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 칼럼] 파리올림픽 개막식: 이성 숭배의 암울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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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빅 이슈 돌아보며]

칼뱅과 위그노 신앙의 나라, 프랑스는 어쩌다!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세계인 앞에서 꼭 이래야 했나

2024 올림픽이 프랑스에서 개최되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하는 가운데 파리에서 열린 개막식은 참으로 예술의 나라 프랑스다웠다. 센강으로 배를 띄워 선수들이 선상 입장하게 한 연출도 멋지고, 강가에 나와 환호하며 전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을 즐기는 풍경은 자유와 박애 평등을 새삼 느끼게 한다. 프랑스의 품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런데 몇몇 장면은 프랑스를 걱정하게 한다. 아니, 매우 염려하게 한다. 예를 들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갇혀 있던 유적을 지날 때, 질로틴 형을 받은 그녀의 모습은 처참했다. 역사적으로 고증하고 모던 아트의 옷을 입혀 ‘승화’하였다고 변명하겠지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광장에서 공개처형 당한 장면을 상기시키듯, 사회 격동과 시민 분노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예술의 자유를 넘어선 참살 장면 아닌가. 19금 장면이 공공의 장소로 노출된 느낌이다. 한 인간에 대한 조롱과 희화는 그렇게 표현되어서는 안 되었다. 또한 동성애 코드를 연상시키는 영상은 프랑스를 문화와 교양의 선진국으로 여기게 하기보다는 공공윤리가 무너져가는 폼페이의 타락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도 미성년자를 포함한 세계 시민이 바라보는 미디어에서!

경악의 극치는 다 빈치의 명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로마의 주신(酒神) 바커스가 보이는데, 그 배경은 “최후의 만찬”이다. 기이한 조합도 문제이거니와 최후의 만찬 한가운데에 이 괴이한 장면을 연출한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예술의 실험정신과 자유로운 퍼레이드의 이름을 내건다 해도 모든 것이 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

개막식에서 보여준 것은 천박한 인간의 세기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신성모독(blasphemy)에 가까운 만행이 연출되었다. 프랑스가 좋아하는 덕목은 관용(tolerance)인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마조히즘적 행위로 인간 존엄을 비웃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인이다’라는 자랑을 늘어놓자는 것일까. 참을 수 없는 프랑스적 역겨움이여. 한때 세계의 지성을 대표한다고 으쓱대던 “프랑스 정신”은 진정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24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며, 영적 분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 이런 장면을 보신다면 뭐라 하셨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인간의 속마음을 통찰하시는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대하셨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에서 하신 모습대로 그렇게 하셨을까.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아니면 간음하여 잡혀온 여인에게 말씀하시듯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우리는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 개최국 “프랑스”에 대하여 고개를 가로 저으며 문화선진국에 의문을 품는데, 주님은 계속 “용서하라” “정죄하지 말라”고 하실까. 아니면 좋지 않은 열매를 퍼뜨리는 나무에 도끼를 준비하듯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실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9). 아니면 음란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려 심판하시듯 그렇게 불심판을 내리실까. 아니면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던 그 말씀대로 하셨을까. 경악스런 장면 앞에 프랑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의인을 보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는가. 혼란한 시대정신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정복 전쟁, 식민정책

프랑스는 자부심이 강하다. 세계사를 들여다 보면 “혁명” 관련 기록들이 다수 나온다. 영국의 청교도혁명(1649)과 명예혁명(1688), 독일의 11월 혁명(1918),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1917), 그 중에서 프랑스 혁명(1789)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근대의 역사적 거사라 하겠다. 자유 평등 박애를 주창하던 프랑스 혁명은 과격파의 등장과 과도기적 혼란으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 후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유럽을 갈등과 전쟁으로 뒤흔들며 정치와 권력 세계를 재편하였고, 영국에 뒤처질세라 평화로운 세계를 탐욕으로 지배하려는 식민주의 정책에 뛰어들었다. 유럽과 프랑스가 현재 겪고 있는 국가적 정체성, 이주민과 난민으로 인한 사회 불안정 등의 문제들은 이미 과거 역사에 그 원인이 내재해 있지 않은가!

프랑스, 이성의 숭배자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의 기치로 이성과 인본주의를 선택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계몽주의라는 이름 하에 이성(Reason)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절대적 시대정신(Zeitgeist)이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사상계 거목들이 시대를 풍미했고, 프랑스 사상은 점점 반기독교적 성향을 띠게 된다. 합리주의(rationalism)라는 물결이 학문과 지성, 교양과 일상의 삶에 파고 들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주도 세력의 기치는 인간과 이성이었는데 그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이성은 우상의 신전에 자리잡게 되었고, 기독교적 유산은 거부,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귀족 세력과의 결투에서 이를 철저하게 실행해 나갔다. 예를 들면 성직자 환속, 교회 재산 몰수, 기독교(당시 가톨릭이 주 대상) 비판 및 풍자, 희화화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였으나 실상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갔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53:1a).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 같은 형국이었다.

칼뱅의 조국 프랑스

하지만 ‘문제적 프랑스’ 앞에서 이런 질문이 든다. 만약 프랑스가 칼뱅의 개혁정신을 따랐다면 어떠했을까? 종교개혁(Reformation)의 배턴을 이어받은 칼뱅(J.Calvin, 1509-1564), 그의 조국이 바로 프랑스였다. 파리 북서쪽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시절 개혁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다른 도시로 피신했어야 했다. 제네바에서 파렐(Farel)이라는 정치인의 간청으로 도시 개혁이라는 뜻을 품게 되고, 그의 삶은 복음적 개혁가로 전환하게 된다. 칼뱅이 종교개혁가에 이름을 올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가 저술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신앙고백을 넘어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 지표가 되었다. 죄악으로 뿌리내린 부정과 불의, 부패한 세계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바꾸어야 했다. 만약 프랑스가 <기독교강요>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했더라면 현재의 프랑스와는 다른 프랑스가 되었으리라 본다.

칼뱅은 지금도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기도할 것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프랑스여, 방황하는 프랑스여, 이성을 떠받들다 세속주의에 물들어 가는 프랑스여, 돌아오고 돌아오라. 더 늦기 전에 돌아오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 2:12).

위그노의 고향 프랑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저지른 식민주의(imperialism)는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명으로 기록된다. 프랑스도 아프리카를 위시하여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인권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수탈, 정치적 탄압은 대(代)를 두고 참회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프랑스 지식인과 양심가들이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경고한 대목은 그나마 명예를 지키게 했지만 식민주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인권 파괴와 후유증을 가져왔다.

그리고 자국민에게 행한 참혹한 탄압. 프랑스가 행한 종교 탄압은 상상할 수 없이 비참한 역사로 기록된다. 가톨릭과 연관된 군주들이 새로운 신앙 운동에 가한 박해는 실로 비인간적 만행이요 살상 행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위그노(Huguenots) 탄압이다.

위그노파 신앙운동은 종교개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개된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은 칼뱅의 조국 프랑스에 옮겨진다. 그들은 구교의 신앙 생활, 종교적 제도에 의문을 품는 가운데 성경적 구원관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신교도적 신앙공동체를 꾸려가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신앙 개혁운동이었다. 그들은 위그노라 불리며 점차 영향력을 끼쳐갔다. 그러던 중 1562년~1598년 사이 위그노 신앙인들은 구체제 권력으로부터 심각한 탄압을 받게 된다. “성 바톨로매우스 축일의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된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살해 당하였고, 공동체는 유럽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종교개혁 정신으로부터 ‘직업 생활도 거룩하며, 하나의 예배’라는 신앙관을 실천하고 있었다. 신앙과 생업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위그노들은 농업 외에도 낙농업, 임업, 수공업, 상업, 무역에 관심을 두고 ‘일과 신앙’을 연결하며 살았는데,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통해 피난 지역에 산업 발달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대교회 때 예루살렘 박해가 선교의 문을 연 것처럼, 위그노 박해가 선교와 산업의 문을 열게 되었다. 지극히 역설적 현상이었다. M.베버는 이 위그노 역사에 착안하여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주제로 연구한 바 있다. 위그노파 신앙인들이 지켰던 경건과 금욕주의적 생활이 산업을 일으키는 자본을 형성했다는 논지이다.

프랑스식 실험정신과 68운동

현대로 올수록 프랑스의 지적 분위기는 다분히 전위적(avant-garde)이며 실험적으로 치닫는다. 수많은 작가, 사상가, 예술가들이 세계적 문화예술의 도시 파리에 모여들어 그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불사르듯 온갖 내면의 정서와 예술혼을 갈구했다. 릴케는 체코 프라하 출신으로 독일, 이태리, 러시아,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실존적 시상(詩想)을 표출하였는데 파리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에세이 소설 <말테의 수기>는 파리의 세기말적이며 염세적인 분위기를 대변하듯 그리고 있다.
당시의 세계적 수도 파리를 중심으로 한 문학과 예술을 예로 들자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전환점에 얼마나 많은 예술 사조들이 등장했던가: 사실주의, 자연주의, 표현주의, 인상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해체주의 등등. 이들은 살롱(salon)에 모여 현실과 사회를 상상이 풍부한 감각으로 비판하고, 토론하는 자유로운 교양인, 지식인을 자처했다. 실제로 사회적 이슈를 이끌어 가는 오피니언 리더의 기능을 하였다. 파리 한 켠에 자리한 카페 마고는 그런 이들이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가 자주 방문했으며, 카뮈, 피카소, 셍텍쥐페리와 같은 이들도 찾았다 한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작가 정신은 파리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에 영향을 끼친 바가 크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때 동경 유학생들이 ‘수입’한 예술 사조들이 파리 브랜드임은 잘 알려진 바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에 기반하여 “실존은 존재에 앞선다”는 명제를 이끌어냈다. 이는 인간의 역사와 전통이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기 전에 현상황이 먼저 삶의 조건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의 실존적 실험정신은 본질적 사랑에서 실존적 연애 등으로 구체화되어 보브와르와 계약결혼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행한다. 그들이 대중에게 노출한 남녀 관계는 자유연애인가 불륜인가? 혼란과 논쟁을 가져왔다. 프리섹스도 포함되는 급진적 실험이었다. 성정치 혁명가인 W.라이히보다 앞선 파격적 연애관이었다.

사르트르와 같은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실험정신은 프랑스 여러 대학에서 구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확산된다. 68운동이었다.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청년층에 대해 드골 정부는 강제로 진압하였고, 이에 노동자들까지 연대하여 운동은 더욱 커져갔다. 이로서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좌파 이데올로기로 사회에 파고 들었다. 그들은 문화막시즘(cultural marxism)이라는 우산 아래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펼치며 대중문화로 파고들었다. 그 활약은 은근하며 지대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여성, 이민자, 장애자 등을 위한 사회평등을 외치고 성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여 기존 체제로 대표되는 기독교와 가정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아래 힘을 얻은 해체주의는 보수 가치관과 세력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

68운동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며 반전 사상으로 국제적 이슈를 이끌어 내는 등 사회 체제, 교육 문제, 종교 문제, 사회적 불평등 해결 등 개혁을 외쳤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그 잠재적 유산은 좌파 내지 진보 세력 안에서 헤게모니 지향의 문화이론 형태로 지금도 사회 각 영역에서 전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들은 문화막시즘이 기획한 문화투쟁을 계속 하며 유물론적,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중이다.

프랑스식 포스트모더니즘

현대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개된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기여를 한 나라는 역시 프랑스다. 프랑스 혁명으로 이미 의식 개혁, 사회 개혁에 앞장선 프랑스 지식인들은 당연히 첨단 지성의 보루로 자처하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프랑스는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즘 확산에 중심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로 진행하며 존재 의미와 사회를 변화하는 틀, 상대적 위치에서 인식하려는 사상이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이들이 즐비하다. 레비스트로스, 알튀세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라깡, 브르디외, 보드리야르 등등.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낡은 유산과 체제에 대하여 저항 및 거부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과거를 파괴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긍정과 부정의 경계에 있다 하겠다. 긍정적인 점은 굳어진 인식, 가치 체계와 사회 구조를 변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면은 미래를 위한 대안과 책임감 없이 파괴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물론 창조적 파괴(니체)라고 변명은 하지만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사회는 생동감을 되찾을 수 있고, 신구 세대의 원활한 순환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 가치와 의미 체계를 해체한 후에 회복과 재건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경우,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고통 받게 된다. 현재 드러난 VUCA(volatility/불안정성, uncertainty/불확실성, 복잡성/complexity, ambiguity/모호성). 이 용어로 대변되는 사회 분위기는 무모한 해체주의에서 나온 결과라 하겠다. 이성을 절대시 하고, 인간 정신으로 새 세상을 건설해 보겠다는 유토피아의 욕망은 이들에게서 나온 과대망상에 가까운 꿈이었다.

영적 전쟁의 최전선 “프랑스”를 위하여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프랑스’는 지구촌에 적지 않은 ‘문제’를 남겼다. 문화선진국으로 유럽과 국제 사회에서 이름을 떨친 것은 과거의 일이다. ‘프랑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어두운 면을 보자면 문제가 심각하다 하겠다. 위에서 제시했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만약 프랑스가 칼뱅의 복음적 개혁정신을 잘 계승했더라면?” “위그노의 신앙 정신을 제대로 받아들였더라면?”

2024 올림픽 개막식에서 보여준 장면들은 현재의 프랑스가 지닌 영적 모습을 표현해 주는 단면이다. 유럽의 대표 지성, 문화의 상징 프랑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파리를 위시해 자랑하는 역사와 유적들은 분명 프랑스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그들이 세계인 앞에 어떻게 자신들의 속내를 보였는지.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

프랑스는 현재 영적으로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중이다. 치유와 회복이 없다면 영적 후진국으로 내려갈 상황이다.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가느냐,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로 가느냐, 그 경계에 있다. 어쩌면 벌써 넓은 길로 기울었는지도 모른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막 13:14). 현재 프랑스가 보이고 있는 영적 상황이다. 유럽의 쇠락한 모습이 여기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남은 자들이 있다

프랑스 안에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러주시는 “남은 자”(Remnant)들이다. 무엇보다도 프랑스를 위해 기도하는 프랑스 신앙인들이 그들이다. 그 곁에 복음의 동지들이 활약하고 있다. 칼뱅과 신앙의 후예들, 파스칼 같은 위그노 후손들, 떼제의 영성 운동도 보인다. 신가톨릭운동(nuovo catholique)의 다수 학자들, 나아가 떼이야르 샤르뎅, G.마르셀, J.마리땡, S.베이유, R.아롱, R.지라르, P.리쾨르, E.레비나스, J.엘룰 등등 기독교 세계관과의 통합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로 비전과 대안을 제시했으며, 현재도 분투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
프랑스가 이러한 정신적 유산과 자원을 가지고 신앙 회복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 르네상스를 재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프랑스에도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숫자는 많지 않을지라도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프랑스의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일어서길 기도한다. 프랑스의 복음적 지성이 깨어나길 기도한다. 프랑스에 성령의 능력이 다시 부어지길 기도한다. 주 예수께서 허락하시는 회복의 역사가 프랑스를 감싸안길 기도한다. 영적 전쟁의 최전선 프랑스여! 더 늦기 전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그리하여 칼뱅의 고백인 를 회복하는 나라 되기를 기원한다.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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