선교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했다. 그가 한국에 오기 6년 전인 1879년이었다.
아펜젤러는 이 교회에서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신학교에 입학했고, 잠시 이 교회에서 전도사 일도 했다. 그가 언제부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1883년 그가 신학교 2학년 때 열린 신학교 선교사 연맹 세미나가 결정적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때 그는 일본 선교를 결심했는데, 때마침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친구 워즈워스가 중병에 걸려 자기 대신 한국에 가 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게 되었다. 하마터면 불발로 그칠 한국 선교를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건져내셨다.
놀랍게도 교회 안에 들어가자 아펜젤러 기념예배실이 준비돼 있었다. 2010년, 정동감리교회가 자신들의 교회를 설립해 준 아펜젤러에 대한 감사로 이 채플을 봉헌했다고 한다.
이 교회가 1802년 설립되었으니 아펜젤러가 한국에 올 때도 이미 80년이 됐고, 그가 죽은 지도 120년(1902년 44세로 별세)이 됐으니 의인의 죽음은 예수님 말씀대로 시간이 지나도 한 알의 밀알처럼, 한 여인의 향유처럼 오랫동안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인지 모른다.
랭카스터에서 뉴욕으로 올라가는 하이웨이는 온통 오색찬란한 단풍이 가을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계절은 확실히 앞서고 있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미국이 아닌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다.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발명가였고(훗날 언더우드의 형이 타자기를 발명해 ‘언더우드 타자기’로 명명하고, 그로 인해 한국 선교에 막대한 재정 후원을 하게 된다), 그는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했다. 그는 뉴욕대를 졸업하고 뉴브런즈윅(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했다.
언더우드가 다녔던 뉴브런즈윅 신학교와 그를 파송한 ‘라파예트 애비뉴 장로교회(Lafayette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 도착했다. 학교 교정은 빨간 단풍이 익어가고 있었다. 유서 깊은 이 학교에서 언더우드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그는 이 학교에서 인도 선교를 꿈꾸었다. 그러나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에 이르는 겨울, 뉴브런즈윅 신학생 가운데 선교사를 자원한 학생들의 모임 회원이었던 울트만스(Altmans)가 조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은둔국이었던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1,200-1,300만 되는 인구가 아직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누군가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내용이었다.
언더우드는 당연히 인도로 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신학뿐 아니라 1년간 의학도 공부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갈 것으로 생각했던 한국은 아무도 가지 않고 교회 지도자마저 한국에 가는 것을 시기상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한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다. “너는 왜 가지 않느냐?”
마음의 소리는 계속 들려왔으나 결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뉴욕에 있는 한 교회가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언더우드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응답의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막 집어넣는 순간, 또 한 번의 음성을 들었다. “한국에는 아무도 갈 사람이 없는데, 한국은 누가 갈꼬?” 그는 즉시 편지를 도로 집어넣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선교부로 향했다.
그러나 마지막 시련이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과 인도 선교를 가기로 약속했는데, 만일 그가 한국으로 간다면 자기는 따라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이냐 사랑이냐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한국을 택했다.
그래서 한국에 올 때 그는 인간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파혼하고 먼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마침내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때 그들은 감격하여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왔습니다. 부활절에 죽음의 장벽들을 산산이 부순 주님, 이 백성들을 속박하는 굴레들을 깨뜨리시오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로 인도하소서.”
선교의 역사는 우연인가? 섭리인가? 선교의 역사에 ‘만일’이 있을까? 만일 그날 보빙사절단을 가우처가 기차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만일 그날 가우처가 바쁜 일이 있어 다음날 기차를 탔다면, 만일 그때 가우처가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흘려 보냈다면, 만일 아펜젤러의 친구 워즈워스가 아프지 않아 그가 계획대로 일본으로 갔다면, 만일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오지 않고 그 약혼녀와 함께 인도로 갔다면, 만일 언더우드가 한국을 택하지 않고 담임 목회를 택했다면, 만일 언더우드가 한국선교가 아닌 사랑을 택했다면….
그래서 나는 선교가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우연이 있다면, 우연처럼 보이는 섭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람도, 사건도, 성공도, 실패도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반드시 그의 뜻을 이루어가신다. 한국교회 선교의 산 역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기도하면 우연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윌리암 템플)”.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